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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계명 (요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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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계명 (요 13:31-35)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여인이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엘레나 루즈벨트 여사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녀는 20세에 결혼을 하여 11년 동안 6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중에 한 아이가 죽었을 때, 한 친구가 찾아와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에게는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다섯이나 남아 있어.” 
그녀가 20세 때 결혼한 남자가 바로 루즈벨트입니다. 그는 젊고 패기 있고, 장래성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관절염에 걸려 다리가 말라 버리는 불행에 직면케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쇠붙이를 다리에 대고 다리를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즈벨트가 엘레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불구자가 되었는데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오?” 
그러자 엘레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줄 알았나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이예요.” 

이 말은 다리 불구가 된 뒤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 있던 루즈벨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1932년 다리가 불구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1936년에 재선, 1940년에 3선, 1944년에 4선까지 되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불구의 남편에게 용기와 희망과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던 엘레나, 그녀야말로 어려움 가운데 처한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줄 줄 알았던 가장 훌륭한 분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아니 계속해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제자인 가룟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된 다락방의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직접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씻어주셨습니다. 그건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팔아먹으려고 모든 준비를 다 하고 있는데 막상 예수님은 그런 자기의 발을 씻어주고 계십니다. 마치 하인이 손님들이 발을 씻어 주듯 그렇게 자기의 발을 직접 씻어주시는 주님의 손길 앞에 유다는 무릎을 꿇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시침을 뚝 따고 지나갑니다. 

베드로가 “제 발은 씻기실 수 없습니다.” 하고 반발을 하자 “베드로야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는다면 나와 너는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고 하셨고 “그러면 온 몸을 다 씻어 주십시오”라고 할 때 “이미 목욕한 사람은 손과 발만 씻으면 된다 그러나 다는 아니다”라고 하실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깜짝 놀란 베드로가 요한에게 눈짓을 하여 예수님께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묻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내가 빵을 적셔다 주는 사람이다” 하시며 빵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시며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십니다. 이때가 가룟 유다가 회개하여야 할 두 번째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냥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군병들을 이끌고 예수를 넘겨주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그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남아 있었습니다. 군사들과 함께 온 가룟 유다가 “선생님 평안하십니까?” 하며 입을 맞춥니다. 그때 예수님은 “친구여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네 할 일을 하라”고 하시면서 군사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라” “내가 바로 예수다”고 할 때 군사들이 주춤하며 뒷걸음치다가 엎어집니다. 그때가 유다가 회개할 기회였지만 그때도 유다는 그 기회를 그냥 흘려버립니다. 마지막 예수님이 잡히시고 난 다음 유다의 마음에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래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잘못 판단했다”고 하면서 돈을 돌려주고 돌아서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는 후회를 하면서도 돌이키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림으로 주님이 다시 찾아와 회개를 촉구할 기회조차 스스로 던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메시지를 이 시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영광을 받으실 주님이십니다.
그가 나간 후에 즉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기 위하여 밖으로 나간 후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이제 참으로 주님께 속한 자들만 남아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지금 주님이 십자가를 인하여 얼마나 소망에 차 있고 기대에 차 있는지 자랑하십니다. 그 말씀 가운데 “영광”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 같지 않습니다.
맨 처음 주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 십자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감으로 더욱 더 확실해졌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피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적극적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결코 피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광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 사랑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편으로 몇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창조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창조 언약은 먼저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안식하라는 것은 단순히 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휴식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몸과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실 때 건강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 아무리 피곤해도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우리 몸은 자동적으로 피곤이 풀려지게 되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때 놀랍게도 우리 몸 안에서 모든 피곤 물질이 사라지고 새 힘이 넘쳐나도록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도 드리기 힘들 정도로 피곤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피곤도 예배하는 가운데 풀려지게 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믿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노동입니다. 일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주를 위한 수고 그리고 우리의 삶 모든 부분이 다 주를 위한 삶이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새 힘이 넘치도록 만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만 이런 수고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로 더 건강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을 나 혼자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기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청소도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혼자 나와 수고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한데 그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나로 하여금 이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러므로 이 일을 통해 내 몸과 마음이 더 편안해지고 즐거워지게 되리라 아울러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고하는 나의 삶을 온전히 붙잡아 주시리라고 믿으십시오. 

그래 기쁨으로 마음으로부터 찬양하며 그 일을 감당해 나가면 내 안에서 엔돌핀이 솟아나오면서 나를 더욱 편안하게 건강하게 만들어주어서 몸과 마음이 다 편안해지고 그렇게 기쁨과 감사함으로 수고하는 동안 우리의 몸의 연약한 부분도 다 회복이 되게 되어 있고 삶의 부족한 부분도 하나님이 채워나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두 번째 창조의 언약 창조의 복이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입니다. 한 마디로 일입니다. 그러니까 수고하는 것 노동하는 것이 일하는 것이 바로 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배필로서의 사랑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로다” 즉 서로를 칭찬해주고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사랑이요 서로 도와주는 그런 사랑이 바로 행복을 위한 열쇠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을 추구하며 나아가기 위해서 한 가지 해서는 안 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 먹되 한 가지만 먹지 말라 다 하되 한 가지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지켜야 할 유일한 법도입니다. 그 법도대로 따를 때 사람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순종하면 그 법도를 어기면 그때 주어지는 것은 “반드시 죽으리라” 영원한 죽음입니다. 한데 사람들의 선택은 불순종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가 사람 앞에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영원한 죽음 가운데로 던져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사람들에게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들의 순종을 통하여 아들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무조건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자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예수 믿는 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러워집니다.

