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정의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십시오 (엡 6:1-4)

첨부 1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십시오 (엡 6:1-4)

: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나님이 주시는 참 행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에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은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여록과 보유’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많은 고슴도치들이 체온을 유지하여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서로 바싹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들의 가시가 서로 찌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추위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가시가 서로를 찔러 그들은 다시 떨어졌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상대방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를 통해 너무 가까이 있으면 피곤하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외로워지는 인간사를 풍자했습니다. 고슴도치들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서로간의 ‘적절한 거리’를 찾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사람은 고슴도치처럼 침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서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슴도치의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한다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오다가다 만나는 남남에게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 가까이 다가서다가 서로 찌르고 물러섭니다. 상대방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함께 살아도 남남으로 삽니다. 부모와 자식이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며, 많은 경우 그냥 포기하고 삽니다. 형제와 자매가 함께 울고 웃던 어린 시절은 추억으로만 남고, 이웃사촌만도 못한 사이로 어정쩡하게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안타까워하며 포기하고,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5월을 가정의 달입니다. 이런 기회를 통하여서라도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여야 합니다. 신약 에베소서 6장 1-4절 말씀을 통하여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돌아보려고 합니다. 앞에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고, 이어서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여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기에 말씀에서 자녀 됨을 중심으로 먼저 생각하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자녀는 부모에게 어떤 사람들입니까? 특히 어린 시절을 다 지내고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 부모는 어떤 분들이십니까?
  
우리는 고슴도치처럼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우리 또한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I. 상처
  
우리는 말씀에서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고, 또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4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4a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여기에서 사도는 아버지만을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 된 모든 사람들을 향한 말입니다. 그런데 부르고 들려주려는 말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강한 부정의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노엽다[parorgivzw/파롤기조]’는 말은 ‘화나게 하다’, ‘격분시키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분노를 일으키다’, ‘성나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화나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공동번역은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라고 하였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좀 생뚱맞게도 부모가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 우리가 노엽게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부모 자신도 어린 시절에 그 부모로부터 상처 받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부모인 우리가 자기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말로 자식 잘 되라고 한 일인데, 그것이 자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눅 17:1)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라는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결과적으로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도 아닌 자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도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상처를 입히는 나 자신도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여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도 누구에겐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부모로부터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그 자신도 상처받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간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형제의 갈등으로 유명한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일생의 대부분을 형제 갈등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의 갈등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출생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5:26 전반절 말씀입니다.

(창 25:26a)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다투었던 에서와 야곱은 태어날 때에도 동생이 형의 발꿈치를 잡았습니다. 에서와 야곱 형제의 갈등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들의 아버지 이삭이 받은 상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백 살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바로 그 사랑스러운 아들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충실하게 순종하기 위하여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셨기에 아버지의 칼은 아들의 가슴에 꼽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아들인 이삭의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는 다시 그 자식의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깨진 거울로 비춰주면 자녀는 깨진 자화상을 갖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춰주었던 그 거울로 자녀를 비춰줍니다. 자신의 상처가 고스란히 자녀에게 대물림 되는 것입니다.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 결심을 하였는데, 자신이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들을 고스라니 자녀에게 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셋째,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인정해야 합니다.(창 33:10)

우리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영적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원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잘못이 없다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벽주의가 우리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듭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함으로 우리는 보다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음악 목사로 활동하는 하덕규 씨가 가사를 쓰고 ‘시인과 촌장’으로 노래한 ‘가시나무’라는 가요가 있습니다. 2000년, 당대 최고 인기 가수인 조성모가 리메이크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가수가 불렀습니다만, 제게는 여전히 복음성가로 들립니다. 음색도 그렇고 가사가 그렇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가시나무 숲 같다는데 아련한 슬픔이 밀려듭니다.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이 가시에 찔려 날아간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저립니다. 저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 속의 상처들이 가시가 되어 사람들을 찌르는 것을 너무나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라고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상처와 쓴 뿌리가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지금처럼 잘 자라 준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아내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는 사람은 바로 부모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제 자녀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역시 부모님에서 알게 모르게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모님에게서 상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랑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역시 부모라는 것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고받거나, 일방적으로 은혜만 주고받는다고 할 수 없는 복잡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훌륭한 부모라고 과대 포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형편없는 부모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기 쉬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를 노엽게 할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이 또한 자녀로써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 노여움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치유의 길은 무엇입니까? 회복의 길은 무엇입니까?

