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마 5:8)

첨부 1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마 5:8)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1. ‘청결’(Καθαρ??,카타로스) 은 두 가지 면에서 깨끗함을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함, 순결함을 뜻하고, 둘째는 육체적, 도덕적인 순결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아담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전인격을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게 지음받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기 전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금단의 열매를 먹는 죄를 범한 후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창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감히 볼 수가 없어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이었습니다. 죄로 더러워진 인간은 하나님과 동산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죄악을 청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고 하십니다. 아담이 “(창3:10)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죄를 범하기 전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했었습니다.

(창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몸과 마음, 전 인격이 모두 성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범죄하자 곧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감각적 충동과 욕망에 끌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파괴한 결과 그들의 정상적인 몸과 영혼, 그리고 인격이 파괴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3:11)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고 추궁하자 이렇게 변명합니다. 

“(창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 앞에 범한 죄를 자기 아내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비인격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하와 역시 

“(창3:13)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으시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며 그 책임을 뱀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그 인격이 파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자기들이 범한 죄의 수치를 가려보고자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자기들이 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로 그 지은 죄의 부끄러움과 수치, 그리고 파괴된 인격을 가려보고자 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과의 관계를 거룩하게 회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지으려면 동물이 희생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를 가리기 위해 동물이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희생이 없이는, 다시 말해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누군가가 희생되어 피 흘림이 있어야만 죄 사함을 받아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릴 때,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속죄의 제물, 어린 양으로 오셨고, 장차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실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 것은 장차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예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자기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희생되셨다고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얻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함께 하는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하나님과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3:25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예수 믿음을 통해 ‘청결’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행 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2. 인간은 스스로 그 마음의 청결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래서 감히 하나님을 볼 수 있을만한 마음의 청결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를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렘2:22)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렘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인간의 죄는 어떠한 세제를 사용하더라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검은 피부가 원한다고 해서 흰 피부로 변화될 수 없고 표범의 얼룩점들이 바뀔 수 없는 것과 같이 마음의 청결은 실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검은 피부를 하얀 피부가 되게 하실 수 있고 표범의 얼룩점들을 바꾸실 수 있는 것처럼 그 어떠한 죄인이라도 ‘마음이 청결한 자’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밧세바를 간통하고 그 남편을 청부살해한 살인죄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51:7-10)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정하게 하시면 정하게 되고 눈보다 희게 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더러운 마음을 정하게 하시면 얼마든지 새롭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그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고, 그렇게 마음이 청결함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깨끗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더러운 죄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음으로 나의 더러운 죄가 용서되고 깨끗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마음의 청결’을 받으신 성도 여러분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 곧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키는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사시기 바랍니다.(고후 11:2) 

예수 믿음으로 ‘마음의 청결’을 받으신 성도 여러분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믿음으로 사는 길이 아무리 힘들고 험하여도, 그리고 그 믿음의 길이 어린 양되시는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끝까지 그 길을 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본래 하나님은 영이시기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자 도마가 예수께 “(요14:8)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며 하나님을 보여주시라고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9-11)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오신 예수 안에 계신 것을 믿고 그의 행하신 일과 말씀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므로 이 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보고, 그 말씀 가운데 사는 자는 바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 누구든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 가운데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탄식 중에 드리는 고백에서환난 중에 드리는 기도에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어긴 일이 없었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항상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고 한 것입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항상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항상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았었노라는 고백입니다. 욥은 하나님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살았습니다. 죽어서 그 가죽이 썩은 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반드시 보리라고 소망했습니다. 

(욥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이렇게 하나님 보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욥이 하나님과의 기도와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통해 욥의 영안이 열리어,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깨달은 이상, 자기의 요구, 하나님을 보리라는 요구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욥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경험하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다윗도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였더니 그 언약, 곧 말씀을 보이셨도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육안으로는 보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눈을 들어 항상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 분의 말씀 가운데 거할 때에 악인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셨도다고 고백합니다.

(시25:14-15)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예수께서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고, 하나님 말씀을 보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부분적이지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함께 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생활인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도 바울을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고린도 전서13:12을 보겠습니다.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삶과 그 분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령을 통해 부분적으로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성결하게 지켜 생활하게 되면 장차 하나님을 보며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성도 여러분, 장차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나타나시게 되면 그 계신대로 볼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 여러분은 항상 그 믿음과 생활을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요일3: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그래서 다윗은 이러한 소망 중에 살았음을 고백했습니다.

(시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다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씀은 ‘마음이 깨끗하고 순결하다, 마음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고 오직 한 마음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호 10:2)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간음한 여인들’이라고 부릅니다. 간음이란 두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보다 하나님을 보다 더 가까이 하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계14:1-5)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기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은 바로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일편단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의 마음을 가지고 일편단심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끝까지 깨끗하게 지키는 삶으로 항상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그러면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번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식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손을 깨끗이 씻고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냉큼 예수께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정결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막7:5)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 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따지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막7:8-9)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장로들의 유전은 <고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르반>(κορβαγ)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부모가 치매에 걸리거나 병들어 공경하기 힘들어지면, 그리고 그 뒤치닥거리에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으면 성전에 가서 돈 몇 푼 바치고 <고르반>하고 외치면 모든 책임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자기 부모에게 “나는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제 저는 부모님을 공경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자기 부모를 내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길바닥에서 병들어 죽거나 해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들이 말하는 바 ‘전통’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전통을 지킨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여 버리고 부모를 내다 버리는 너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과연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막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그리고 예수께서 “(막7:14) 무리를 다시 불러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7:15-16)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7:20-23)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전통이나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 등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20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다고 자랑하는 너희들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피를 뽑아 팔아서라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지 늙은 부모 모시는 것이 짐된다고 돈 몇 푼 성전에 바치고 자기 할 도리 다 했다며 자기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것은 악독하고 더럽기가 그지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권위자로, 그리고 스스로 가장 깨끗한 자들로 자처하며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지만,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들의 위선 일곱 가지를(마23장) 낱낱이 들어 질타하시는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바리새인들의 겉모습은 경건하고 거룩한 것 같지만 그들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속마음을 먼저 깨끗이 해야 행실을 깨끗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사람의 마음과 생활을 더럽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막7:15-23)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간음’은 분명히 더러운 죄이지만, 예수께서는 “(마 5:28)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므로 간음은 벌써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살인’은 분명한 죄이지만, 형제에 대해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은 이미 형제를 살인하는 죄가 시작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5:21-24)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기를 “(삼상18:7)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고 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사울 왕이 심히 불쾌하게 여기며 충신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사울의 마음에 시기자 생기자 악령이 그에게 들어가 사울이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삼상18:10-11)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다윗을 시기하던 사울 왕은 결국 악령에 홀려 전쟁에 나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마음의 시기와 욕망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들인 것이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했습니다. 소유욕이나 감각욕, 명예욕이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 등 인간의 각종 욕망과 욕심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미움과 시기를 마음에 품고 겉으로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음욕을 마음에 품고 겉으로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교만을 마음에 품고 겉으로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탐욕과 욕망을 마음에 품고 겉으로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속임과 비방을 마음에 품고 겉으로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고 겉으로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요일 3:17)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23:25-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예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어 남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청결한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왕하 23:25)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