셋째로,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다시 영광스럽게 하실 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죽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비참한 상태에 결코 내버려두시지 않고 다시 그를 살리셔서 그의 영광을 회복시키시고 교회의 머리요, 이 세상의 심판 주로 높이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얼마나 확신에 찬 말씀입니까? 
이 말씀에는 “암, 주고말고. 분명히 주신다”라는 확신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자신에 대한 상처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면류관이요 영광으로 보았고 그 십자가 때문에 이루어질 놀라운 것들을 확신 가운데 바라 보셨습니다. 이 십자가에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귀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다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모든 믿는 자들을 예수님의 손에 맡기실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심판도 예수님의 손에 맡기실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십자가입니까?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조금씩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다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우리 가운데 자신의 삶에 아픔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예수를 알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든 것입니다. 
십자가는 비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죽음이었고, 이 죽음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히 5:8~9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셨을 때 나타난 영광은 너무나도 엄청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신 영광에 하나 더 추가시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얻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 뿐 아니라 우리 자신 영광스러워집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도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아픔이 있고, 실패한 경험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을 것입니다. 약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등감을 갖고 분노를 갖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감추고 미워합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런 아픔들이 있었기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런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고 따뜻한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심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이 그냥 말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직접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 모진 고통과 비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릴 때 내가 한 잘못 때문에 부모님이 대신 욕을 먹을 때 우리 마음이 아팠던 것 기억하실 것입니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부모님이 욕을 먹습니다. 부모님이 비난을 듣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부모님께 너무 미안하고 또 감사했던 것 그래서 더 슬피 울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아플 때 밤을 지새며 곁을 지켜주시던 그 사랑, 바로 그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이 지금도 우리의 곁을 지켜주고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그런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예배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할 때 주님은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아플 때 아프다고 “하나님 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부르짖는 우리를 하나님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신 채 내려다보시며 “알았다 내가 고쳐줄게” 하십니다. 아픈 몸을 가지고도 또는 도와주는 사람 하나도 없이 혼지 수고하면서도 오히려 주님을 찬양하며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할 때 하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핑 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그냥 놔두시겠습니까? 몸의 아픔도 고치시고 마음의 슬픔도 위로해주시며 자상하게 돌보아주시고 우리의 길도 하나씩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이 귀한 복을 다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난 후 제자들만 남았을 때 그들이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들에게 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제 예수님은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제자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계획을 세우고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며 어떤 조직을 편성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그런 명령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새 계명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단순히 관심을 가지고 잘 대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정도라면 주님의 제자들 외에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사람이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하는 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기질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기질대로 하도록 하는 것은 아부하는 것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쥐꼬리만한 위치에 있어도 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설명하시면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 주는 사람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던 한 유대인이 길에 쓰러져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중상이었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짐승에 태워서 여관을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하고 나중에 다시 들르기로 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먼저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결단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돈도 써야 하고 시간도 들여야 합니다. 때로는 어떤 부담과 희생이 따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기분 좋게 아첨이나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희희덕거리는 것을 사랑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내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 자신과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싫어하는 것, 내 기분이 좋으면 잘해주고 기분이 나쁘면 못 본체 하는 것,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바른 교회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거창한 건물이나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무리들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은 “너희들이 성경을 갖고 다니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너희들이 찬송가를 잘 부르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들지도 않고, 따지려면 따질 것이 너무나도 많고, 어떤 부분은 체질에 맞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희생입니다. 자기를 바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서로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요일 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롬 5:5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그 첫째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로 사랑입니다. 창조 언약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이 사람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귀한 열쇠를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도 서로 돕는 배필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 사랑입니다. 
한데 그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 사랑입니까? 
예수님이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면 주님처럼 하는 것입니다. 

요 15:9~10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니까 성령이 누구에게 사랑을 부어주시느냐 하면 바로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서로 사랑하겠노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을 받겠다 나도 사랑을 받고 싶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사랑하겠노라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내가 먼저 나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까지도 주는 친구 필로스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자기주장이나 하는 친구, 자기 이익을 위하여 따지기나 하고 친구를 팔아먹는 경멸스러운 친구인 헤타이로스가 되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도 없지 않습니다. 흔히 너무 이악스럽다고 하지요? 한 마디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여간 잔 머리 굴리는 데는 도가 튼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돌이 굴러가는 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리는데도 그런 사람은 그런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기만 똑똑한 줄 알아요. 다른 사람이 다 그런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래도 계속해서 자기 이익만 바라고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 희생은 하지 않으려 하고 어쩌다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어도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빠져나가려고 하고 조금 유리하다 싶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차지하려고 하고 내가 피곤하고 내가 힘드니까 니가 하라고 합니다. 그럼 상대편은 안 피곤하고 상대편은 안 힘듭니까?

