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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자녀 양육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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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양육 (엡 6:4)


구약 성경을 보면 많은 부분이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역사서들입니다. 여호수아서로부터 시작해서 에스더까지가 다 역사서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워야 하느냐? 우리나라 역사도 다 모르는데 하물며 남의 나라 역사를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배워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이스라엘 역사가 마치 우리 역사를 보는 것처럼 우리네 역사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선민들의 역사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걸음을 기록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마지막 때를 위해 준비된 백성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의 심성에는 항상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름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부르고 있지만 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할 정도로 우리들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역사는 신명기적 사관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수아서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백성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면 사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평안하다가 평안하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게 되니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셔서 외적의 침략을 받아 외적에게 다스림을 받는 아픔을 겪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 사사가 사는 동안 하나님을 잘 섬기며 나라가 평안합니다. 

그러다가 사사가 죽고 나면 다시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다가 또 다시 하나님의 징계로 나라가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렇게 역사가 반복됩니다. 그러면서 사사기의 맨 끝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다스리셨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모세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그 후에는 사사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지만 이제 백성들은 그런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의 다스림이 아닌 인간 왕을 세워 그들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왕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 되심을 거절하는 풍토가 그 사회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마다 다 자기 소견 즉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다 행하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복된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를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신명기 28장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반면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살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기록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살면 행복을 우리게 되겠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가 그 앞을 가리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마지막 사사로서의 사무엘에게 우리도 왕을 세우게 해 달라고 해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니 그 뒤에 다윗을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 사무엘 상하서입니다. 다윗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솔로몬이 다스리는 이야기까지가 열왕기 상서 11장까지의 이야기이고 열왕기 상서 12장부터 열왕기 하 17장까지는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 이스라엘 망하기까지의 역사가 그리고 그 다음은 남쪽 유대가 망하기까지의 역사가 기록되는 것이 열왕기 상하서입니다. 역대서는 북쪽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고 남쪽 유다의 이야기를 그것도 믿음의 관점에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서들의 기록이 신명기적인 사관 신명기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것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신앙의 바탕 위에서 나라를 다스렸느냐 아니냐만 따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였더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한 마디로 기록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기고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으고 아무리 큰 권세를 누렸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고 찢어지게 가난하게 고생만 죽도록 하고 살았다고 해도 그가 믿음 안에 서 있었으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살펴서 내가 믿음 안에 바르게 서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를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열왕기를 보면 믿음의 바탕 안에 있는 남쪽의 역사는 왕이 몇 살에 등극해서 몇 년을 살았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북쪽 역사는 그저 맛보기 정도로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바탕에 있지 않으면 그건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남쪽은 비극적인 왕위 승계가 거의 없지만 북쪽은 항상 몇 대 가지 못하고 반란에 의해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쪽은 평화로운 역사라면 북쪽은 피의 역사입니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살핀다면 남쪽의 역사에는 항상 왕의 어머니 이름이 기록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왕의 신앙에 끼치는 어머니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믿음의 가문 출신이면 거의 대부분의 자녀 즉 왕이 믿음 안에 서서 나라를 다스립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이방인이거나 믿음 밖에 사람일 경우 그 자녀된 왕이 하나님 신앙을 버림으로 결국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나라를 잃고 외세에 의해 계속 지배를 당하게 될 때 유대인들이 혈연주의를 버리고 신앙주의를 택해 아버지가 유대인이면 그 자녀가 당연히 유대인이 되던 것을 바꾸어 아무리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도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그 자녀는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대로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가 어느 나라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 자녀를 유대인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던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들로 