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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뜨겁게 하라 (딤후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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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뜨겁게 하라 (딤후 1:3-14)

디모데에게는 바울이 있었고 바울에게는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디모데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 또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더없이 거룩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모친과 조모로부터 경건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인정이 많고 참신해서 고향 루스드라에서 평판이 좋았습니다(딤전 5:23; 딤후 1:4).
그는 바울의 동역자이자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때(A.D. 91-96)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의 안수는 교회에서 특별한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직분을 부여하는 예식입니다. 바울은 그가 안수 받을 때 받은 은사(딤전 4:14)를 상기시키면서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가 중단되거나 소멸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디모데가 자신의 사역에 대한 열의가 식어져 있어서 다시 뜨겁게 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불일듯하게 하라는 말은 다시 불붙게 하라, 다시 뜨겁게 하라, 다시 불같이 일으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받은 은혜의 재기와 재흥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Ⅰ. 디모데의 사역의 열기가 식어져 간 이유 입니다. 

1) 박해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9-11절에 『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후 62-63년경에 로마에서 석방되었습니다. 다시 복음사역을 시작하면서 주후 63년경에 디모데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재 투옥된 후에 순교하기 일 년전 주후 66년경에 디모데후서를 기록했습니다. 

내성적인 디모데는 소심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주후 64년 7월 18일 밤에 로마시에는 큰 불이 나서 6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다시 3일간 계속되어서 로마시가는 화염으로 싸였습니다. 이 화재가 기독교인들의 소행이라고 당시 네로 황제는 단정 지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된 것은 이미 예측 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바울도 포박되어 로마감옥에서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살인적인 시련을 목격했습니다. 그때 그는 가슴에 병이 생겨 잠시 동안 육체적으로 약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데마도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2) 이단의 유혹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고 했습니다. 

당시의 노스틱 철학사상, 에피쿠로스의 극단적 현실주의, 에세네스와 테라푸테파의 극단적 금욕주의 이것이 발달하여 영지주의(Gnostics)자들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한 금욕주의자들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유대주의자들의 전통과 율법주의는 젊은 디모데를 연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7절에 『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디도서 1장 14절에 『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3) 디모데 자신의 건강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지병으로 인한 건강을 염려한 것으로 보아 그가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Ⅱ.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 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장 6절에 『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받은 은사는 그가 장로회에서 안수받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은 은혜, 즉 성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직분을 주시고 그 직분을 감당할 능력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 23절에 『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에 『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 『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엡 3:20),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은(엡 1:19) 받은 직무를 행하지 않으면 영적능력이 쇠퇴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라는 말은 디모데가 영적으로 다시 뜨겁게 되어서 받은 바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각하게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성령을 따라 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능력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1:7). 곧 박해를 이기는 능력과 고난을 인내하는 능력을 덧입으라는 말입니다(1:8).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 『 아름다운 것 』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복음이 왜 아름다운 것입니까? 복음은 성령을 통하여 구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롬 1:16; 고전 4:14).


Ⅲ. 다시 불을 어떻게 일으키는 것입니까? 

불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스스로가 불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49절에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라고 했습니다(왕상 18:24; 출 3:2; 14:24; 레 9:24; 민 16:35; 26:10; 신 1:33; 32:22; 왕하 1:10; 대상 21:25; 대하 7:1; 아 8:6; 레 10:6).
하나님의 불이라고 했습니다(욥 1:16). 사람이 피우지 아니한 불이라고 했습니다(욥 20:26). 여호와의 질투의 불이라고 했습니다(습 1:18).

디모데가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 안수받을 때 받은 능력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디모데에게는 최선이 있을 뿐입니다. 

1)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2-13절에 『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고 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교훈은 성경 어디서나 허락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엽니다(약 5:17-18).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가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곧 죄입니다(삼상 12:23). 기도로 거룩하여 집니다(딤전 4:5).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시 35:13). 

교회를 가리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마 21:13; 막 11:17; 눅 19:46). 목회자의 전무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입니다(행 6:4).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했습니다(약 5:15).
칼빈은 그의 저서에서 신앙은 기도가 없으면 게으르고 죽은 상태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신앙의 시금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바르게 기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주님의 복음의 보물들을 캐낸다고 했습니다. 의심으로 우리의 기도가 어지럽혀진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최상의 웅변과 최고의 은혜는 순수와 단순성에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에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곧 순수한 믿음과 단순한 겸손이라고 칼빈은 말했습니다. 

2)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2절에 『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딤후 3:16).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벧후 1:21).
히브리서 4장 12절에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5장 10-11절에 『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가감할 수 없습니다(신 4:2; 계 22:18-19). 성경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성경은 읽어야 합니다.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고 했습니다(살전 5:27).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 들릴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렘 29:29-30).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라고 했습니다(왕하 23:2; 대하 34:30).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라고 했습니다(느 8:12).

요즘 여기저기서 카톡카톡이라는 소리만 들릴 뿐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대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입니다. 왜 눈이 아니고 입이라고 했습니까? 옛날에는 책을 읽을 때 소리를 내어 읽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말씀(성경)을 전도(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35-36절에 『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라고 했습니다.
다시 뜨겁게 하는 데는 전도만큼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內侍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내시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지도하는 사람이 없어서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빌립은 병거에 올라타서 선지자가 말한 그가 예수라고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9:26-36).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고전 1:21).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18) 하나님의 사람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란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뜨거워졌습니다. 

앞서간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결과를 보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전파하는 그 자체를 사명으로 알고 자신의 존재 의의와 존재 목적으로 알았습니다. 
닥쳐올 결과를 생각한다면 전파할 수 없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전파하는 일을 계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가운데 뜨거워진 것입니다. 그들이 불덩이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고 만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뜨겁게 하는 데는 기도와 성경 읽는 것과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들고 수고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김학은" 명예교수의 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오성이 어린 시절에 대장간에 가서 쇠붙이를 볼기사이에 끼워 넣고 비척거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대장장이가 알고 그 귀한 쇠붙이를 훔쳐가는 오성을 골탕 먹이려고 아직 식지 않은 쇠붙이 조각을 놓아두었습니다. 오성은 이를 악물고 내색도 하지 않고 뜨거운 쇳조각을 볼기사이에 끼우고 집으로 갔습니다.

얼마 후 대장장이 마누라는 재산을 챙겨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이때 오성이 대장장이를 집으로 불러 광을 열어 보이니 쇠붙이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오성이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관상을 보니 큰 일을 저지를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쇳조각은 곧 돈이었습니다.

당장은 불타는 쇳조각이 볼기를 뜨겁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입니다. 그 쇳조각이 식게 되면 꺼진 불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돈이 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돈의 단위에 글월 문文자를 써서 이익을 이문利文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란 먼 훗날을 보고 쓰면 글文이 될 수 있다는 뜻이고 글이란 장래를 내다보지 않으면 함부로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언하건데 우리의 신앙을 다시 뜨겁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성경구독을 통해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통해서 다시 뜨겁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이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매일매일 식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전도로 매일매일 뜨겁게 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성령으로 뜨겁지 않으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마귀가 지옥의 불로 우리를 뜨겁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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