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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로의 유혹을 물리치라 (출 8: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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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의 유혹을 물리치라 (출 8:25-32)

사막에 한 노인이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노인이 살고 있는 그곳에는 야자수들이 우거져 있었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퍼주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그네들은 물을 얻어먹고 노인에게 감사의 뜻으로 동전 몇 푼을 건네주게 됩니다. 노인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금고에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노인은 이제 돈을 모으는 데에 몰입해서 나그네에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됐습니다. 노인은 그렇게 돈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됩니다. “나는 돈을 더 많이 벌고 싶고, 샘물이 더 많이 솟아난다면 나는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으로 야자수를 바라보니까, 샘물 곁에 있는 야자수들이 샘물을 다 흡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야자수들을 다 베어버려야 되겠다고 생각으로 야자수를 전부 베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샘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결국 샘물이 말라버렸습니다. 야자수가 제공해 주던 시원한 그늘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노인의 오두막집을 찾아주지 않았고, 노인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쓸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낳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돈에 대한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고 현재에 자족하면서 살았다면 나그네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노인은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결국은 그렇게 죽고 말았습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때에 특정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유혹은 있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노인의 경우와 같이 물질에 있어서 물질적인 유혹도 있고, 명예에 대한 유혹도 있고, 성적인 유혹도 있고, 온갖 세상적인 유혹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여러 가지 유혹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유혹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속에서 떠나서 조용한 곳에서 도를 닦으면서 살아간다면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아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과제는 유혹이 많은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그 유혹들을 물리치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유혹해 오는 바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한, 그 유혹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물리쳐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과정 가운데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억압 받는 장면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가시는 구원의 대 서사시를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이 출애굽에는 억압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행동들로 가득 차 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세라고 하는 한 사람을 택하셔서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모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셨습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5장에서 바로와의 첫 대면을 가집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그렇지만, 바로가 그 말을 들을 리 없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는 오히려 더 힘든 일들을 시키면서 출애굽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갈 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절망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소망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출애굽에 대한 정당한 1차 요청을 거부한 바로를 향해서 10가지 재앙과 함께 하나님과의 정면대결이 7장에서부터 펼쳐지게 됩니다. 첫 번째 재앙은 나일강물이 피가 되는 재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애굽의 마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니까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서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완악한 바로를 향해서 하나님은 두 번째 재앙, 개구리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것 역시 애굽의 마술사들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완강한 바로에게 하나님은 세 번째 ‘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 세 번째 재앙부터는 요술사들이 흉내 내려고 해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재앙 때에 요술사들이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분명히 고백했지만, 바로의 마음은 여전히 완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네 번째 재앙, 파리 재앙을 내리시게 됩니다. 이 파리는 우리가 집에서 보는 집파리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집에 있는 파리는 그저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일 뿐이지만, 이 파리는 과수에 피해를 주고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해충이었습니다. 이런 해충이, 앞에 있는 21절 말씀을 보면, 가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집에 파리가 몇 마리만 있어도 성가실텐데, 집안에 이런 해충이 가득했으니 어땠겠습니까? 온 집에 가득한 파리는 분명히 재앙이었습니다. 

은총과 재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적당한 것과 지나친 것의 차이입니다. 햇빛이 적당히 비취는 것은 은총입니다. 하지만, 햇빛만 비쳐서 가뭄이 되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비가 적당히 내리는 것은 은총이지만, 넘치게 와서 홍수가 나는 것은 재앙입니다. 