하여금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양육하는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잘 보는 것이 디모데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명기적인 사관으로 우리네 인생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모든 길에 함께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승리자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의 모든 영광을 누리게 되겠지만 말씀을 벗어나 살게 되면 아무리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누릴지라도 밖에 버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녀들로 하여금 올바른 믿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해야 될 책임이 부모들에게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어떻게 우리들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고 또 오늘도 자녀들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한 학교에서 운동장 둘레의 울타리를 철거했습니다. 울타리가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구속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울타리가 철거된 후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울타리가 있을 때에는 아이들이 운동장 전체에 흩어져 놀았는데 울타리를 철거한 뒤에는 운동장 가운데에 모여 노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으로 아이들에게 있어서 울타리는 구속감이 아니라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어지자 아이들은 오히려 운동장의 활동 범위를 좁혀 자기들끼리 모여 서로 의지한 것입니다. 
도브슨 박사는 “아이들에게는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명제를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였습니다. 아이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의 요구에 무조건 응하는 것은 좋은 교육이나 사랑에 들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정의 규율, 부모의 훈계와 징계, 사회 공중도덕 등의 울타리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사랑의 채찍’이란 말은 교육학적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즉 부모는 자녀들에게 타당하지 않은 요구를 무리하게 강요하여 아이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사소한 규칙이나 편견을 내세움으로써 자녀들을 노엽게 해서도 안 됩니다. 편애함으로 인해 자녀를 노엽게 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행동은 자녀들을 노엽게 할 뿐만 아니라 낙심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규율과 질서마저도 무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의견은 존중하되 그러나 먼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채찍 들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아무 때나 함부로 채찍을 들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 채찍을 들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녀들이 한 둘밖에 없다보니 너무 지나친 사랑의 돌봄과 간섭으로 인해서 소위 과잉보호로 인해서 마치 마마보이로 지칭되는 아이들을 만들고 있어서 안타까움이 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으로부터 더욱 그런 영향이 번지고 있습니다마는 다 큰 성인이 되어서조차 부모를 부르는 호칭이 엄마 아빠로 고착되어져 버린 그래서 어머니로서의 권위,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다 흩어져 버린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물론 호칭이야 보다 다정스러운 호칭을, 보다 정감이 있는 호칭을 쓴다는 것을 무어라 할 수야 없겠지마는 그 언어 속에 숨겨 있는 부모를 공경의 대상으로서 보는 것보다는 그저 다정한 친구, 내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매개체 정도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두렵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결코 아무런 야단도 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감정에 따라 좌우되는 징벌은 자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고 그것이 큰 상처로 남을 수 있기에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딴 짓을 하는 것을 그냥 못본척하고 놔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따끔하게 벌을 주심으로 정신 차려 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들곤 하셨습니다. 아무리 백성들이 그것은 싫다 아니다 하여도 하나님이 한 번 길을 정하시면 반드시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때론 따끔하게 야단도 치시고 합당한 벌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코 감정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까?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어릴 적부터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들려주어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자녀들이 성경을 줄 줄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해지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조건은 우리처럼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면 자연적으로 한국 사람이 되는 것처럼 혈연주의가 아니요 또는 미국처럼 미국의 영토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부모가 어느 사람이든 상관없이 미국 시민권을 주는 국지주의도 아니라 어머니가 이스라엘 사람이면 그 자녀에게 이스라엘의 국적을 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로부터 자녀들은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은 바로 이 하나님 신앙에 있다는 뜻입니다. 
한데 오늘의 본문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이 그저 아비들아 하면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이유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머니의 역할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시의 로마에는 ‘부권’ 제도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법적으로 부여한 것입니다. 가족을 노예로 팔거나, 사형에 처하게 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 부권은 자녀의 평생에 걸쳐 효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악한 제도와 의식 때문에 로마 광장에까지 버려진 자녀들이 있었고, 버려진 자녀들을 데려가 길러서 노예로 삼거나 매음굴에 파는 어른들도 있었습니다. 병이 있거나, 장애 자녀들은 더욱 쉽게 버려졌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당시의 자녀란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되어 살아야 할 고유의 인격체가 아니라, 부모의 소유물로 취급됐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당시의 시대상과는 달리 자녀에 대한 부모의 도리를 강조했고,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자녀들이 씩씩 거리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속상하게 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자녀들이 노여워합니까? 
먼저는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가혹할 경우입니다. 이럴 경우 자녀는 불안해하며 의기소침해지거나,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 제약을 많이 받는 바람에 난폭해지게 됩니다. 

