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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숨과 바람 (행 16:6-15)

첨부 1


숨과 바람 (행 16:6-15)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1. 우리는 지금 '사도신경'을 따라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성부 하나님에 대해 또한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성령에 대한 고백을 볼 차례입니다. '사도신경'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어렵습니다. '성령'이라고 말할 때,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그분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가 분명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금 더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누구에게나 신에 대한 생각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것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성령이 문제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처럼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적도 없고, 하나님처럼 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전이해(pre-understanding)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처음 믿기 시작할 때, 가장 헷갈리는 것이 성령입니다. 오래 믿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막상 "성령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똑 부러지게 말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성령은 '똑 부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거룩한 혼령'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the Holy Ghost라고 했습니다. Ghost는 '유령' 혹은 '혼령'을 뜻합니다. Ghost나 '혼령'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연상됩니까? 흔히들 밤중에 공동묘지에서 떠다니는 이상한 물체를 흔히 생각합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영어권 교회에서 the Holy Spirit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영어의 spirit은 '정신' 혹은 '혼'이라는 뜻입니다. "fighting spirit이 좋다"고 말하면, "싸우려는 정신이 좋다"는 뜻입니다. '정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운동 경기를 직접 해 보거나 유심히 관찰해 본 사람들은 다 인정할 것입니다. 지고 있던 선수들이 무엇을 계기로 갑자기 돌변합니다. 뭔가가 그들을 사로잡은 것처럼 달라집니다.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무엇인가 그들에게 생긴 것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무엇인가'가 생겨났다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Spirit이라는 말의 뿌리가 되는 라틴어 spiritus는 '숨'이라는 뜻입니다. '숨'이라는 말이 나중에 '정신'이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정신'은 마치 '숨'처럼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합니다. 숨이 들어가면 쪼그라들었던 풍선이 부풀어집니다. 지쳐 있는 사람에게 숨이 들어가면 다시 살아납니다. 그것처럼, 어떤 정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 정신이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라틴어 spiritus의 뿌리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와 헬라어 '프뉴마'(pneuma)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숨'이라는 뜻과 '바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성령을 '하나님의 숨' 혹은 '하나님의 바람'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은 '숨'처럼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고, '바람'처럼 우리의 삶의 길을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숨처럼 혹은 바람처럼 역사하고 활동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이렇게 말하면, 성령을 어떤 에너지와 같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을 인격체라고 말합니다. 기압이 변하는 대로 움직여 다니는 바람과 달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성령은 마치 우리처럼 느끼고 감동하고 기뻐하고 슬퍼하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숨'과 '바람'이라는 비유(metaphor)가 효력을 멈춥니다. 숨이나 바람이 느끼고 생각하고 결정한다고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창세기의 첫 대목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1:1-2)

'하나님의 영'은 직역하면 '하나님의 바람' 혹은 '하나님의 숨'이라고 해야 합니다.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번역된 동사는 어미 독수리가 새끼들이 모여 있는 둥지 위를 선회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공중에서 그냥 빙빙 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할 일을 준비하면서 때를 지켜 보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물 위를 선회하시면서 창조 사역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온 우주와 세상 만물의 창조에 참여하셨습니다. 

인간이 창조될 때에도 성령께서 참여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여기서 '생명의 기운'이라고 번역된 것을 직역하면 '생명의 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곧 하나님을 의미하므로, 하나님의 숨 즉 성령을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흙덩이가 생명체로 변한 것은 하나님의 숨 즉 성령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대해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줍니다. 인간이 인간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숨 즉 성령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육체를 입고 있었으면서도 영이신 하나님과 막힘 없이 소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숨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숨은 점점 약해졌고, 그로 인해 인간은 점점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극의 원인이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토록 성령을 강조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볼 눈이 있는 사람을 보아라" 혹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을 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고 있음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성령의 임재로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이니, 그 나라를 보고 그 나라를 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숨을 가져야만 진정으로 산 것이고, 성령의 바람을 의지하고 가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또한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을 호흡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코에 하나님의 숨이 들어갈 때 생명체가 된 것처럼,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참되게 삽니다. 혼돈과 어둠과 무질서의 세상에 성령의 바람이 개입할 때 정돈이 되고 질서가 잡히고 빛이 임했던 것처럼, 성령의 바람에 의지하고 살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질서가 잡히고 빛이 임하며 규모가 잡힙니다. 성령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3.

