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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이 그리스도냐? (마 26:5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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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리스도냐? (마 26:57-68)

서양 사람들은 솔직한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동양 사람들은 점잖은게 특징 입니다. 서구인들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고 동양인들은 점잖은 것을 좋아합니다. 동양에서는 너무 솔직하면 가벼운 사람으로 여기고 서양에서는 너무 점잖은 사람은 음큼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어떨까? 성경은 우리가 되도록 솔직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어요. 왜 그러냐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놓고 굉장히 솔직하셨어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숨기지 않고 전부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또 필요하고 유익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다 들어냈어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들어낸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속을 보이면 사람들이 그것을 다 순수하게 받아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가지고 나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솔직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잘 넘겼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지혜로우신 분이, 그 말을 잘하시는 분이, 어떤 위기에서도 적절한 말씀을 통해서 결코 바리새인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던 예수님께서 너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아예 죽기를 각오하고 자기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십자가에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밝혔어요. 자기를 드러냈어요. 자기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들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내가 그로라’ 그랬습니다. 솔직하면 좀 위험스럽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솔직하면 첫번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두번째는 나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려서 사람들을 혼동시키지 않고 세번째는 친구를 얻을 수 있어요.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 하든지 남에게 괜히 시비 걸어서 미움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두번째는 아무도 자기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적이 없는 사람이 있어요. 첫번째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남한테 시비만 걸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두번째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솔직하지 않는 사람이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죄와 거짓이 만연한 세상이예요. 

그런데 이 죄많은 세상에서 나를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나에 대한 중대한 결론입니다. 죄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우리가 영적인 전쟁을 하면서 살고 있는 예수님의 군인들인데 적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솔직하지 않다는 겁니다. 

세번째 사람은 적과 친구가 골고루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진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다 털어놓으면 나를 미워하고 비방하고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 털어 놓았기 때문에 친구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가지도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몇사람을 원했습니다. 어차피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때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에게 신임투표를 했다면 예수님의 지지도가 80-90% 나왔을까요? 아마 그 당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그 당시에 신임투표를 했다면 아마 50%도 못 받았을 거예요.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59절 보세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거짓증거를 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친구가 나와요.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는데 당일에는 친구가 되니라’는 말씀이 있어요. 헤롯하고 빌라도가 서로 원수였는데 예수를 죽이는 당일에는 서로 친구가 된 거예요. 왜? 서로의 이익에 부합되니까요. 이런 친구는 세상에 많죠. 돈있으면 다 나한테 오고 돈 없으면 떨어져 나가고. 우리가 헐리우드 배우 보면 ‘야, 멋있다’ 

그러지만 우리가 그 헐리우드 배우를 쫓아다니면서 평생 제자가 됩니까? 금방 관심을 잃어버리면 헌신짝처럼 버리잖아요. 그게 헐리우드 배우들의 비극 아닙니까. 인기가 올라갔을 때는 짱이지만 또 한번 인기가 떨어지면 그냥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말한 친구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시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친구. 이런 친구를 얻기 위해서는 다 털어놓아야 되요. 털어놓으면 이제 다 알아요. 친구가 누군지 아닌지. 뒤에서 가십하고 비방하고 그래서 상처나고 코피나고 터지고 그러죠. 그러나 그 가운데서 친구가 생기는 거예요. 

교회에서 친구가 많아야 되요. 그런데 교회에서 친구가 없고 세상친구가 많으면 이건 뭐가 거꾸로 된거예요. 세상 친구는 술 한잔 마시면서 다 털어놓고 얘기하지만 거기서 다 끝나거든요. 그런데 교회에서 얘기 했다가는 그 다음 주일날 다 퍼져서 그래서 얘기를 안 하려고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얘길 안하려고 해요. 교회는 와서 예배나 드리고 말씀이나 듣고 그 다음 속을 털어 놓는 친구는 세상 친구이면 그건 뭔가 거꾸로 된거예요. 그래서 솔직하면 친구를 얻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오늘 본문말씀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사랑하기에 인간과 하나가 되어 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어두운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환난과 핍박을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내 이 죄인된 인간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꽃피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굳은 결의가 보여집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열한 제자 모두 다 달아난 이때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장 악랄한 인간의 모습을 몸소 체험하십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주님을 희롱하고 때립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리우고 "너를 친 자가 누구냐?"하며 놀려댑니다. 이 밖에도 많은 욕을 퍼붓습니다. 밤새도록 이렇게 시달리십니다. 밤새도록 매맞고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약한 자를 놀리고 침뱉는 악랄한, 비열한 인간들 앞에서 꼬박 밤을 새우신 것입니다. 

드디어 날이 밝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드디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예수님을 끌어다 그 앞에 세웁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가 종교재판을 받습니다. 재판이 시작됩니다. 

