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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양 편의 십자가 (창 18:23-25, 눅 23: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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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양 편의 십자가 (창 18:23-25, 눅 23:32-33)
  
학교에서 학생들이 학급 단체 사진을 찍을 때에 한국에서는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담임선생님이 가운데 앉고 학생들이 그 주변에 섭니다.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가운데 서고 교장선생님, 담임선생님은 양쪽 가에 섭니다. 

미국에서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답니다. 한국인에게는 ‘중앙’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중심지향적 사고를 하고 서양인들은 변경지향적 사고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중앙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에는 중앙교회가 유난히 많습니다. 도시 주변에 있는 교회도 ‘아무개 중앙교회’라고 합니다. 
  
한국인의 사고는 집합적입니다. 그래서 개인보다 단체, 공동체가 중요하고 ‘우리’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서양인의 사고는 개인적입니다. 한국인의 사고가 구심적 사고라면 서양인들의 사고는 원심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고향 가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그 복잡한 길을 한해에 두 번씩 왕래합니다. 
  
중앙의 사전적 의미는 사방의 중심이 되는 한가운데, 양쪽 끝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지점, 중심이 되는 중요한 곳, 지방에 상대하여 수도를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서울은 어디에서나 ‘올라간다’고 합니다. 방향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코스텐바움은 “사람들을 능력 있게 보이게 만드는 것은 중심됨(centeredness)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중심됨이란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올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바로 이런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미더필더인 ‘2635세대’(26세-35세)의 최대의 관심은 돈이라고 합니다. 2635세대의 키워드는 ‘자기중심적’(individualized)이란 말과, 다양한 문화에 개방적인 세대(intercultural)이란 말입니다. ‘자기중심’은 현대에 가장 특징적인 언어이고, 우리의 삶의 형태입니다. 
  
스펄전목사님은 “그리스도는 세계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심 되는 인물이다. 모든 것이 그를 기대하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역사의 모든 회전은 그에게로 집중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의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는 시점이 되고,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없이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3만 명 이상의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다른 이름은 모두 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이름들입니다. 성경은 적어도 40명의 저자들에 의해서 1,600년 이상 긴 세월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로마군인들과 유대 관원들은 예수님을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몰아 세 십자가 중에 가운데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이 역사의 중심인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려고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을 도와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다른 사람을 다 주변 인물로 봅니다. 자기가 항상 중심이고 모든 사람을 자신의 양 편에 세웁니다. 이런 우리 시대의 삶의 현상 가운데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중앙에 서 있었던 사실을 생각해 보고, 중앙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양편의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양편의 십자가는 자신이 행한 악 때문에 달리는 십자가였습니다. 

누가복음 23:32에는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라고 합니다. 예수님 양편에 있던 십자가의 사형수는 누가복음에는 ‘행악자’라고 합니다. 다른 성경에는 ‘강도’라고 합니다. 당시에 십자가에는 아무 흉악한 범죄자만 매달아 죽였기 때문에 이들도 아주 죄질이 나쁜 강도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편에 달렸던 두 사형수를 마태, 마가는 강도라고 하고, 누가는 행악자라고 합니다. 강도든 행악자든 그들의 구체적인 범죄는 알 수 없지만 죄질이 나쁜 강도들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못된 죄를 범해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는 괜히 예수님의 십자가 양편에 달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두 사람과 그들이 대화는 예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중요한 사람이며, 중요한 사건입니다. 
  
두 행악자의 대화를 보세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한 편의 강도가 말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원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아는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한 편의 강도는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바로 이 말은 구원받은 강도의 증언입니다. 그는 많은 죄를 짓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는 죄인이었지만 구원받을 만한 지혜가 있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는 한 마디가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죄악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아본’입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법이 무엇입니까? 법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이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편입니다. 
  
신명기 24:16에는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죄로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 양편에 있던 강도들은 자기 죄로 죽임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마틴 루터는 “세상은 술 취한 농부를 닮았다. 그를 말안장 한쪽으로 올려놓으면 곧 다른 한쪽으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가 아니면 도덕폐기론 중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우리들은 육체적으로 탕자와 같은 명백한 불순종이 아니면 장자와 같은 위선적인 순종 둘 중에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회개가 없이는 누구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옛날 전쟁에서는 군인들이 전사할 때 총알이나 포탄 때문이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총상에 뒤따르는 감염 때문에 죽은 군인이 더 많다고 합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애초의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의 결과로 오는 영혼 파괴의 감염 때문에 무너집니다. 회개만이 그 과정을 끊고 깨끗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20에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합니다. 이들의 자기 죄로 십자가에 달린 자들입니다. 이들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전혀 달릅니다. 이들의 십자가는 우리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아무 칭찬이 없습니다. 
  
