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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성함을 위한 기도(1) (엡 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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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함을 위한 기도(1) (엡 3:14-19)

어떤 괴팍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린 시절에 미아가 되어서 한 동안 거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가 굉장한 부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고는 졸지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굉장한 부자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걸인 행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저녁이 되면 대궐 같은 집에서 잠을 자다가 아침만 되면 허름한 옷차림으로, 면도날이나 비누, 샴푸 같은 잡동사니들을 보따리에 가득 싸서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며 그것들을 팝니다. 그러다가 한 달에 한 번쯤은 멋진 양복으로 갈아입고 자기가 소유한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그 도시에서 최고급으로 알려진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두 번씩 외국여행을 하기도 하고, 세계일주를 하며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그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또다시 보따리 장사를 나갑니다. 그럴 때에는 영락없이 거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부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거지라고 생각하십니까? 돈은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거지와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씩은 부자처럼 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삶은 거지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가 부자인지 거지인지 분간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때로 신앙을 갖고 사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거지처럼 사는 그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할 때에는 하나님의 자녀답습니다. 마치 세상을 다 소유한 왕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고, 하늘나라의 기업을 약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일이 지나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나가 살아야 하는 다음 날에는 좌절하고 절망하고,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악의 세력 앞에 굴복하면서 마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걸인처럼 그렇게 연약하게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당 안에서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당을 떠나가기만 하면 모든 게 걱정거리이고, 삶을 힘겹게 살아갑니다. 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깊은 시름 속에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약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 그 신앙인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가 몇 개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입니다. 그것들을 우리는 흔히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감옥에서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옥중 서신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쓴 모든 편지는 그 편지를 받는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맞춰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고, 빌레몬서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에게 그를 배신하고 도망쳐온 그의 종 오네시모를 다시 받아주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모든 편지가 그것을 쓸 당시 그 교회에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조금 다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특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써 보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발전해 갈 것인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로 지내던 우리를 십자가 안에서 하나로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하나님과 우리가 화평을 누리는 관계로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들이 드러나게 되었고,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기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도 바울은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인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풍성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라고 말씀하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러므로’라는 말은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 십자가를 통해서 만들어진 교회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설명한 말씀을 전제로 하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워진 교회,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에 그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이제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늘과 땅에 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이야기해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땅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지상에서의 모든 삶을 끝내고 하나님의 영광 중에, 지금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하고 기쁩니다. 

그런데 아직도 땅에 남아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찬양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땅에 사는 성도들은 마치 걸인처럼 빈궁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살이에 지쳐서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 땅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예비하신 풍성하고도 부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풍성한 은혜 안에 살면 좋을텐데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땅에 것만 바라보면서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거지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기도는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은혜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드려야할 기도이고,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드려야 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먼저 신앙인의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건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본문 16절에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겉모습을 치장하는 데에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가꾸기보다는 겉모습을 가꾸는데 더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그런 시류에 편승해서 신앙인들까지도 속사람을 가꾸기보다는 겉모습을 가꾸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기도 합니다. 
  
요즘 건강식품뿐만 아니라 건강보조기구들이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두 달 전에 전라남도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2년도 한 해 전라남도에 접수된 노인소비자 피해사례가 모두 2,577건이었는데, 유형별로 분류하면 건강보조식품이나 건강매트 등 건강관련 용품이 소비자 피해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노인들에게 건강을 빌미로 사기 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마만큼 노인들에게도 건강은 최대의 관심사라는 것입니다. 몸이 약해지는 노인들이 건강을 많이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지라도, 젊은이들까지도 건강해지고 예뻐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건강하기 위해서 운동도 해야 하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얼굴을 꾸미는 것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적인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경고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운동을 해서 건강을 지킨다고 해도, 또 건강식품을 많이 먹어서 노화를 방지하려고 해도, 보톡스를 맞고 얼굴에 주름을 없앤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육체는 날마다 낡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매일 낡아져가는 겉사람보다는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가꾸는데 열정을 쏟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일본인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라는 사람이 쓴 『뇌내혁명』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30여년 동안 건강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6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① 너무 피곤하지 않게 살아야 한다. ② 적절하게 잠을 자야 한다. ③ 너무 많이 먹지 말아야 한다. ④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⑤ 계속적으로 머리(뇌)를 사용해야 한다. ⑥ 운동을 해야 한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 6가지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후에 『뇌내혁명』이라는 책을 쓰면서 거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였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건강을 위해서 마음의 평안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55%나 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안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2)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부요하지 못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속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 속사람이 강건케 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습니까? 16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부요하고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케 되는 것은 인간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또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영혼이 부요해지거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강건케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는다는 것은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이런 말입니다. 어떤 굉장히 부자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재산이 한 100억 정도 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부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 100억 중에서 1억을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기부했습니다. 장학금을 받은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받은 그 돈이 굉장히 클 것입니다. 

