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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위임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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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위임 (마 28:16-20)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다시 갈릴리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청명 절기를 지나고 습니다만 단비가 내려 만물이 신선합니다. 바야흐로 봄 신명에 지피기 좋은 계절입니다. 엊그제 서울 연회를 마쳤습니다. 서울 연회 둘째 날 오후에 목사 안수식이 열렸습니다. 안수를 받고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찬송을 부르며 눈시울을 붉히는 40명의 상기된 표정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얀 가운 위에 감독님이 둘러주신 붉은 색 영대는 그들이 이제 하나님의 멍에를 멘 자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선택했든, 어쩌다 보니 거기까지 이르렀든 하나님은 더불어 할 일이 있기에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아 40명의 신참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어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살다보면 뜨거웠던 첫 마음을 잃어버린 채 일상의 덫에 짓눌려 살아가기 십상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안수례를 행할 때 감독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거룩한 성례를 행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목사의 고유 직무는 두 가지 성례, 즉 세례와 성찬을 베푸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자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곳은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꿈꾸던 자리였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배우고 익히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눈물과 슬픔의 땅, 반역의 땅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꿈이 잉태되기에 가장 적합한 땅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역사 변혁의 주체로 훈련받았습니다. 가혹한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삶이 제 아무리 곤고하다 해도 모든 이들이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고, 나눔과 돌봄과 섬김을 통해 하나가 되는 새 세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가슴 떨리는 감격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그렇게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새로운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고 조금씩 자란다는 사실을 그들은 가슴 시리도록 처절하게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시간,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그 어둠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던 모든 이들의 가슴에 짙게 드리운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패로 끝난 줄 알았던 그 꿈이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곳은 갈릴리여야 했습니다. 세상의 변화는 변방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 어떤 권세인가?

갈릴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뵙다’와 ‘의심하다’ 사이의 부조화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으로 확연하게 그분을 뵈었다면 어떻게 의심할 수 있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뵙다’는 말은 육체의 두 눈으로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았다는 말이 아닐까요? 갈릴리에서 어떤 이들은 주님의 마음과 다시 접속되었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말일 겁니다. 마태는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해주질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당신의 권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권세라는 말이 적합한 번역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권세’ 하면 권력 혹은 헤게모니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권세란 누군가를 강제하여 자기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세는 그런 권세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권세였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권세였습니다.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권세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권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권세인 까닭은 자발적으로 그런 삶을 선택하고도, 스스로 빈곤해지거나 비참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예수님의 그런 권세를 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권세로 바꾸었습니다. 섬기는 권세를 특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순간 교회는 병들기 시작했고, 그 징후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은 교회 밖의 세상입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것에 맛들이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를 그쳤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왜곡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 예수의 권세

먼저 예수님의 권세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권세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셨을 때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마7:29). 저는 말씀을 연구하고 선포하는 이로써 늘 이 말씀을 되씹곤 합니다. 어떻게 전하셨기에 그 말씀이 권위있게 들렸을까요? 저는 그분의 말씀이 사람들이 한 번도 듣지 못한 전대미문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혹은 수사학적인 표현 의 새로움 때문에, 혹은 그분의 웅변술 때문에 그렇게 들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택하신 언어는 놀랍습니다. 

가장 깊은 종교적 진리를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드러내셨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즐겨 쓰는 종교적 수사 하나 없이도 사람들을 종교의 깊은 곳으로 이끄셨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의 가르침이 권세있게 들린 것은, 그 말이 예수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나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꾸며낸 것도 아니고, 예수라는 존재의 울림말이었다는 말입니다. 교리와 신조 등 종교적인 용어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다투는 이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이 죽은 말인 경우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언어와 삶, 이웃들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가 그 말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그 말은 죽은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는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도 행사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귀신들을 꾸짖어 내쫓으셨습니다. 해가 뜨면 사람들을 두렵게 하던 모든 헛것들은 물러가게 마련입니다. 새벽별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던 헛것들의 실체를 폭로하심으로써 그것들을 내쫓으셨습니다. 현대인들은 귀신을 신화적 표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우리 마음을 장악하고 휘두르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야말로 귀신 들린 상태에서 살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면 직립의 사람이 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던 앉은뱅이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가 들어가면 이처럼 선 사람이 됩니다. 귀신의 지배에서 해방됩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 예토穢土에서 전전긍긍하며 세파에 등 떠밀리듯 살아가는 것은 예수와 깊은 일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영혼에 접속되는 순간 우리 영혼의 중풍병, 나병, 손 마름병, 눈멂과 듣지 못함은 끝이 납니다. 우리 현실에 예수의 권세가 회복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 제자 삼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갈릴리의 어부들과 세리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제자로의 부름은 자기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현실로 초대한다는 말입니다. 정치적인 억압이 심하고, 경제적인 궁핍함이 지속되면 사람은 자기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의 삶은 축제가 아니라 견뎌야 하는 지옥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사람들에게서 다른 삶에 대한 상상의 능력을 박탈하게 마련입니다. ‘욕망--노력--충족--권태--더 깊어진 목마름’의 악순환에 갇히게 됩니다. 이 악순환 속에서 이웃은 함께 살아야 할 벗이 아니라 경쟁자가 됩니다. 당연히 삶은 힘겹고 외로움은 짙어집니다.

이 무한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교회를 채우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현실로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명령입니다. 교계의 병폐 중의 하나는 어떤 모임을 기획한 후 많은 이들이 모이면 그게 곧 성령 역사의 증거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만족과 하나님의 뜻을 혼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의 일은 대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심긴 씨는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자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의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때가 되면 전면적으로 다가올 겁니다. 

세례를 베풀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옛 삶의 죽음을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산 사람입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옛 삶의 인력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부자유스러운 것은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척만 할 뿐입니다.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향해서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 몸을 죄의 도구로 죄에게 내주면 안 됩니다. 의의 도구로 자신을 바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례 받았다는 참뜻입니다. 

제자는 스승이 있는 곳에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제자였지만 여전히 제자 이전의 삶을 살았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그들은 예수와 동행하며 삶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배움은 욕망을 꿰뚫고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고난당하시던 시간, 그들은 모두 예수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는 그 분 곁에 머물고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 전쟁의 암운이 드리운 저 한반도의 허리에 엎드려 통곡의 기도를 올리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지금 저 길거리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 곁에서 함께 울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지금 삶의 희망조차 잃어버린 채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물론 우리는 주님이 계신 모든 곳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군데라도 그 현장에 나아갈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주님께 붙들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은 예수의 꿈에 지펴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쓸쓸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문득 희망도 사라지고, 삶의 목표도 사라지고,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족도 친구도 교우도 낯선 사람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가끔 경험하는 어지럼증입니다. 그럴 때야말로 어쩌면 주님의 현존을 가장 깊이 경험하는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사울은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없이 계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제자로 살기 위해 안일한 삶과 작별을 고하고, 극심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말씀만 믿으면 됩니다. 이 말씀만 붙들면 됩니다. 그러면 사나운 파도도 험한 산도 두렵지 않습니다. 거침없이 제자직을 수행하십시오. 주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십시오.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잇대 있는 한 우리는 패배해도 이긴 사람입니다. 이 아름다운 봄날, 봄 신명에 지피듯, 함께 계시는 주님에게 붙들려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벌이며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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