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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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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대구 지하철에서 방화사고가 있었습니다. 140명이 넘는 안타까운 생명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입은 참사였습니다. 
실종된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가슴을 더 아프게 합니다.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황태영(22․경북 울산)씨는 같은 과 여자친구의 졸업식에 가기위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여자친구를 놀래 주기 위해 일이 있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 뒤 깜짝 파티를 벌여 줄 생각이었다합니다. 

학교에서 황군을 기다리던 친구들은 졸업식이 끝난 시간인 오후 2시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휴대전화도 받지 않자 사고를 직감하고 황군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병원에 있는 오후 4시30분쯤에 확인할 수 있었다.

최봉남씨는 한달 전 출산한 며느리보약을 찾으러 한약방에 가는 길에 실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구시청 총무과 이달식(45)씨는 딸 현진(19)을 잃었습니다. 이 딸은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 합격한 딸입니다. 온 가족이 일년동안 딸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접하는 전문가들은 한국도 더 이상 테러의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한국 병리학 연구소 백상창 박사는 한국사회가 거쳐온 급격한 경제․사회변동이 구성원들의 사악한 충동을 참는 능력을 약화시졌다“고 말하며 언제 어떤 사람이 이같은 테러를 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번 일은 개인의 불행과 불만을 사회 탓으로 돌려 분풀이하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오해로 인한 갈등이 계속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쁨으로 참여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하나는 비판의 눈으로 대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의 비유입니다. 하나는 잃은 양의 비유이고 또 하나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공통점은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은 14장 마지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에 대한 반응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여기서 죄인들이란 창기와 세리들같이 종교와 도덕적인 입장에서 본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동네에 있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비난하며 투덜거렸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수군거림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도 구원의 말씀을 거부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구원의 기쁨에 함께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비유에 나타난 공통점 

① 한 생명, 하나의 가치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를 잃어버린 이야기입니다. 

(눅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반복되는 말은 하나를 잃으면이라는 말입니다.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양은 약한 동물입니다. 
개나 고양이는 영리해서 한 번 왔던 길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은 똑같은 길을 수 없이 데리고 다녀도 길을 익히지 못하고 방향감각이 발달되지 않아서 스스로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양은 몸집은 큰데 비해서 다리는 짧고 약합니다. 구덩이에 빠지면 나오지 못합니다. 
노루와 같이 빨리 달아나지도 못하고 염소와 같이 뿔이 달린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나운 짐승을 만나면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다가 쿡 넘어져 맹수의 밥이 됩니다. 

양은 벌렁 넘어지면 혼자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다리를 버둥거리다가 죽습니다. 
양은 앞서서 못 갑니다. 양을 앞에 두고 목자가 뒤에서 “가” 하고 명령을 하면 다 꾸물꾸물 뒤로 물러서고 앞으로 갈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양에게는 목자가 꼭 필요하고 목자를 잃은 양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꼴을 얻지 못하고 굶어 죽게 됩니다.
목자는 100마리의 양 중에 한 마리를 잃은 것입니다. 

드라크마 비유에서 잃은 것도 하나의 드라크마입니다. 
가지고 있던 10개의 드라크마 가운데서 하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한 드라크마는 데나리온과 같은 단위입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나머지 9개의 금액과 비교하면 작습니다. 

② 두 번째의 공통점은 열심히 찾는다는 것입니다. 

(눅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양 잃은 목자는 99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녔습니다. 
동전 잃은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두 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열심입니다. 이 열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가 있겠습니다. 

※ 숫자적으로 보면 99마리와 하나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한다면 누구나 많은 수에다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목자는 적은 수에다가 중점을 두었습니다. 

※ 동시에 여기에는 큰 모험과 위험과 희생이 따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자기의 생명도 위협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이 지방은 해가 되고 어둠이 내리면 맹수들이 출몰하는 곳입니다. 자기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이렇게 큰 위험을 건 것입니다. 

사실 양 한 마리 값을 따져 보면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찾아야 했습니다. 