파리로 가득한 재앙으로 인해서 애굽 전역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열 재앙 중에 네 번째 파리 재앙을 경험하면서 있었던 내용입니다. 이 네 번째 재앙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그 완악한 바로에게도 드디어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토록 완강했었지만 그 뜻을 굽혀서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말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바로의 이 말을 우리는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에게 한 말은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라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바로의 이 말을 보면, 애굽에서 나가지 말라는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나가도 좋다. 나가도 좋기는 한데 이런 조건으로 하라’고 하는 타협안을 내놓는데 그것은 이 땅에서! 애굽에서 희생을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계속해서 우리가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출애굽 시켜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에 대해서 바로는 계속해서 묵살하다가 겨우 내놓는다는 것이 애굽에서 희생을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활한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애굽에서 희생을 드리라고 합니까? 바로는 일단 우선은 재앙을 피해야 되겠고, 그러면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되겠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의 노예들을 내보내 버리면 큰 문제가 생기니까 애굽에서! 바로의 통치권이 미치는 애굽 영내에서 희생을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바로가 양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의 욕구, 자기들의 노예도 잃지 않고 재앙도 면해 보려는 바로의 욕구 충족을 위한 하나의 타협안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겠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서 이 요구를 들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묘하게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바로의 음성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는 드리되 애굽에서 드리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곧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좋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좋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떠나지는 말아라.”라는 유혹입니다.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되, 너의 가치관, 네 생각과 모든 것은 여전히 세상에 뿌리를 두고 세상에서 떠나지 말라고 하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와 같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은 갖고 살아가지만,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도 괜찮다고 하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참 달콤한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빠져서 살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 똑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다가 주일 하루만 예배당에서 예배 드리고 가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말에 한 번씩 모여서 세상 모임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하나의 동호회 모임처럼, 취미활동, 문화생활처럼 한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주일에 한 번 모이는 하나의 기독교 동호회 모임일 뿐이고, 평소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세상 일에 골몰하면서 살아간다면! 누가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은 교회에 있을 때 뿐이고, 세상 속에서는 이사 날짜를 정하거나 결혼날짜를 잡는다든지 하는 일에도 세상 사람들과 같은 기준으로 정하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에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칩니다. 사위를 선택하고, 며느리를 선택할 때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잣대를 들이댑니다. 

성공에 대한 가치관은 어떻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돈 많이 버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고,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좋은 차 타고 다니면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런 가치관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경적 가치관을 갖고 있고, 그 가치관이 믿지 않는 사람과는 사뭇 달라야 할텐데, 성공에 대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바로의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믿음 생활을 하되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라’고 하는 바로의 이 유혹을 단호히 뿌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의 이 첫 번째 유혹에 대해서 모세는 이것을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26절 말씀을 보면,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라는 모세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그 대답 가운데 교활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짐승을 죽여서 희생을 드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애굽인들은 동물들을 숭배하기 때문에 동물의 제사를 혐오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적인 이유로, 짐승을 잡아서 바치는 이스라엘의 제사가 서로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노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야로 나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흘 길 되는 광야로 나가겠노라고 대답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로의 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광야로 나가겠노라’고 하는 선포를 통해서 이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모세는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 명령을 따라 하려고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모세의 생각대로, 자기 생각에 사흘 정도 걸어갈 수 있는 곳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이렇게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것이 우리의 삶, 우리 신앙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가 잘 되지 않고, 무리인 것 같고, 불합리하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손해가 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명철이 한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괜히 해 본 말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섭리와 예비하심과 하나님의 경륜이 그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가 필요합니다. “왜 사흘 길을 가야 합니까?”라고 하기보다 “사흘 길을 갈 때에 어떻게 갈 것인가?”하는 질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광야로 나가야 하는데, 광야는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구별되어짐을 의미합니다. 애굽과는 구별되어진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로 나가겠노라고 선언하는 것은 세상과는 구별되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선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구별하셨습니까? 파리 재앙이 온 애굽 땅에 임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던 고센땅은 구별하셨습니다. 애굽과 고센을 구별하셨고 우상숭배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하셨습니다. 그처럼, 광야로 나가는 것은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세상에 몸담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이 택하신 광야로 나가겠노라고 선언하고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광야로 나가겠다고 하는 모세의 선포에 대해서 바로가 다시 대답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이것이 바로의 두 번째 유혹입니다. 

