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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알아보는 제자들 (요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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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알아보는 제자들 (요 21:1-6)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신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얼굴을 보고는 못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13절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25 리를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완전히 못 알아봅니다.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못 알아봅니다.  
오늘 본문에 3번째 디베랴 호수 가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못 알아봅니다. 그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이유가 세 가지 오늘 본문에 소개 됩니다. 

못 알아본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다. 

알버트 카뮈의 오해 

어린 시절 집을 떠난 아들 얀은 어른이 되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지만, 늙은 어머니와 여동생은 자신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한다. 가족들에게 자신이 낯선 존재라는 사실이 당혹스러운 얀은 며칠간 존재를 숨기며 어머니가 운영하는 여관에 머무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 사이 얀이 가진 돈에 욕심이 생긴 어머니와 여동생 마르타는 수면제가 든 홍차를 얀에게 먹이고, 밤새 잠에 빠진 얀을 강에다 버리고 만다. 다음 날 아침 얀의 짐에서 여권이 발견되고, 그들은 자기 손으로 자신의 아들/오빠를 죽인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현시하는 주요한 갈등이 극의 3막에 해당하는 이 지점에서야 본격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얀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죄와 윤리에 관한 세 가지 상반된 입장이 인물들을 통해 개진된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도와주시기를 원하고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잘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가 성도답게 풍성한 삶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리며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 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으로 오늘 본문에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동네 아주머니 한분이 화원에 놀러갔다가 버스 타다가 고무신 한짝이 벗어 진것입니다. 그냥 가자 몇 만원도 안하는데 그냥 가자 굳이 차를 세워가지고 뛰어 가서 고무신을 주우러 허리를 구브리는 순간에 뒤에 오던 차가 덮쳐 현장에 즉사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무신 한 짝 찾으러 다가 자신의 목숨을 바꾼 것입니다. 고무신 한 짝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끝난다는 것을 알아 봤다면 그렇게 달리는 버스를 억지로 세워 가지고 무리하게 기다리게 하고 뛰어 가서 줍다가 사고로 죽는 다는 것을 누가 알아보겠습니까? 

간디가 열차를 타다가 신발 한 짝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신고 있는 한쪽 신발 마저 떨어져 있는 곳에 던지더라는 것입니다. 측근이 이상해서 물어 봤다고 합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안 될 것이라면 두 짝이라야 누구든지 신을 것이 아니겠느냐고  
앞을 보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부르시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을 하나님인줄 못 알아  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재산이 많아지니 갈라서게 됩니다. 롯은 자기 눈에 좋은 요단 동편 소돔 땅을 선택하는 데 그곳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황불로 멸망당할 곳 인지를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가 얼마 지나지 않아 풍랑이 일고 자신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 그 배를 타겠습니까? 
    
인생의 수 없이 많은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은 왜 생길까? 성경은 한 마디로 정의 합니다. 사람이 제자리를 떠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생한 문제가 언제 해결 되는가? 그것은 제자리로 돌아오면 반드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소중한 곳 중에 하나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황량한 사막 같은 이스라엘의 전 국민의 식수원이고,  비옥한 옥토로 만들어 주는 수자원이며 주변 어부들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이 호수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워 집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여름 별장이 있는 호수라고 하여 티베라호수라고 하고, 비파와 같이 둥글다고 갈릴리 호수라고 하고 또는 긴네렛 호수라고도 합니다. 

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1. 새벽에 찾아오시는 예수님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모두가 잠자거나 집에 있을 이 새벽, 장소는 인적이 드물고 아무도 없는 이 꼭두새벽 바닷가에 자기를 찾으러 온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제자들에게는 주일 새벽이면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 -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오신다. 실패와 낙심할 때 찾아 오신다. 
주님 찾아오셨네 534장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다른 종교는 찾아 가는 종교지만 기독교는 찾아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주님이십니다.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십니다. 
도마에게 찾아가십니다. 
삶의 현장에 찾아오십니다. 

2. 관심 기울이시는 예수님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 이른 새벽에 잠 안자고 나와서 자기 일도 아니고 제자들의 일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누굴까?
 7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여섯명의 제자들은 물고기 잡으러 가서 밤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 했습니다. 새벽녘에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얘”애들아 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지위와 사명과 역할과 자리를 망각하고 떠나고 이탈 할 때부터 입니다.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이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던지셨던 질문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십니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었는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 자리가 네가 있을 자리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수험생 자녀가 없어서 찾아보니 오락실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 때 던지는 묻는 말이 있습니다. 너 지금 어디 있느냐? 입니다. 이 말속에 담긴 뜻은 위치를 묻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해야 할 역할과 사명과 위치와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내일 시험을 치루어야 할 아들이  오락실에서 정신없이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 어머니가 아들을 향해  `너 지금 어디 있니?'하고  말했다면, 그것은 어머니가 아들의 소재를 알지 못함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있어서는  안될 곳에 있는 아들의잘못을 일깨워 주려는 역설적 강조법입니다.  

따라서 `너 지금 어디 있니?'란 말의 참뜻은 이런 의미가 됩니다.  `네가 지금 있어야 될 곳은 오락실이 아니잖니?'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네 공부방이지 않니?' `네가  지금 할 일은 오락이 아니라 시험  준비하는 것 아니니?'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똑같습니다.
  