여러 말이 오간 후 재판장이 뭇습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에 주님은 천청벽력과 같은 선언을 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온 재판장은 한 소리가 되어 언도를 내립니다.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의 입에서 들었노라." 더 이상 증인이 필요없는 얘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한 연고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넘겨집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는 모든 인간들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었습니다. 이 땅에 내려 와보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이 죄가운데 매여있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고, 반면 인간들은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의 영광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두가지 사이에 끼어 있으십니다. 한쪽으로는 인간들은 형편없는 죄인이 되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이 형편없는 죄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에 예수님은 지혜를 짜냅니다. 지혜의 주님은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십니다. 이 형편없는 죄인들을 당신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기 위해서 이들과 하나가 되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은 이들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기로 합니다. 이 죄인들의 가장 어두운데까지 내려가기로 하십니다. 그리고 어두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기로 합니다. 사랑하심을 통해 죄인들과 하나가 되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 앞에 서있습니다. 로마 군인들 앞에 서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주님을 희롱하고 때립니다. 당신을 밤새도록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맞고 서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들과 하나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희롱당하시는 것은 그런대로 참을만합니다. 밤새도록 희롱을 당하신 후 산헤드린 재판장에 끌려갑니다. 이제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모순된 죄악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합니다. 재판장의 조롱섞인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님은 생애 최대의 질문 앞에 서있습니다. 순간 예수님의 머리에는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죄인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들이 언젠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진 모습도 보여집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십자가에서 처절히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잠시후 예수님은 담대히 말합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산헤드린 공회원들로부터 신성모독죄의 죄명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 길만이 온 인류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길을 열어 놓은 유일한 길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보여진 우리의 모습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극도로 추악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채찍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 두가지 모습을 모두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도저히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이 두모습을 만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왼쪽 손에는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붙드셨습니다. 오늘쪽 손에는 우리의 아름다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붙드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하나되기 원하셔서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죄악된 그 모습을 붙들고 계십니다. 아울러 우리를 참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오른팔과 왼팔이 찢어지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겪으시는 주님을 깊게 명상하시길 바랍니다. 

한 손에 당신의 사랑하시는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붙들고 계신 주님, 다른 한손에는 우리의 하나님 아들된 모습을 붙들고 계신 주님, 이 두 모습이 만나길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 이 주님의 모습을 명상하십시다. 

우리가 죄를 지은 만큼 주님의 왼팔과 오른팔의 길이는 길어지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만큼 그 길이는 계속 길어졌습니다. 길어지다 길어지다 못해 찢기셨습니다. 드디어 십자가에서 많은 피를 흘리시며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악된 어두운 모습과 하나님의 아들된 모습을 모두 사랑하셨기에 댓가를 치루신 것입니다. 두 팔을 벌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주님을 깊게 명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을 깊게 명상한다면 우리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우리의 문제 많은 이웃, 단점 많은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의 단점을 사랑함으로 그들과 하나되는 체험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이웃의 단점을 비난하기 위하여, 멸시하기 위하여, 우리에게서 몰아내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습니까? 그럴수록 우리는 이웃과 멀어지지 아니했던가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의 단점은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의 단점은 우리와 하나되기 위함입니다. 이웃의 단점은 우리와 하나 된 후 그의 장점이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니 우리와 하나 되었을 때 이웃의 단점과 장점은 신비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빛날 것입니다. 

물론 이웃의 단점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이웃의 단점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고통은 더욱 커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죄인됨을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으신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단점을 사랑하사 밤새도록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이집트에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아주 희귀한 성경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꽤 값이 나가는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들어와서 이 성경책을 훔쳐갔습니다. 

도둑이 이 성경책을 알렉산드리아 상인에게 가지고 가서 얼마쯤 주겠냐고 물었습니다. 상인은 아무리 보아도 자기로서는 알 수 없기에 며칠 시간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상인은 성경책을 아나스타시우스 수도사에게 가져왔습니다. 아나스타시우스 수도사는 마치 처음 보는 듯 성경책을 뒤적거립니다. 

상인이 "한 16전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아주 좋은 책인데 그 정도면 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상인은 그 성경책을 도둑에게 보여주면서 전문가에게 가서 물어보니 16전이면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하면서 16전을 내줍니다. 그리고 덧붙이길 그 전문가는 유명한 아나스타시우스였다고 말합니다. 도둑은 제 발이저려 말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도둑은 성경을 팔려는 마음을 바꾸어 그 성경책을 들고 아나스타시우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도둑의 도둑된 그 모습을 사랑했습니다. 아울러 도둑의 하나님의 아들된 모습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희생하고 그 성경책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도둑은 자신의 도둑된 모습을 사랑하는 아나타시우스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참 아들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도둑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아나스타시우스 이전 예수님께서 도둑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하나님의 아들된 모습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한손에 죄인된 우리의 모습을 붙드시고 또 다른 한손에 하나님의 아들된 우리의 모습을 붙드시고 깊어가는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시는 주님을 깊게 명상하십시다. 왼손과 오른손의 거리가 점점 멀어짐과 더불어 고통스럽게 찢기시는 주님을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십시다. 우리의 왼손과 오른손이 길어지는 것을 체험하십시다. 길어지다 못해 찢겨지는 것을 체험하십시다. 죄있는 이웃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시다. 그때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되었음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려 주님은 조롱받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 질문이 이젠 여러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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