예수님 양편에 못 박힌 두 강도는 모든 인류의 모형입니다. 두 강도가 다 죄인입니다. 모든 인류가 다 죄인입니다. 로마서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 죄인이지만 인류는 둘로 구분됩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은 자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3:19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 같은 죄인이지만 회개하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3:3에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관념에는 오른편 강도가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른편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인지, 우리가 볼 때 오른 쪽인지 모르지만 오른쪽 강도가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회개하는 자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의인입니다. 마태복음 25:32-33에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분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옳은 자를 오른쪽에 두실 것입니다. 
  
회개는 낙원을 보장합니다. 주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부탁했던 강도는 구원에 대해 불확실했습니다. 어딘지 모르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꼭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고, “기억해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구원입니다. 

  
둘째, 중앙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 때문에 달리는 십자가였습니다. 
  
누가복음 23:33에는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중앙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성경은 “해골이라 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성 밖에 있는 무덤 근처 어디일 것입니다.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Vulgate)역 성경에는 ‘해골’이란 말을 ‘칼바리움’(Calvarium)으로 번역하여 영어로 ‘갈보리’(Calvary)라고 하였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히브리말 ‘골고다’를 그대로 쓰고 있고, 누가는 ‘해골’이라 했습니다. 성경에는 ‘갈보리’라는 말이 없지만 이런 전승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을 ‘갈보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라는 말을 봐서 예수님은 중앙에 못 박히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므로 중앙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양 편의 사람들을 다 구원하셔야 하므로 중앙에 서 계셔야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예수님을 두 행악자 보다 더 악한 죄인으로 보았으므로 강도들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앙에 매 달아 가장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은 양편의 화해자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중간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중매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앙에 있는 분입니다. 
  
에베소서 2:14에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려고 중간에 서셨습니다. 그 담을 허시려고 중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스라엘 성막이나, 성소나, 성전은 언제나 백성들의 중앙에 있었습니다.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성막이나, 성소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백성들 중앙에 계셨습니다. 
  
성막은 광야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출애급한 60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국가의 중심입니다. 성전이 파괴된 것은 국가가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는 국가의 중심입니다. 온 인류의 중심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신명기 5:5에는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고 합니다. 모세는 구약에서 율법의 대표자이며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무당종교라고 하는 ‘샤머니즘’은 무당(샤먼)이 신과 사람 사이의 중간자가 됩니다. 샤머니즘에서는 중간자인 무당이 없으면 신과 사람은 직접으로는 못 만납니다. “한국교회가 샤머니즘적이다”라는 말은 중간자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신앙적 삶이 목사에게 의존적입니다. 모든 것을 다 목사가 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은근히 가지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은 의존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자가 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자가 되려면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어야 하는데 예수님 외에 누구도 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정자, 화해자의 역할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중간 역할을 하십니다. 
  
요즘 북한이 계속 도발적인 위협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화해자, 조정자의 역할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이 하겠습니까? 가제는 게 편입니다. 일본이 하겠습니까? 일본은 속으로 웃고 있을지 모릅니다. 일본은 말리기보다 한판 붙기를 기다리고 있을 나라입니다. 미국이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와 미국은 북한의 위협 대상 당사자입니다. 그래서 미국도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중간에 개입하셔야 해결될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중간에 서 계셔서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묘한 방법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해결하실 줄 믿습니다. 
  
신부와 목사와 랍비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먹음직한 생선 한 마리가 나왔는데 기도를 마치고 나니 신부가 먼저 말했습니다. “교황이 교회의 머리이므로 머리 부분을 먹겠습니다.” 목사는 “최후의 진리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꼬리 부분을 먹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대 랍비가 “유대교에서는 양 극단을 싫어합니다”하면서 중간을 먹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좌도 우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중립이십니다. 그래서 화해자가 되고, 중앙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중앙이나 중립이라는 위치는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하는 자리입니다. 좌도 우도 다 껴안고 함께 가고, 함께 구원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런 자리였습니다. 중앙에 선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하여 구원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기에 중앙에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시려고 세 십자가 가운데 중앙에 서셨습니다. 

  
결론 

영국인이지만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앤드류 머레이는 남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립니다. 그는 240권의 경건 서적을 저술하여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주님과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물으셨습니다. “앤드류야,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냐?” “주님, 언제나 주님은 저에게 첫째이십니다”라고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대답을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것 같아서 고심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지?”라고 고심 끝에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다시 주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은 저에게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 때 주님은 기뻐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8백만 신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1억 신 중의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은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두지 말고 중심에 두어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집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집에 온 구경꾼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 양편 십자가의 행악자는 죄인인 우리 모두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구원받았던 한 편의 강도에게 주신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실 중앙의 십자가 바라보며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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