`아담아!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죄와  어둠의 나락 속이 아니잖니?' `네가 거할 곳은 빛 가운데요 하나님 존전이잖니?' `더  이상 흑암의 공포 속에서 떨지 말고 지금 당장 나오렴!'

오늘 본문에 예수님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얘”애들아 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예수님께서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닙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것  역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하나님의 질문과 똑같은 의미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고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라,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른 분별력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첫째, `고기'란  단어입니다. - 프로스파기온 prosfavgion prosphagion

물고기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ikthus로써 신약성경에 나타난 물고기는 원문에 모두 이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딱 한 군데 예외가 있으니, 바로 본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 ikthus가  아니라 프로스파기온prosfavgion prosphag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중 본문에서 주님에 의해 단 한 번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원래물고기란 의미가 아니라 식탁 위에 올려지는 진미, 즉 진귀한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참뜻을 살리면 주님의 질문은 이런 의미가 됩니다.
`얘들아! 너희가 정말 귀한 것을 얻었느냐?' 

주석을 가하면 더 깊은 의미를 포착하게 됩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진리인 나를 등져서는  아무리 수고하여도 결코 귀한 것을 얻을 수 없단다.

두 번째로  `얘들아'란 단어입니다. - paidivon파이디온 very young child, 유아 infant.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 같다고 장성한 후에는 어린아이를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어린아이들을 지칭하는 단어로써 이미 성인이 된 제자들을 부르는데 사용되기에는  전혀 적합치 않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본문 이외에  이 단어가 성인에게 호격으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 역시 이제껏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갈릴리 바다에서만은 제자들을 딱한 번 `어린아이들아!'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한 채 단지 허망한  바다를 향해 헛수고만을, 그것도 밤을 새워 가며 열심으로 헛수고하는 제자들이  주님 눈에는 어린아이―철없는 아이와 같이 비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철부지들아! 그처럼 철없이 살아서는 귀한 것을 절대로 얻을 수 없단다'

한때 모 보일러 회사의 `효자 광고'가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습니다. 시골에 살고계시는 부모님 댁에 기름 보일러를  설치해 드려, 부모님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나실수 있도록 해 드리는 효자가 되자는  캠페인성 광고였습니다. 그 광고 이후 시골 지역에서 해당 보일러의  판매량이 급증했던 것으로 알려  졌습니다. 보일러를 설치해드린 도시 자식들은 시골 사람들로부터 효자란 칭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IMF구제금융 이후 사정이 돌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 모르고 치솟는 기름 값을 부담할 능력이 없는 시골의 많은 부모님들이 보일러를 가동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추위에 덜덜 떨며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효도하려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엄청난 불효가 된 것입니다. 어느 자식이 이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오늘 내가 옳다고 행한 선택의 의미가 내일  어떻게 변할는지 조차 알지 못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양 어처구니없이 착각하며 살아가는 우리야말로 주님 보시기에 철부지들 아니겠습니까?

바로 살지 않으면 패가망신을 시키겠다고 큰 소리 치던 노무현 대통령의 검찰의 조사를 받고 참으로 비참한 상태로 된 것을 보고 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이 개인  휴대 통신(PCS)사업자 선정 의혹과 관련하여 또 다시 구설수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 진위 여부를  떠나, 국민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단 5년간만 위임한  권력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양  오인하며 철없이 살다가 귀한 젊음을 스스로 망친  그 젊은이 속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발견케 됩니다.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권세―그것도 남의 권세에  업혀 호가호위하면서 허망한 것을 쫓던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철부지들이 아니었습니까?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영국의  다이애나비와 에집트 재벌의 아들 도드가 비명횡사했던 `뽕달마'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처럼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터널이기에,  그 터널은 길고 어둡고 게다가  속이 휘어져 있어 대형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위험지역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터널이 아니었습니다. 위에 교량이 있기에 그 아래로 차량 통행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반 지하 차도였습니다. 지하 차도에 들어서는 순간  맞은편 끝이 보일 정도로 곧고  짧은 차도였습니다. 대형 사고가 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점이었습니다. 그  차도가 개통된 이래 그 속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전한 도로 위에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들은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어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사고 지점의 지하 차도 벽과  중앙 교각에는 그들이 탔던 차가 좌충우돌하면서 긁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죽음의 자국 위에서, 순식간에 몰아닥친 죽음 앞에서 내뱉았을 다이애나비와  도드의 외마디 비명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무엇이라도 움켜쥐기 위해 허공에서 부르르 떨었을 그들의 빈손만을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불현 듯 엄습한 죽음 앞에서 부르짖는 우리 자신의 비명 소리, 허공 속에서 떨고 있는 우리 자신의 빈손을 듣고 또 보았습니다.

죽음이 코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과 동시에 아무런 쓸모없는 허망한 부귀영화만을 움켜쥐려 발 버둥 치다가 철저하게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될  우리의 모습이야말로, 주님 보시기에 한심한 철부지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3.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 집에 부족한 포도주를 갈수록 좋게 만들어 주시듯이 예수님은 빈거물 적자 인생을 흑자 인생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고 구하는 자는 받은 줄로 믿으라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브라질의 정글에 화재가 났습니다. 한주간 두 주간이 될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선진국들이 한 달이 지나자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산림이 다 탔을 경우 지구에 다가올 재난은 상상은 초월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세계 열강이 참여했지만 타올라가는 산불을 막을 길이 없어 삼 개월이 타올라갔지만 끌 수가 없었습니다.
이불은 3시간 폭우가 내리자 금방 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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