사랑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었을 때에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찾아나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찾도록 찾는다는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양이 비참한 모습을 당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양이 추위에 떨며, 굶고, 혹은 맹수에게 쫓기는 것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밥이 목에 넘어가겠습니까?
사랑하는 양이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길을 잃고 “음매” 거리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편히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든지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앉으나 서나 잃은 양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찾을 때까지 찾아다닙니다.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은 등불을 켜들고 온 집안을 쓸고 뒤져서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집은 창문이 작아서 낮에도 어둡습니다. 때문에 등불을 켜든 것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에서 잃어버렸으니 어디로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대청소할 때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단법석을 피우면서 찾고 있습니다.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③ 세 번째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눅 15:5-6)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양을 찾은 목자도 은전을 찾은 여인도 기뻐했습니다. 

만약에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그냥 두고 나머지 99마리와 집에 돌아왔다면 그 목자에게 기쁨이 없었을 것입니다. 양에 대한 염려로 마음이 아팠을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으로 인한 재산의 손실에서 아까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찾도록 찾았습니다. 

고생을 했지만 양을 찾은 목자는 즐거워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왔습니다. 
그리고 벗과 이웃을 모으고 잔치를 벌립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 목자는 양 한 마리 값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들여 동네 잔치를 했습니다. 
이 집의 양은 다해서 백 마리라고 했으니 백 마리 중에서 몇 마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장담하는데 이 잔치에 잃었다 다시 찾은 양은 절대로 안 잡았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다시 찾은 여인도 동네잔치를 벌렸습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은 것도 아니고, 은전 하나 찾았다고 동네잔치를 벌렸습니다. 
그 비용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은전 아홉을 다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말이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 주님은 잃어버린 하나를 찾은 그 기쁨이 최고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를 찾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예수님의 사역이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적용해 보아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누가 잃어버린 양이고 누가 99마리 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잃어버린 드라크마이고 누가 나머지 9개의 드라크마인가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힘이 없고 불쌍한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양, 나머지 동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자기들 나름대로 특권을 누려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도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자칭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죄인 때문에 하늘에 더 큰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잃어버린 하나일 수도 있고, 그 나머지 일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가난한 집에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가난하고 아이들은 많아 먹고살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집 사람이 와서 어떤 사람이 아이를 하나 입양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아이들 중 하나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보다도 아이를 위해서 하나라도 보내면 그 아이만 이라도 잘 먹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날 밤 아이들이 다 잠든 시간에 부부는 잠을 못 이루고 내일 누구를 보낼 것인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첫째라 안됩니다. 둘째는 딸이라 안되겠고, 셋째는 어릴 때부터 몸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보낼 수가 없습니다. 넷째는 유별나게 좀 느렸습니다. 남의 집에 가는데 눈치껏 잘 해야 귀여움 받고 
사랑 받을 수 있을 텐데 그 아이를 보내면 미움을 받을 것 같아 안되겠습니다. 
다섯째를 보내려니 ...... 여덟째 아홉째 다 생각해 보았지만 보낼만한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다 데리고 살았습니다. 

잘 생겼든 못 생겼든, 똑똑하든 똑똑하지 못하든, 건강하든 약하든 부모에게는 모든 자식이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유용하고 이익이 될 만난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었지만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부자나 가난한 자가 동일합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동일합니다. 지금 믿고 있는 우리나 믿지 않고 교회밖에 있는 사람이 똑같이 귀합니다. 
하나님께는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구원사역은 죄인을 찾아 회개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돌아오게 될 때 당연히 기뻐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이 기쁨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교제하고 기뻐하는 것이 불평할 일이 아니라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함께 참여해야 하고 함께 즐거워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착각하는 자칭의인은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고 행하는 우리들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 마리의 잃은 양입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그들은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양들입니다. 
월요일, 화요일에 친구 목사의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잘 지내시다가 저녁 먹고 
가정예배를 시작하며 쓰러지셨습니다. 심장마비였습니다. 119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 

어제 지하철 참사로 죽은 사람들이 죽을 줄 알고 죽었겠습니까?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죽음에는 예고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이 세상에는 죽어서 마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너무 아깝고 귀한 영혼들입니다. 
친구 어머니는 교회 일도 열심히 하시고 총 여선교회장도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참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은 구원의 길을 모른채 잃은 자가 되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길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가리켜 "내가 곧 하나님께로 오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6) 
예수님은 참된 평안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느낄 수 없는 평안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찾아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참된 만족의 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세상은 만족이 없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전5:10)"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 
(전6:7)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만족합니다. 

여건이 아무리 어려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을 때도"(시23:4) 만족케 해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귀히 여기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잃은 것을 찾을 때에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장 기뻐하시는지를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성도의 귀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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