그래서 심지어는 부부 사랑을 이야기할 때도 남편에게 뭐라고 합니까? 
엡 5:25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28절에서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 아내들에게는 엡 5:22~24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하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선순위가 아내에게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남편은 칭찬을 먹고 살고 아내는 사랑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에 대한 최고의 칭찬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남편을 인정하는 아내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남편은 평안을 얻습니다. 자연스럽게 남편의 마음이 사랑으로 아내를 향하게 되는 것이요 그래서 이어서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주신 것처럼 그렇게 목숨을 바쳐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바꿔서 말하면 인정을 해주고 칭찬을 해주면 목숨 바쳐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삐거덕 거립니까?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해주지 않거든요. 남자는 한 마디로 자존심 덩어리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자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내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힘 자랑 해봤자 아닙니까? 그런 남편을 세워주는 것은 칭찬입니다. 자기가 잘 난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데 그런 자기 말에 아내가 따라준다고 할 때 그거처럼 신나는 것이 없거든요. 

그래 그런 자기를 인정해주는 아내가 그런 자기를 칭찬해주고 내세워주는 아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사랑할 수밖에요. 그러다보면 죽기 살기로 아내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을 일이 아니면 다 망치는 일이 아니면 그냥 남편의 말을 따라 주세요. 그랬다가는 다 망한다고요? 한번쯤은 망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정신을 차리게 되어 있어요. 결국 아내는 조언자의 자리에 남편은 주관자의 자리에 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창 4:16 이하에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다스리기를 원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다스려라 남편은 아내의 말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떠나면 그 결과가 저주를 받고 평생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내 입장에서는 조언을 하되 주관하려고 하지 말고 또 자기의 조언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조언하는 것은 아닌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남편 역시 아내의 말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내의 그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분별해야 하고 무시하는 태도로가 아니라 거절을 하더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그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권면합니까?

먼저 아내를 향하여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한 다음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독을 품지 마세요. 비수를 품지 마세요.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을 향해 왜 독을 품고 왜 비수를 품습니까? 다 남편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먼저 아내가 그렇게 계속 찔러대고 독을 품어 대니까 남편이 독이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오는 것이 독 밖에 더 있고 비수에 찔리지 않으려고 피 보지 않으려고 하니까 거세게 반발하는 것이 아닙니까? 기억하세요. 먼저 아내들에게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뭐라고 합니까?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다뤄야 합니다. 한번 금이 가거나 깨져버리면 그 다음에는 대책이 없습니다. 그거 다시 고치고 때워놔도 그 아픔은 평생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사랑밖에는 없는데 왜 거기다 대고 발톱을 세웁니까? 

왜 사기꾼에게 넘어갑니까? 믿도록 만들잖아요. 한데 남편에게 사기를 치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남편이 좋아서 결혼한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러면 남편을 먼저 세워주세요. 그러면 남자들은 미련퉁이라 죽기 살기로 아내를 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발톱을 세우면요 돌아오는 것이 뭐에요. 결국 남는 것은 상처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 누가 먼저냐 하면 아내 먼저에요. 그렇다고 미련하게 당신이 먼저 하랬다고 하면서 그것만 또 말하면 그것도 어리석음이지요. 

한 마디로 예수님이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남편도 따지지 말고 묻지도 말고 목숨 바쳐 아내를 사랑하시고 그런 남편이 후회하지 않도록 아내도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남편을 세워주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의 모습입니다. 먼저는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맞는다고 하지 마시고 서로 마음을 맞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되 동정하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고 그렇게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마음을 가지면 상대방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불쌍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그럴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서로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알고 어깨를 으쓱대는 어리석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 오히려 복을 빌어주라. 왜냐하면 너희가 이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즉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복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가 복을 받기를 원한다는 주님의 뜻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냐?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복을 빌어 주라는 것입니다. 남편을 세워주고 남편을 인정해주라 그리고 아내를 연약한 그릇처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 줘라. 그래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원하시는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랑의 사람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불란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조각품들 중의 하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의 수작이라 합니다. 그런데 애석한 일은 누가 만들었는지 그 이름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눈물겨운 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조각가가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도 피와 땀을 짜내는 노력의 결과로 걸작품을 완성시켰는데 하루는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기에 조각품이 얼어 상할까봐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덮어놓음으로써 조각품은 보존이 되었지만 그는 얼어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 얼어 죽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해도 버릴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시켜 가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것은 사랑합니다. 남의 자식이 아무리 인물이 잘났고 재주 있고 훌륭해도 내 자식만큼은 사랑이 안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이 모든 자식을 다 사랑하나 그중에도 어리고 철없고 병든 자식을 더 불쌍히 여겨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녀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아울러 주님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므로 주님의 참 제자된 도리를 다하시며 베드로 사도가 주신 말씀처럼 복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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