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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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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23)
   

지난 1월말부터 미주장신대에서 소그룹성경공부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한 학기가 끝나면서 내일이면 마지막 수업을 합니다. 처음 가르치는 과목인지라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분주한 사역일정에 쫓기다보니 잠을 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아주 보람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깊이 들어가고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의미 있는 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주어진 문장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관찰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누가 등장하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그리고 왜 벌어지고 있는 지 파악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얼마나 잘 관찰하고 계신지 두 가지를 묻겠습니다. 첫 번째, 베드로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아침식사를 나눈 바로 그 자리에서 나누었겠습니까 아니면 근처 호숫가를 걸으면서 나누었겠습니까? 두 번째, 베드로가 그 대화를 나눌 때 다른 제자들도 그 대화 내용을 곁에서 들었을까요? 아니면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었을까요? 
  
관찰의 또 다른 중요 요소는 핵심단어가 무엇인지 찾는 것입니다. 핵심 단어는 반복해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나눈 대화를 보면 두 가지 표현이 반복됩니다. 하나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핵심단어만 나열해도 주어진 문장의 윤곽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관찰 단계에서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앞부분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십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큰 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힘들게 고기를 끌고 해변에 와 보니 주님은 이미 아침을 준비하여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개인적으로 찾아오셔서, 베드로를 만나시고, 용서하시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후에 제자로서의 사명을 일깨우십니다. 본문을 통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15-17절)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주님이 말씀하실 때 ‘이제 올 것이 왔구나’하며 속이 뜨끔하였을지 모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를 계속해서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를 처음 만나실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로 번역된 ‘투톤’은 사람과 사물을 다 가리키는 복수대명사입니다. “이 사람들”로 번역한다면 함께 식사하던 다른 여섯 제자들을 가리키고, ‘이것들’로 번역한다면 베드로에 관련된 모든 것, 즉 가정이나 사업, 사역 등이 다 포함됩니다. 

문맥으로 볼 때 베드로에게 관련된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면서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반복하여 대답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을 던지실 때는 근심이 되었다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주님께서 반복하여 물으신 것은 베드로를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잘못과 허물을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자 함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질문에 답할 때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떠 올렸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 깊은 곳에 있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끄집어 내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할 때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는 ‘먹이라’를 사용하고 어떤 때는 ‘치라’를 사용할까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단어의 변화에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주님의 양을 잘 돌보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와 친구와의 사랑을 뜻하는 ‘필레오’가 사용되었지만 요한의 경우 구별 없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의 핵심을 레위기를 근거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하셨습니다. 

둘 다 똑같이 중요하지만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토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백성을 섬기려면 먼저 주님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없이 양을 먹이는 것은 주님의 양이 아닌 자신의 양을 키우는 것이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양을 먹이지 않는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기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이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반복되는 사랑의 확인 앞에 녹아 내렸습니다. 전에 대제사장 집 뜰에 있던 불 곁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가 지금은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주님의 일은 주님을 먼저 그리고 더 사랑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18-23절)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영혼 구원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마가복음 3:13-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제자도는 주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따름’으로 이루어집니다. 1세기에는 제자들이 선생을 선택하여 제자 삼아주기를 원하는 데 비하여 예수님은 직접 자기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원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시고, 함께 있게 하시고, 권능도 가지게 하시는 등 모든 동사의 주어가 예수님입니다. 

제자도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만약 제자가 되는 것이 자원하는 것이었다면 하기 싫을 때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모인 무리 중에서 즉흥적으로 뽑았으면 그 자리에서 싫다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는 말씀처럼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자원해서 주님을 따른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전 9:16) 하면서 바울도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기에 복음 전하는 것을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열둘이 나아 왔다는 것은 제자들의 결단보다는 부르심에 대한 순종에 초점을 둡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제자들은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선생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이 단순한 지식의 전수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면서 그분의 삶을 배우고 그분의 사역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만 할 뿐 아니라 그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제자 훈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종의 자세를 가지고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2)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기 위하여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을 대신하여 파송을 받아 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전에 듣도 보도 못한 새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 1:39) 이미 예수께서 하신 사역을 제자들에게 따라 하게 하십니다. 사역의 핵심은 선포와 치유입니다. 열둘은 예수님의 메신저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면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영적 권위와 능력으로 사단을 제압하며 사람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도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부터 주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내가 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다스리도록 나를 주님께 내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제자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당장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예수님께만 순종, 희생,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순종, 희생, 헌신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모습이 언급됩니다. 