오늘 읽은 말씀은 기독교 역사의 흐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입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 복음이 이 사건을 계기로 아시아의 경계선을 넘어 유럽 땅으로 건너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전도 여행에 나선 바울 사도는 유럽으로 건너갈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첫 번째 전도 여행에서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의 서남쪽 도시들을 찾아갔던 바울은 이번에는 북쪽 도시들을 찾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자꾸만 막힙니다. 거듭 문이 막히는 것을 경험하면서 바울은 '혹시나 성령께서 막으시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 바울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자꾸만 좌절되는 데에는 필시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역경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계획대로 밀어붙여야 할지, 아니면 다른 방향을 찾아야 할지를 두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환상을 봅니다. 그 환상에서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는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합니다.

그 환상을 보고 나서 처음에 그는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럽으로 자신을 인도하시는 것을 알 것 같았으나,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고 계획에도 없던 일입니다. 그는 유럽 땅을 밟아 본 일도 없었습니다. 그 지역에 대한 공부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환상 하나만을 믿고 선뜻 방향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 동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부터 진로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성령의 '바람'을 봅니다. 바울이 원래 계획했던 방향으로는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행로를 정할 때마다 역풍이 불어 쳤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역풍이었습니다. 바울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환상을 통해 성령의 바람이 불려는 방향을 알아차립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자 바울의 진로는 활짝 열렸습니다. 

유럽의 관문이라고 불렸던 빌립보에 도착하여 바울은 며칠 동안 기도로 준비합니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전도의 문을 여는 것인데, 얼마나 긴장이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기도로 준비한 다음, 어느 안식일에 성문 밖 강가로 나갑니다. 그 때, 그곳에서 기도하기 위해 모인 유대인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 루디아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 옷감을 다루는 여성 사업가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루디아에게 일어난 일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14절)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숨'을 봅니다.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에 들어가셨습니다. 성령의 숨이 들어가자 루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루디아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마디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바울의 설교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울이 설교를 마치자 루디아는 그 자리에서 집안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주님의 신도로 여기시면, 우리 집에 오셔서 묵으십시오. (15절)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 이후 루디아는 바울의 유럽 선교를 위한 든든한 후원자가 됩니다. 수완 좋은 여성 사업가로만 기억될 뻔했던 그 여인은 유럽 선교의 문을 연 사람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숨은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또한 삶을 변화시킵니다.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루디아처럼 성령의 숨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령의 숨이 들어와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나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던 일이 가능해지는 변화를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성령의 숨이 우리 내면에 들어오면 자신의 본 모습을 깨닫고 진실하게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요 16:8)

성령의 숨이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죄성을 제대로 자각할 수 없습니다. 거울에 비추어 보지 않고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숨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마치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듯 우리 존재의 내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목도하게 되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성에 눈 뜨고 그 죄성으로 인해 절망해 보지 않았다면, 아직 성령의 숨을 받아 본 일이 없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숨이 우리 내면에 들어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게 되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믿음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이상해서 믿으려고 힘쓰면 힘 쓸수록 더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을 조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숨이 우리 안에 들어 올 때 마음이 변화됩니다. 

