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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신앙의 뿌리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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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뿌리 (고전 15:1-11)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15: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15: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5: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성서시대의 고린도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헬라철학이란 것은 영혼만 귀한 것이고 육신은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는 철저한 이원론적인 철학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육체부활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도 부정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자들을 조롱하게 되었습니다(행 17:32).

여기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 3,4절에서 부활이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성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5절 이하에서 부활의 증인들 가운데 이미 죽은자도 있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자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자신에게도 보이셨다는 사실을 들어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증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고린도가 처한 시대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가 가득한 세상이고 이러한 뿌리에는 불신앙과 과학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바울이 주장한대로 성경과 목격자들의 전통이 부활신앙의 뿌리가 되어 성도의 신앙과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학적 사고를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 왜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하느냐? 하면 부활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활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나의 이성과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이것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모든 나무들은 뿌리를 통하여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서 새싹을 티우게 됩니다. 그러나 봄이 되어도 뿌리가 죽은 나무는 새싹을 티우지 못합니다. 뿌리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곱급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지가 싹을 티우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싹을 티우는 것입니다. 가지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일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땅속에서 일하는 것은 뿌리인 것입니다. 가지는 그 뿌리에 붙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가 건강해야 하고 그리고 이 뿌리를 어디에 박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뿌리를 어디에 박아야 합니까?
영원한 것, 진리, 진실, 사실에 박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이 진실에 뿌리를 박지 않았고 대제사장들의 주장대로 제자들의 거짓으로 부터 뿌리를 두고 출발했다고 하면 과연 그 거짓의 비밀이 지켜질 수 있었을까요?

1972년 5월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약 5개월 정도 앞두고 워딩턴 D C에 있는 워터게이트 건물에 세들어 있던 민주당 본부에 절도법이 들었습니다. 그 자체로는 전혀 대수롭울 것이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체포된 절도범 중 한사람의 주머니에서 백악관 직원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발견됨으로써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워터게이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11월 닉슨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유례 없는 압승을 거두면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1973년 2월에는 그 지긋지긋하던 월남 전을 종결시켰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워터게이트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확대되어 갔습니다. 나침내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10여명은 1973년 3월 21일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은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당시 그들은 미국에서 쟁쟁한 명성을 날리던 초일류 변호사들이었고, 최고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아고 있었고 어떻게 은혜하면 확실하게 그 사건을 가릴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닉슨에게 매료된, 닉슨의 열렬한 신봉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높은 수입이 보장되는 일류변호사직도 미련없이 던져버리고 오직 닉슨을 위하여 백악관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닉슨을 위하여 24시간 동안 근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닉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보좌관들을 위해 닉슨 대통령이 위임해 준 권한 또한 대단했습니다. 이를테먄 그들이 제의하면 장관, 장성, 군대를 이디로든지 옮길 수가 있었고, 공무원들의 채용, 승진, 해임의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하는 연방정부의 예산을 그들의 뜻대로 주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화 한통화로 리므진은 말할 것도 없고 제트기까지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국립미술관 소유의 그림은 무엇이든지 대여 하여 자기 집무실에 걸어둘 수 있었고, 붉은 상의를 입은 슈트어트(미국 백악관에서 고위관리들을 위해 시종드는 사람)가 24시간 방문 앞에서 대기하면서 그들을 위해 봉사했으며, 그들이 원하는 곳이라면 사막에라도 즉시 전화를 가설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급 비밀 경호원들이 24시간 그들을 밀착 경호해주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특권이었습니다. 미국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누려 보고 싶을 만한 특권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보좌관들은 그 같은 특권과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토록 열렬히 신봉하는 닉슨 대통령을 위해 완벽하게 사건을 은폐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의 법률적인 지식으로 볼때 그들이 꾸민 은폐 기도는 완벽할 수 박에 없었을 것입니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로부터 겨우 18일이 지난 4월 8일 , 그들의 음모는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그처럼 최고의 법률 엘리트들이 꾸민 완벽한 음모가 어찌 3주를 못버티고 송두리째 허물어지고 말았습니까?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그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거짓을 지키려 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기에 서로의 진술이 엇갈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생명의 위협도 없었습니다. 그들을 협박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들을 삼키려는 맹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내 그 거짓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주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이 전하는 부활이야기란 대제사장들의 주장처럼 주님의 시체를 숨긴 제자들의 거짓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꾸민 거짓말이 18일을 넘기지 못하고 들통나고 말았다면 무식한 갈리리 어부들이 아무리 말을 잘 맞추었다고 한들 그들의 거짓말이 며칠이나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할 때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증언이 철회도기는 커녕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주님의 부활을 외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부활의 증거를 허물어뜨리기 위한 숱한 도전과 시도가 있었지만, 성경의 증언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부활신앙을 전파하였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부활을 말하고, 부활을 믿으라고 한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의 제자들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두려워 떠는 자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존재의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경험을 하지 않았을 때의 제자들의 모습은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도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미련, 세상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욕심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활을 목격하고 부활신앙을 가지면서부터 제자들은 모두 자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욕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까? 이 땅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지식이고 생활은 전혀 부활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명인이 되었습니다. 소명인이 되었습니다.  
사망의 목격자들, 사망에 매여 있던 제자들은 한결같이 사명을 버렸습니다. 소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목격한 후에 제자들은  뜨거운 사명자들이 되었고 소명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한 부활 신앙은 우리 신앙의 기초요 핵심이며 뿌리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둔 부활 신앙은 우리 삶의 참 기쁨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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