  
II. 치유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미 받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어쩌란 말이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자녀들이 다 자라서 그들도 부모가 되었는데 어쩌라는 말이냐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치유와 회복이 필요합니다. 4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4b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말씀은 단순하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미 어른이 된 우리들에게도 유효합니다. 

우리는 ‘양육하라[ejktrevfw/엑트렙호]’는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장성하기까지 키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성숙하게 자라도록 영양분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양육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키가 다 자란 어른도 마음은 한 없이 자라야 합니다.

1. 우리는 양육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배우기를 게을리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은 배워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양육되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자신은 더 이상 변화될 수 없다고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닮아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엡 4:13).

그래서 여기서 당연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시 27:5)

시인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시편 27:5 말씀입니다.

(시 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한 사람으로 알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어 구원하여 주신 사람입니다.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여야 합니다.(마 18:35)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형제를 용서하여야 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셨습니다. 형제를 일곱 번 쯤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악한 종의 이야기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35 말씀입니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모든 사람을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부모님을 기꺼이 용서하여야 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자신의 마음에서 놓아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하든지 않든지 그 분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마 6:12a)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용서한다고 선언하십시오. 자신에게 용서받은 기쁨뿐만 아니라, 자신이 용서하는 기쁨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시편 27:10 말씀입니다.

(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이 말씀 때문에, 그의 부모를 향한 원망이 다윗에게 남아있었다고 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에게는 부모로 말미암은 상처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사무엘이 사울을 이을 왕을 뽑는 가족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다 그 자리에 다 참석하였을 때, 그는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어야 했습니다(삼상 16:11).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영접하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그의 상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눈이 녹는 것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치유는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님께서는 강력하게 이 사실을 증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치유를 받는 것은 성령님께서 임재 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순간적인 사건일까요?

다시 4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4b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에서 주의 ‘교훈[paideiva/파이데이아]’과 ‘훈계[nouqesiva/누데시아]’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지는 생각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는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계속하여 자라가야 합니다.


2.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십시오.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여야 할 것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자신이 장성한 그리스도인 되기 위하여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할 것임도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런데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한다는 것이 단지 성경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가르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녀를 예배당에 출석시키는 것만으로 그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책임을 다하였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교훈과 훈계는 삶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느 교목의 경험담입니다. 

한 학생이 교목실을 찾아왔는데, 눈이 뻘겋게 충혈 되었고, 얼굴이 굳은 채 살기가 등등하더랍니다. 들어와서 미처 앉기도 전에 대뜸 하는 말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하더랍니다.

학생의 부모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는 속칭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가정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린 후에 아버지가 모든 식구에게 안수를 한답니다. 다음으로 어머니도 식구 모두에게 안수를 한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안수를 안 받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심하게 다투었고, 보름동안이나 말도 안하였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너무 가혹하게 하였답니다. 그래서 아들은 이런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예배를 드리다가 부모가 서로 안수를 하겠다고 안 받겠다고 자녀들 앞에서 다투고, 말을 안 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가졌습니다. 특별한 경우이지만 예배와 안수가 자녀에게 심각한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정 예배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배드리고 성경을 가르친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는 성화의 길을 가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의 본을 따라서 멀리 보고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자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슴도치와는 달리 동료 간에 절묘한 팀워크를 이루는 최상의 케이스를 들라면 아마도 남극 황제펭귄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남극 황제펭귄들은 추위를 달래기 위해 무려 수천 마리나 모여든다고 합니다. 수천 마리가 한 곳에 모이니 체온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 체온으로 혹한의 남극에서 편안히 휴식과 수면을 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추운 바깥쪽의 펭귄과 따뜻한 안쪽의 펭귄들이 서로 교대하며 체온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펭귄보다 고슴도치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상처를 받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가시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과 자녀를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하게 양육하여 가십시다.

이 시간, 십자가를 지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