바로 그것이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경 런던의 작은 골목에 있던 어느 교회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는 그 날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 날 저녁 나는 원치 않았는데도 얼더스케이트 거리에 있는 어느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아홉 시 15분 전 쯤, 루터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변화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내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나의 죄까지도 씻어주셨고 죄의 법과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 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이 변화가 있기 전, 웨슬리는 자신이 설교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심한 번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던 웨슬리는 '혹시 내가 너무 차원 높은 사람들만을 다루다 보니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벌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목사요 선교사요 신학교 교수임에도 자신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에 대해 믿음이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고, 그로 인해 감리교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의 숨이 들어갈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숨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의 성품이 변하고 기질이 변하며 감정과 정서가 달라지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뀝니다.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나무 안에 사과의 본질이 들어있으면 사과 열매를 맺고, 복숭아의 본질이 들어 있으면 복숭아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숨이 없으면 우리의 욕망과 상처가 자라나 쓰디 쓴 열매를 맺습니다. 반면, 성령의 숨이 우리 안에 있으면 성령의 열매가 열립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갈 5:16)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갈 5:22-23)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또한 바울처럼 성령의 바람을 경험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성령의 바람은 바울에게만 불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붑니다. 마치 이 세상에 바람이 없는 곳이 없듯, 성령의 바람은 늘 불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바람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고, 우리 자신을 바람에 맡기고 살지 않으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에 이끌림을 받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계획대로 일을 추진하고 싶어합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바람을 거슬러 갑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깊이 숙이고는 바람을 거슬러 자기 목적을 이루려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사는 것은 마치 돛단배(sailing ship)로 항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바람이 불면 돛에 그 바람을 받아 항해해 나갑니다. 바람이 강해지면 돛을 낮추어 줍니다. 바람이 아예 없으면 노를 저어가면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돛단배로 항해하려면 바람에 예민해야 합니다. 바람의 방향도 잘 알아야 하고, 바람의 성질도 잘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꼭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조종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바람에 익숙한 뱃사람이라 해도 바람을 조종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령의 바람에 예민해지고, 그 바람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 바람이 인도하는 대로 항해해 나가는 것입니다. 때로 바람은 우리를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곳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때로 전혀 계획에 없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바울의 경우처럼, 처음에는 그것이 당황스럽고 난처해 보지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이 더 큰 축복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돛단배로 항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배를 움직이는 엔진이 발명된 후, 사람들은 돛을 버리고 모터를 찾습니다. 모터가 있으니 이제는 바람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상관 없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돛을 사용할 때 선장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은 바람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기계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가장 빠른 방법으로 물을 가르며 달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 얼마나 이와 닮았는지요! 성령의 바람에 자신을 맡기고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제는 각자 엉덩이에 모터 하나씩을 달고는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갑니다. 모터 보트를 타는 사람이 바람에 대해 신경 쓰지 않듯, 우리는 성령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내가 원하는 속도로 달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성령이 있다 해도, 그것 없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착각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거대한 속임수입니다. 인간은 물질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에만 만족하고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신만의 판단과 결정으로 살아간다면, 결코 참된 만족을 찾을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인생은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 막대기처럼 표류하다가 허비되고 말 것입니다. 성령의 숨을 마셔야만 우리는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고, 성령의 바람을 타야만 우리 인생이 표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성령의 바람에 맡기고 항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표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니던 버릇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고 돌아보면, 자신이 평생토록 표류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반면, 성령의 바람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그 바람의 이끌림을 따라 평생을 산 사람들은 마지막에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우리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고백합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잘 하셨습니다. 더욱 성령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성령의 숨을 호흡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끊임없이 기도하라"(살전 5:17)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 늘 성령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지켜 보시기 바랍니다. 돛단배 안에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는 선장처럼, 늘 성령의 바람을 느껴가면서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힘쓰십시다. 

혹시, 아직도 성령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까? 눈을 들어 위를 쳐다 보십시오.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눈을 돌려 여러분의 내면을 들여다 보십시오. 성령의 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숨을 끊임없이 들이마셔서 그 숨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별 소망이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에 우리를 맡기고 그 인도를 따라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달리기는 하지만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 성령이시여, 제가 믿습니다. 제게 오셔서 저를 채워 주옵소서. 저의 영혼을 깨우셔서 당신의 손길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숨이 되고 바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참되게 이 고백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같이 성령의 깊은 숨을 쉬어 충만이 살아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모터 보트가 아니라 돛단배가 되어 성령의 바람을 따라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마땅히 가야 할 목적지에 닿을 것이며, 또한 항해하는 동안에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맛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태초에 아담의 코에 성령을 불어 넣으셨듯
제게 성령의 숨을 불어 넣어 주소서.
저로 하여금 성령의 숨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영혼을 깨워 주소서.
제게 성령의 바람을 불어 주소서.
그 바람에 제 온 몸을 맡기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곳에 이르도록
저를 붙드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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