또 하나는 이삭과 리브가에게서 보듯 또 야곱에게 보듯 과잉보호나 편애를 할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자녀가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자기 본위가 되어 협동이나 공존을 모르게 됩니다. 웬만한 것은 부모가 다 해 줘 버릇해서 자녀가 성취의 능력도 성취의 기쁨도 모르고 자라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면 옴츠러지고, 자학과 자괴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실상, 최적의 환경인 온실 속에서는 큰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자유방임하거나, 무관심할 경우입니다. 이럴 때 자녀는 소외감과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시달리게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냉혈한이 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는 자녀를 고유의 인격체가 아닌 자기 분신이나 소유물로 여겨 경시하거나 무시할 경우입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한다 싶으면 자녀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 대신에 심한 열등감에 빠지고, 자기 상실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녀란 부모의 분신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부모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피조물인 고유의 인격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귀한 사랑의 결정체라고 하는 사실을 언제든 잊지 마십시오. 내 자녀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란 뜻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는 부모가 아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개성과 재능과 소질을 가꿔 그 자신의 길을 이루어 나가야 되고 이를 위해 어릴 적부터 요셉처럼 자신만의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에 맞추어 계획하고 이루어나가야 하는 인격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의미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우리가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더욱 사랑스러워 가도록 태어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심정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할 책임이 부모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마십시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서 자녀들과 함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꿈이며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자녀들을 대할 때도 함부로 입을 열어 저주하거나 상소리로 욕하지 않아야 합니다. 야단을 쳐도 아이가 납득할 때 그것이 효과가 있는 것이지 자녀들이 납득하지 못할 때는 더 이상 부모가 고마운 존재가 아니요 자기 생각대로 가지 성질대로 마구잡이로 자기들을 어떻게 하는 존재로밖에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자녀들의 디딤돌 역할입니다. 그러기에 축복자로서의 아버지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는 본이라는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는 항상 아버지의 발자취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좋으니 나쁘니 싫으니 하면서도 결국은 아버지를 닮아가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아버지의 모습 안에서 내일의 내 자녀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또한 지금의 어머니의 모습에서 내일의 내 자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날마다 자녀들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축복자가 되셔야 합니다. 잘못을 야단하기 보다는 먼저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모습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믿음 안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실수에 대해 화를 내가 보다는 관용하십시오. 끌어안아 주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향해 오래 참으셨습니다. 내가 자녀들을 혼내듯이 하나님이 하시려고 했다면 오늘 우리 가운데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화를 내거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오히려 책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마디로 자녀들이 더욱 성장하려면 아버지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생각만 옳다고 하지 마십시오. 물론 자녀를 염려하는 마음이야 누구보다도 크겠지만 늘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욱 자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아이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격려해 주고 먼저 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그건 내가 먼저 주의 교양을 잘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먼저 잘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사랑의 실천자로서 내가 살아갈 때 그러한 나를 자녀들이 무심한 듯 지켜보며 그것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게가 부모를 따라 게걸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게걸음 하면서 자녀보고는 바른 걸음 하라고 한들 그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의 모든 언행은 자녀들의 눈앞에 다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그 홧김에 무슨 말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화가 나면 잠시 그 자리를 피하는 것도 좋습니다. 주의 교양은 먼저 오래 참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야단치기에 앞서서 먼저 안아 주십시오. 그 어떤 변명도 네 말이 틀렸다고 반박하지 마십시오. 그냥 들어주란 말입니다. 그리고 네 말도 일리는 있다고 우선 인정해 주고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어머니로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로서는 어머니로서는 네가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즉 이렇게 하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 스스로 방향을 잡고 따를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 주라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단이 아닌 훈계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는 설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납득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그것을 해야 되는지 그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으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몸이 따르겠습니까? 아니 입에서 당겨야 뭐도 먹는 것이지 그저 입에 쳐 넣어준다고 해서 먹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게 먹여 보아야 잠시 후에 저 뒤에 가서 다 토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를 하든 심지어 자녀들을 훈계할 때도 아이들이 아하 그리고 무릎을 쳐야 그게 자녀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기도해야 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으니 항상 주님의 관점에서 자녀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역사서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된다고 해도 그 길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그 마지막이 아픔 가득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는 모든 권세를 다 누렸다고 해도 그 마지막이 지옥불 속이라면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도 보듯이 평생을 이를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여기 온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하면서 멱살잡이나 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부모들이 좋은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셔서 날마다 자녀를 축복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시행하리라 내가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을 위한 축복의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리게 하십시오. 그 말은 그러한 말이 자녀들의 귀에도 들려진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자녀들의 마음에는 자기가 축복 받는 존재임이 각인되고 사랑받는 존재임이 각인되며 하나님이 자기의 길을 지켜주시며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자녀들 또한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들의 자녀들이 무엇보다도 믿음 안에서 좋은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자녀들을 잘 양육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열 받지 않고 자녀와 싸우는 법 중 “자녀와 행복해지는 방법”이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 먼저 판단하지 마세요. 
자녀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지켜만 보세요. 
- 미리 비판하지 마세요. 
자녀의 의견과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후 의견을 말하세요. 
- 먼저 열 받지 마세요. 
부모가 감정적인 되면 아이도 감정적으로 대응해요.
- 미리 준비하지 마세요 .
그냥 놓아두면 아이들은 부모가 깜짝 놀랄 정도로 멋지게 문제를 풀어요. 

