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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적들의 위협에서 승리한 느헤미야(1) (느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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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들의 위협에서 승리한 느헤미야(1) (느 6:1-9)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면서 무너져버린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곧 이스라엘 민족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재건은 이루어졌지만, 예루살렘 성의 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었으며, 이방민족으로부터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여전히 위험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고위관직을 버리고 남유다로 와서 백성들을 설득하여 성벽재건 공사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진 성벽을 쌓으려고 하니 대적들이 그냥 두지를 않았습니다. 이미 느헤미야 3, 4장을 통하여 살펴본 것처럼 산발랏과 도비야의 극심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격려하고, 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성벽재건 공사에 임하게 합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벽재건 공사가 이제 거의 완성이 되어갑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성벽의 무너진 모든 곳이 남김없이 다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의 문짝만 달면 모든 공사가 완성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다시 한 번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문짝을 달기 전에 위기가 왔다는 것은 큰 일이 마무리되기 직전에 위기가 온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젠 모든 것이 다 되었다 싶을 때’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믿음의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위기는 승리 이후, 축복을 받은 후, 부흥이 일어난 후,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중에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명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할 만큼 엄청난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다윗의 최대 위기도 그가 사방의 모든 적들을 평정하고, 그 자신이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능히 적들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그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았던 도덕적인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의 간음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난후에 그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늘 겸손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신앙의 긴장을 늦추지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벌여놓고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위기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성벽 재건 공사 막바지에 느헤미야에게 찾아온 위기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절에 보시면 성벽 재건 공사가 마무리되고 있을 때, 느헤미야의 대적자인 산발랏과 게셈이 느헤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서 오노평지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아마 겉으로는 예루살렘 성벽이 거의 완성되어 가니 이제는 더 이상 싸우지 말자는 평화회담을 제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발랏과 게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화해를 시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2절 말씀에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에 불러 내어 마음의 긴장을 풀게하고, 그 후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벽 재건 공사를 중단하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무엇입니까?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자 느헤미야를 없애는 방법입니다. 느헤미야만 없어지면 백성들은 갈팡질팡하게 될 것이고, 성벽공사도 중단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부흥운동도 순식간에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지도자가 쓰러지면 공동체는 지도자와 함께 허물어져 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느헤미야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오노 평지로 유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느헤미야는 이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가기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라고 했습니다. 대적들의 위협과 시험의 특징은 그것이 지속적이고 치밀하게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유혹에 주의하십시오. 중요한 하나님의 일의 막바지에는 한 두 번의 시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해옵니다. 혹시 성도님들 중에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심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면 그때가 시험의 마지막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때만 견디어 내면 문제는 잘 해결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산발랏의 초청을 거절하는 이유가 3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여기에 보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큰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느헤미야에게는 지금 예루살렘성의 성벽을 다시 재건하는 일이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중요하고 큰 역사이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의 왕이라고 불리는 워너 메이커는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체신부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때 워너메이커는 자기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장관직을 맡을 수 없다고 사양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날에는 모이게 하거나 일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여러 개의 백화점을 운영하면서 장관직도 잘 수행하니까 한번은 어떤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때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장관님은 많은 일을 어떻게 그렇게 능력 있게 잘하고 계십니까?” 그때 워너 메이커는 “다 잘할 수는 없지만 나는 본업 하나만은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기자가 “그럼 장관님의 본업은 무엇입니까? 장관직입니까? 백화점 운영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워너 메이커는 자기의 본업은 “교회학교 부장”이라고 했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여러 가지 크고 중요한 일들을 많이 맡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 보다도 주일날 교회에 가서 어린 학생들을 가리키는 교회학교 부장직을 가장 크고 중요한 일로 생각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까? 여러분의 본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사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알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위대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가 넘어지는 것은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잊은 채 다른데 눈을 돌리고 한눈팔면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므로 교회 부흥의 주역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대적자인 산발랏의 위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나 오노 평지로 내려오라고 했지만 꿈쩍하지 않자 이제는 편지를 보내면서 느헤미야에 대해 엉뚱한 모함을 하기 시작합니다. 6-7절 말씀을 보면 산발랏은 느헤미야에 대해 3가지의 모함을 하고 있습니다. 