1) 사역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베드로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 띠고 다녔다고 합니다. 띠를 띤다는 것은 거침없이 행동하거나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옷을 허리띠로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삶을 살아왔을지라도 미래에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박과 체포가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차 맡게 될 책임과 함께 어떤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또 어떤 식으로 죽게 될지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그가 두 번째 보낸 편지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4)라고 고백했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끝이 좋은 사람. 그저 그런 삶, 끝이 안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사무엘,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잠재력을 다 활용하며 주의 사역에 힘쓰다가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어떻습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힘이 센 장사였지만 하나님이 그 힘을 가지고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살다가 대적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눈이 뽑히고 수모를 당하다가 나중에는 기둥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가 죽을 때에 죽인 블레셋 사람들이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고 하지만(삿 16:30) 아쉬움을 남깁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서 구원한 사사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취한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그것이 음란하게 섬기며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삼손이나 기드온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했으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였으므로 끝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2)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눅 22:61를 보면 대제사장집 뜰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격렬하게 부인할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베드로가 창피하여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부끄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과 다시 만납니다. 주님이 그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이 배반자 하며 멱살을 잡고 분노하십니까? 자신을 배신한 것을 인하여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잔잔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니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왜 책망하십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하시며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가 잠시 눈길을 돌려 뒤를 따르는 요한을 보았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요한은 자기를“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소개하며 최후의 만찬 때도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회복을 경험하던 베드로가 요한을 보니 갑자기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여 나는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요한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이라 대답하십니까?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살려둔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It is none of your business). 네가 알 바 아니야.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하면 돼. 

내가 너에게 준 사명, 나의 양 무리를 섬기는 사명만 잘 감당하면 돼. 주님의 말씀은 가정법 문장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라는 소문으로 바뀌어 형제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요한은 여기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정정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요한이 죽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자기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베드로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받은 사명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성은 주님을 성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명령입니다. 각자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사명을 붙잡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성도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때도 가만히 계시던 예수님이 왜 지금은 베드로를 책망합니까? 시기심 때문입니다. 경쟁심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공동체를 멍들게 하고 분열을 일으킵니다. 복음서 어디를 보더라도 베드로가 요한에 대하여 드러내놓고 시기하거나 비방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베드로가 그 동안 예수님 곁에 있던 요한의 존재를 은근히 의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남과 비교하면서 쓸데없이 우월감을 가지거나 열등감을 갖지 말고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권면입니다. 

겸손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시기하는 마음이 듭니까? 언제 섭섭한 마음이 듭니까?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하지 못한 무엇인가를 했을 때 생깁니다. 저 사람 나보다 후배인데. 저 사람 나보다 가방끈이 짧은데. 저 사람 나보다 우리 교회에 늦게 왔는데 등등. 과거에 매달려 그 사람을 평가하고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생깁니다. 마귀는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질 때 놓치지 않고 다가와 더 흔들어 놓습니다. 

시기나 섭섭함은 주의 일을 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일이나 행동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 일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위로하고 축하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열린 마음으로 가질 때 교회는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기쁨과 슬픔, 희열과 고뇌, 뼈아픈 상처와 감격적인 회복의 기억이 있는 장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베드로에게 갈릴리는 아름다운 회복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요,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과 말씀이 있던 곳입니다. 어부인 제자들에게는 삶의 장소였습니다. 다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은 지친 제자들을 떡과 물고기로 먹이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입을 통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세 번이나 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 갈릴리는 소명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이고,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 알려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다시 한 번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한 베드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사명자가 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를 인하여 가책을 느낄 수도 있고, 일이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아 낙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다면 힘이 들 때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롬 8:39)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비울 것은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아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만을 굳게 신뢰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끝까지 주 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다보면 때로 힘들 때도 있습니다. 방해도 있습니다. 회의도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믿음에 굳게 서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며 맡겨진 사역에 충실하며 한 마음이 되어 서로 섬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는 칭찬을 주님으로부터 듣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용서를 경험하고 회복을 경험하고 사명을 깨달으며 주님을 끝까지 성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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