- 먼저 물어보지 마세요.
자녀가 이야기하러 오도록 기다려 주세요. 
-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 
자녀는 부모가 믿어줄 때 새로 맡겨진 책임을 잘 해내요. 
- 먼저 단정 짓지 마세요. 
단정적 말들은 언쟁을 불러 일으켜요. 
- 아이가 성장했다는 걸 외면하지 마세요.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제대로 대접해 주세요.

하나 더 “자녀에게 주는 7가지 유산”이란 글입니다.

첫 번째 선물 - 「존경심」
존경심은 숭고한 마음의 작용으로 사람을 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며, 올바른 길을 걷게 만든다. 누구나 인생에서 그 사람만이 할수있는 역할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자신도, 다른 사람도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자.

두 번째 선물 - 「인내심」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욕망을 억제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쉽게 좌절하게 마련이다. 자녀에게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억제하는 법을 가르쳐라.

세 번째 선물 - 「사랑」
사랑하는 마음을 진솔하게 전해 주는 것이 자녀 교육의 기본이다. 부모가 따뜻한 사랑을 충분히 주고 부모 자식간의 신뢰 관계가 확고하다면 자녀 교육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네 번째 선물 - 「의욕」
자녀가 스스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분위기를 연출하자. 부모 스스로 즐겁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자녀에게도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라.

다섯 번째 선물 - 「개성」
아이들은 모두 잘 갈고 닦으면 빛을 내는 보석과 같다. 그 아이만의 좋은 개성은 부모만이 잘 살릴 수 있다. 자녀의 개성을 이해하고 그 개성을 살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자.

여섯 번째 선물 - 「배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인생관을 갖도록 조언해 주자. 높은 이상은 배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새로운 것을 알아 가고 도전하는 것에 신선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라.

일곱 번째 선물 - 「꿈」
자녀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라. 자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한다면 칭찬해 주자. 그것이 자녀의 꿈과 마음을 키워 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어린 자녀들도 나름대로의 눈치도 있고, 자존심도 있고, 부러움도 있고, 욕심도 있고, 생각도 있고, 계획도 있고, 꿈도 있는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 모두가 부모의 관심과 사랑과 축복 속에 좋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세워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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