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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믿어서 얻는 혜택 (갈 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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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어서 얻는 혜택 (갈 3:8-14)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전도를 접해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첫 느낌이 어떠셨습니까. 이 방법에는 그 열심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식으로 전도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그런 방식으로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방법은 먹히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귀중한 진리를 협박과 공갈의 차원으로 전락시켰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했지 세상을 협박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협박은 하나님의 사랑에 먹칠을 하는 것이요, 아름다운 복음의 진리를 어글리하게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주님께 가까이 오게 하는 대신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되는 이유를 가장 적나라하고 속된 차원으로 끌어내린다는 점에 있습니다. 만일 지옥을 피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주된 이유가 된다면 마지못해 예수님을 믿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마치 보험을 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혹시 지옥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예수님을 믿어두는 것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 감격이 있겠습니까, 감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겠습니까. 

네 번째 문제는 전도자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처럼 끌어 올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정당한 대화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이 옳으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일방적인 강요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화를 중단시키고 더 이상의 진전이 없습니다. 반감을 살 수는 있어도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설사 생명이 위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전도방식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원하는데 협박의 소리에는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보면 알게 될 것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이전에 우리가 지금 사는 이곳에서 예수님을 믿어 어떤 혜택을 입을 수 있는지를 알기 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금 어떤 변화를 겪을 수 있는지를 알기 원합니다. 

왜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셨느냐? 유사 의료행위를 하신 것이냐?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의 혜택을 이 땅에서 맛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이 사실을 유념해야 됩니다. 기도는 의료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에요. 기도는 대체의학이 아니에요. 믿음의 혜택을 이 땅에서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고 구원의 혜택을 실감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무엇이냐? 이 진리를 발견하는데 기독교계는 2,000년 동안 씨름했어요. 루터교 재단이 만든 <루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꼭 보시면 좋을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가톨릭 순회 설교자가 광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그 당시에도 복음전도자들이 있었고 시청각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자가 설교 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그림을 탁 펼치면서 지옥불 속에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지옥에 간 영혼의 모습이다."라고 말하는 군중을 협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연히 군중은 충격을 받고 두려워하지요. 그 영화가 왜 이 장면을 포함시켰느냐.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얻는 첫 번째 혜택은 중세의 종교개혁이 발견한 것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이 왜 혜택이 되느냐? 큰 혜택이에요.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만 했지,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루터 같은 인물은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없으면 좋겠다.’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확신을 얻습니다. 우리가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은 선행을 쌓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선행을 아무리 쌓아도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으로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착한 행위를 해서 얻는 의로움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심으로 얻는 의로움입니다. 

마틴 루터는‘ peccator simul justus’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 말은 ‘죄인이요 동시에 의인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면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시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혜택이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하여 자살을 하는 사람이 이 진리를 안다면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백, 의로움이라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면서 ‘너, 죄인!’이라고 할 때, 우리의 양심이 ‘너,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할 때, 마귀가 ‘너,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할 때 유일하게 우리 편에 서서 우리가 의롭다고 변론해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길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누가 우리를 끊으리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온 세상이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 속에 믿고 설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건 엄청난 혜택입니다. 

두 번째 혜택은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입니다. 바로 성결함이라는 것입니다, 성결함. 마치 원치 않는 선물을 받은 사람의 표정을 하지 마세요. 나물이 가득한 밥상을 받은 아이의 표정…. 성결함이 무슨 혜택이냐. 마틴 루터가 사람이 죄 사함을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요한 웨슬리는 죄가 사람을 다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얻었더라도 곧바로 다시 죄를 짓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끊임없이 죄와 회개를 반복하는 괴로움의 연속이 됩니다. 신앙생활이 괴로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죄와 회개를 반복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주셔서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얘기냐?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은 죄를 완전히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예컨대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과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면 사람은 술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을 좋아하는 것과 성에 중독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입이 거친 것과 욕을 하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성미가 급한 것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과 마음속에 늘 미움이 있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부족함을 의식하는 것과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웨슬리가 발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Sin shall not have dominion over you’ 놀라운 진리에요. 이 결과로 우리는 죄 사함의 확신을 얻는 것뿐만이 아니고 죄의 사슬로부터 벗어나서 몸과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신앙에 큰 능력과 확신을 가져다줍니다. 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당시에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에서 벗어나고 도박에 중독되었던 사람, 죄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 수많은 사람이 변화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20세기 초 오순절 운동이 또 하나의 혜택을 발견했는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성령’이란 말을 들으면 알레르기 반응부터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 성령운동 하는 사람 중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광신을 연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그러나 성령이 없이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 충만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 받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사람이 성령을 두려워하는 이면에는 성령에 대한 이질감 내지는 무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할 때 누가 돌을 주며 알을 달라 할 때 누가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건 누가복음에 있는 말씀이에요.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기록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성령이 좋은 것이라는 얘기에요. 떡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돌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자에게 악령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나는 성령 받을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격이 있어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도 은혜로 받는 것이고 성령도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자격이 있어서 받는다면 그건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으면 무슨 혜택이 있느냐? 범사에 많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신앙생활이 즐거워지고 예배가 즐겁고 예배가 감격스럽고 기도가 잘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영적인 지혜를 얻고 영적인 감각이 생기고 영적인 분별력이 생기고 섬김과 봉사와 전도의 능력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고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성령을 어떻게 받느냐? 구하면 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성령을 구해야 됩니다. 

성령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성령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던 것을 버리고 성령의 도움을 의지해야 됩니다. 유럽의 교회가 쇠퇴하게 된 배경에는 그들이 많이 배워서 머리는 커졌는데 성령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이 인본주의적 신앙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쇠퇴를 가져온 것입니다. 

네 번째로 그것뿐만이 아니고 20세기 중반의 성령운동은 또 다른 혜택을 재발견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따라왔는데 하나는 병 고침이고 또 하나는 축복이에요. 이것이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발견은 정당한 발견입니다. 먼저 병 고침,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병들게 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도 병들게 하지 않으시고 병자들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을 어기시면서 까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당신만이 그러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주님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문둥병자의 질문에 ‘내가 원하노니 – I am willing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님의 뜻은 우리의 병을 고치는 데에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저주하는 분이 아니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다. 축복. 축복이 물질적인 축복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인 축복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사람들은 다 물질적으로도 풍성했습니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요셉 · 다윗 심지어 고난의 종이라고 불리는 욥까지 부유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복음을 위하여 버리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맞아요. 그러나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전토를 백배가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백배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풍성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뜻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까.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설명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가장 설득력 있고 쉽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9절 말씀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함께’라는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법적인 논리입니다. 

우리가 외국여행을 하다가도 대한민국 대사관 안에 들어가면 법적으로 대한민국 영토에 있는 것과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하나님 나라의 혜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뜻입니다. 대사관 안에 들어가면 대한민국 영토의 혜택을 누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되는, 그 특권과 법적인 효력을 우리가 갖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입니다. 이것보다 많아요. 그런데 이것을 발견하는데 2,00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이걸 내가 굳이 모르더라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연히 혜택이 오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알아야 믿음으로 구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알아야 마귀가 훔쳐 가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게 아닙니까. 모르면 마귀가 훔쳐가도 몰라요. 실제로 마귀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이 혜택을 훔쳐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늘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죄에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 이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아야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혜택이 이 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내세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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