바로는 내가 너희를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또한 타협안이었습니다. 조건이 달려 있는데, 그것은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주지 않는 실질적인 이유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는 막대한 노동력을 갖고 있는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사시에는 재빨리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노예로 묶어 두려는 심산에서 애굽 땅 근처의 광야로 들어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바로의 이러한 말은 아직도 재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로 잡아 두려고 하는 완악한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바로는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고 말합니다. 바로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중보기도를 간청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신앙적인 모습으로 한 말이 아니라, 직면해 있는 재앙으로부터 피해보려고 하는 얄팍한 처세술에 불과한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파리 떼가 없어지고 나니까 다시 완악해진 마음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가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말했던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삼일길은 먼 거리니까 그만큼 가지 말고 적당한 거리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적당하다는 것은 적절하다는 의미입니다. 모자르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딱 좋은 상태가 적당한 것이고, 적당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좋은 말인데, 그런데, 적당주의라고 하면 이것은 의미가 또 달라집니다. 적당주의는 “어물어물 요령만 피워 적당히 해치우려는 태도”를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바로의 이 말은 이러한 적당주의적인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좋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좋고 예배드리는 것도 좋고 다 좋은 데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참석해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지는 말고, 주일 예배는 오전 예배만 드리고, 오후 예배 시간에는 적당히 친구들 만나고 결혼식 다니면 되고, 구역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구역모임에 참석하지는 말고, 예배는 드려도 온 마음과 정성으로 예배 드리지 말고 적당히 앉아 있다가 옆사람과 친교 나누면서 시간 떼우다가 오고, 말씀은 교회에 나와서 성경봉독 때 읽는 정도면 충분하고, 기도는 적당히 집에서 식사기도 중심으로 하면 되고...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바로의 속삭임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우리는 믿음생활을 해나감에 있어서 결코 적당주의가 아니라, 온전하게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온전히 해야 합니다.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던 미국 목사님 한 분이 어느 날 갠지스 강가로 나갔다고 합니다. 강가에 나가보니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강둑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잘 생겼고, 다른 한 아이는 몸이 불구인데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아였습니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역을 하던 이 선교사님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저 여자가 두 아이 중 한 아이를 갠지스강에 빠뜨려 신에게 제사하려고 하는구나’ 생각하고 부리나케 달려가서 그 부인을 붙들고 “제발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마시오. 그건 쓸데없는 일입니다. 왜 아이를 희생시키려고 합니까?”라고 하면서 간곡히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완강했습니다. 그 여인을 아무리 설득하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여인이 강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 중에 하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잘 생기고 정상적인 아이는 없어지고 장애인 아이만 데리고 나왔습니다. 선교사님은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신에게 바치려면 불구에다 눈이 멀어 인생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 아이를 바칠 것이지, 왜 건강한 아이를 바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여인이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인도에서 섬기는 신은 우리가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아이를 드려야지, 어떻게 장애의 몸을 가진 아이를 드리겠습니까? 미국인들의 신은 최선의 제물이 아니라도 받으십니까? 그 신은 우롱당하고도 모르는 바보 신이십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헛된 신을 섬기는 사람들보다도 더 못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일도 적당히 해서 되는 일이 없는데,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적당히 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바른 모습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또한, 바로가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적당히 가라고 한 것은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전제에 두고 있는 말입니다. 너무 멀리 가면 되돌아오기 힘드니까 적당히 가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10장으로 가면, 바로가 여덟 째 메뚜기 재앙을 받기까지 다시 완고하게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다가 다시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말합니다. 이 때에는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재산은 담보로 맡겨 놓고 가라고 합니다. 이것 또한, 다시 되돌아 올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장정들만 광야로 나가게 되더라도, 중요한 것들이 담보로 잡혀 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고 자연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또 아홉 째 흑암 재앙을 경험하면서는 또 다시 타협안을 내놓는데, 이번에도 또 바로가 양보하는 척 하면서 어린 아이까지도 데리고 가라, 하지만, 양과 소는 두고 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빈손으로 떠나라는 말과 다름 없었습니다. 양과 소는 그들의 재산이었고, 이것이 없이는 오랜 광야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타지역으로 가도 정착하기도 어렵습니다. 때문에,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빈 손으로 내보내면 반드시 되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와 같이 유혹했습니다. 

바로는 이처럼,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다시 죄악된 애굽으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해놓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믿음생활이 무엇이고, 이 유혹을 어떻게 이겨야 합니까? 믿음생활은 과거의 죄악된 삶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악된 과거로, 다시 세상 속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십자가라는 푯대를 향해서 나아가는 행진’이 믿음의 삶입니다. 과거의 죄악된 땅에서 배를 타고 다른 지역, 믿음의 땅으로 넘어왔으면 내가 타고 온 배를 불질러 버리는 것! 이것이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되돌아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광야로 나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목마르고 배고플 때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애굽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절연히 잘라버려야 할 것을 잘라버리지 못하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면서 광야생활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광야로 나왔으면 되돌아갈 생각은 던져 버려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바로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만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로는 지금도 우리를 유혹해 옵니다. 믿음생활은 하되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만 달고 살아가라고 유혹합니다. 믿음생활을 하되 적당히 하다가 언제든지 되돌아 오라고 유혹합니다. 바로의 이 유혹에 넘어가면 우리는 힘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맙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넘어가서 우리가 세상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짠맛을 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로의 이러한 유혹들을 우리는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광야로 나감을 통해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적당한 믿음생활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의 유혹을 믿음으로 물리쳐서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 믿음으로! 세상을 믿음으로 정복해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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