그러나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기 재산의 100분의 1밖에 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100억 재산 가운데 1억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100억이면 100억, 1000억이면 1000억,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거기에는 어떤 제한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넘치도록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을 따라 한량없이 쏟아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어 매일매일 믿음의 승리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계신다’ 또는 ‘거하신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시적으로 거한다’는 말입니다. 손님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거한다’ ‘온전히 전체를 다스리신다’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계신다’는 말은 ‘영원히 거하신다’ ‘온전히 전체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손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으로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오신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 주인으로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인생의 집에 손님으로 계십니까?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집에 손님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주인이요 우리 인생에 왕이 되시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마치 예수님을 우리 집에 잠깐 들렸다가 가시는 손님처럼 생각합니다. 내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힘들고 지칠 때 잠깐씩 찾아오셔서 나를 도와주시는 다시 내 곁을 떠나가시는 분 정도로 생각하며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만 내 곁에 계시는 분일 뿐, 평소에는 내 곁에 계시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분으로, 그래서 내 삶에서 전혀 주님과 상관 없는 모습으로 살기도 합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시긴 모셨는데, 마치 보물단지를 집안 장롱에 모셔놓은 것처럼 내 마음 한 구석에 모셔놓고, 내 안에 계신 주님과 전혀 상관없이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위치한 이 지역 주변에는 연세 많으신 분들이 많이 살고 계십니다. 그분들 중에는 혼자 사시는 분들도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만 사시는 집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돌보아줄 자식들이 없어서 그렇게 사시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자식들이 서울이나 도시로 올라와서 함께 살자고 해도 가시기 싫어서 그렇게 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어르신들이 자식들을 따라서 서울로 가서 살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맞벌이 하느라 남자고 여자고 다 나가버립니다. 가끔 자식들이 있는 서울에 올라가서 며칠 머물다가 올라 해도, 낮에는 아들이고 며느리고 다 직장에 나가고, 손주들을 학교에 간다고 가버립니다. 그러면 도시 아파트 안에 시골에서 올라온 할아버지 할머니만 남습니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집밖으로 나가기도 두렵습니다. 말동무할 이웃도 없습니다. 

심지어 자식들이 회사에 출근하면서, “어머니, 밖에 나가시면 위험하니까, 밖에 나돌아다니지 마시고 여기에 꼼짝하지 말고 계세요” 그러면서 출근합니다. 그러다가 손주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오자마자 학원에 간다고 저녁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나가버립니다. 저녁 늦게서야 아들 며느리가 들어와서는 잘 계셨느냐고 인사하고는 자기들 방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니 시골에서 올라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자식 집에 가 있긴 하지만, 사실 그곳이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루 종일 방에 갇혀서 외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감옥처럼 사는 도시생활보다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시골이 훨씬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어, 자식들이 올라오라고 해도 가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해 놓고 그렇게 대우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란 책을 쓴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 1911-2001) 목사님은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집을 짓고 사시는데, 서재와 주방, 작업실, 오락실, 침실 등이 아주 잘 갖추어진 집입니다. 

주님께서 그 집을 둘러보십니다. 서재에 들어가보니 성경책이 있어야 할 책장엔 온갖 세상적인 책들로만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할 주방에는 돈, 학위, 직업, 명성 등 부끄러운 음식들만 차려져 있습니다. 거실로 나오신 주님께서 ‘얘야 나와 거실에서 이야기하며 교제하자’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사람은 주님의 그 말씀을 무시해버리고 금새 잊어버립니다. 회사에 가고, 친구들 만나고, 학교에 가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 등 자신의 일에 머누 바쁘기 때문입니다. 작업장은 썰렁하기만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일을 해야 하는데, 주님을 외면하고 자기 능력과 자기 방식으로만 일하려다 보니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집에 있는 오락실에는 주님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면 부끄러운 것들이 많아 주님이 들어오시면 그런 세상적인 쾌락을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곁에 있으면 재미있는 것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온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임을 잊지 말아라.’ 그런데도 주님과 함께 하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전혀 기쁘지 않을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주님을 내 마음의 집에 모시기는 모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석진 방에 모셔놓고는 모든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기는 모셨지만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합니다. 심지어 주님을 구석진 방에 모셔놓고는 다른 방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 이 안방에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이 방에는 주님이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러면서 내 안방을 주님에게 보여드리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시골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셔놓고는 ‘꼼짝하지 말고 여기 앉아 계세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활동을 제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의 집에 주인이 되시면 우리의 행동이 불편하고, 우리의 삶에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구석진 방에 가둬놓아야 내가 술 마시고 싶을 때 마음대로 술도 마시고 취하고 할텐데, 주님이 내 마음의 집에 주인이 되면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지니까 싫은 것입니다. 때로는 죄도 짓고 때로는 세상 유혹에 빠져보고도 싶은데, 주님이 내 마음의 집에 주인으로 떡 버티고 계시면 세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다 포기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영접했다고 하는 신앙인들조차도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주님 나를 지배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합니다. ‘내 미래를 책임져 주십시오.’ 그러면서 불안한 미래는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내 사업에 대해서는 절대로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내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 계세요’ ‘하나님, 저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제 자식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은 모른 체 하고 눈감고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께요.’ 

여러분, 혹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내 마음에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고, 때로 내게 도움이 필요할 때만 슈퍼맨처럼 쨘- 하고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고는, 내가 편안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을 때에는 모른척하고 가만히 계셔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걸 꼭 기억하십시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주님, 제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저를 주님 마음대로 쓰십시오.’ 하며 그분에게 내 인생의 모든 열쇠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편안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야 우리 인생이 행복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 편하고 행복할 것 같지만, 내 생애를 내 마음대로 살면 결국에는 고통과 실망의 열매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셔야만 합니다. 내가 내 마음의 집에 열쇠를 가지지 말고 주님께 다 넘겨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제 인생은 주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삶에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은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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