①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성벽을 재건한다는 것입니다. 

② 느헤미야가 유대인의 왕이 되려고 성벽을 건축한다는 것과 선지자를 세워 유다에 왕이 있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③ 페르시아의 왕도 이제 곧 이러한 소문을 듣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이러한 소문이 왕에게 들리면 당장 느헤미야는 자신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중지 명령이 내려질 것이고, 느헤미야는 반역죄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성 문짝을 달고 마지막 마무리를 해야 하는 느헤미야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산발랏의 나쁜 의도를 한 번 보십시오. 5절에서 산발랏은 “봉하지 않은 편지”를 느헤미야에게 보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공식 문서는 파피루스나 가죽에 내용을 써서 끈으로 묶은 다음 인장으로 날인하여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왜 편지를 봉하지 않은 채로 보낸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편지를 가져가는 길에 그 내용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악성 루머를 퍼뜨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러한 거짓된 모함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했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느헤미야는 절대로 성벽재건 공사 외에는 어떠한 다른 마음이나 생각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떳떳합니다. 공정하지 못하면, 깨끗하지 못하면 견딜 수 없습니다. 깨끗해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거짓 모함인데, 만일 깨끗하지 못하고 정직성을 잃어버렸다면 백성들에게서 신뢰를 잃어버리고, 대적의 모함에 넘어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자신을 정직하게 지키고 누구에게든지 거짓 없이 성실한 삶의 태도를 보였다면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거짓말은 언젠가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 소문은 만들어 내기는 쉽지만 상대방에게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거짓 소문은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고, 심하게 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들 중에 이미 직간접적으로 그 상처를 경험하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어느 날 임금은 신하 한 사람에게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을 구해 오게 하고, 다른 신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돌아와 임금께 상자를 바쳤습니다. 열어보니 가장 좋은 것도 혀였고, 가장 나쁜 것도 혀였습니다. 

이 탈무드의 교훈은 인간의 말은 가장 유익한 것이 될 수도 있고 가장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함부로 내뱉는 말은 평화로운 곳에 불행과 싸움을 일으킵니다. 쓴말 한마디가 백 마디의 위로로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만들기도 하고, 눈물의 근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시 돋친 말 한마디가 남의 가슴에 비수가 될 수도 있으며, 무책임한 거짓말이 한 사람을 영원히 매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부드러운 말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의 앞길을 환하게 만듭니다. 격려하는 짧은 말 한마디가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남을 비방하는 의도적인 거짓말은 사탄이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사탄의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바로 ‘비난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침체기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자신이 마귀의 도구가 되는 줄도 모르고 입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입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자라고 했고, 작은 불씨가 산을 태우듯이 혀는 사람을 사른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중상모략은 사람의 가슴을 찢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가정을 더럽히고 교회와 나라와 의인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쁜 소문을 듣게 될 때는 반드시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남을 험담하는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① 이것이 사실에 근거한 소문인가? ② 나는 이것을 본인에게 확인하여 보았는가? 

③ 그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들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가? 이 세 가지를 꼭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엡 4:2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남의 말을 자주 하거나 들으십니까? 그러나 소위 ‘카더라’식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남을 비방하고 모함하는 말은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않는 것을 아예 신앙의 철칙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남을 비방하고 모함하는 말은 만들어 내지 말고, 전달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짓된 소문에 넘어가는 어석은 자도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거짓으로 남을 공격하는 사탄의 도구로 우리가 사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요트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전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요트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적당한 바람이 불어야 하듯이, 인생이 성공을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도 적당한 풍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람 타는 곳에 심겨진 나무가 뿌리를 더 깊이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가 위대한 성공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대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산발랏과 도비야의 방해가 없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혼연일체가 되어 협력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공사를 끝내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장애물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방해한다 하더라도 그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어 놓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산발랏과 도비야처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대항하다가 스스로 망하는 불쌍한 실패자가 되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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