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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과 소금이 되어라!(바른길 가기)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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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이 되어라!(바른길 가기) (마 5:13-16)

우리는 인생에서 늘 “무엇이 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삽니다. 아니, “내가 무엇을 이루리라!”라는 생각이 있지만, 때때로 그런 생각에서 좌절을 느끼고, 때로는 허무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 삶은 “내가 생각하는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이가 명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이 광야 체험이었습니다.
광야를 걸으며 광야를 걷는 법을 배웠습니다. 광야를 잘 걷기 위해서는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밟아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덜 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광야에서는 하루만 지나면 사람들이 지나간 자국이 없어집니다. 바람에 다 쓸려가기 때문이죠. 그래서 새로운 길을 갈 때는 첫 사람의 발자국이 길이 됩니다. 누군가 첫발을 내디디면 길이 되는 것이 광야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시작하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라는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누군가 우리를 기억하고 따라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지만, 참 멋있습니다.
“역사”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기억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이 땅의 역사와 믿음의 흔적을 남기고, 기억을 남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닐까요?


근본적으로 다른…

산상수훈 두 번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오늘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리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지의 차이점이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종교는 자신들의 수양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성의 높은 단계를 주로 세상과의 단절로 이해합니다. 불교에서의 고승들, 힌두교의 수도사들을 보세요. 속세를 떠난 위대한 고독자들이 아닌가요? 하지만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오늘 본문 13절이 “너희는…”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인가요? 이전 시간에 팔복 말씀을 통해 어떤 사람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란 바로 천국을 소유한 너희라는 말이지요.
천국을 소유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것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 따라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소금’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세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실 오늘 말씀이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이 말씀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한창 과도한 소금 소비 때문에 캠페인을 하고 있죠. 나트륨을 줄이는 것이 생명을 연장하는 길이라고요. 그러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소금을 먹게 되었을까요? 어떤 음식에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죠. 요즘처럼 소금을 만들 수 없었던 때 그 가치가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옛날에는 일꾼들에게 돈 대신 소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소금이라는 ‘salt’가 일군들에게 주는 봉급이라는 ‘salary’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죠.

그러나 아무리 맛을 내는 소금이라도 소금만 먹으라면 먹겠습니까? 소금이 가치가 있는 것은 녹고 어우러지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라고 아무리 우겨도 가치가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어우러지지 않는 소금, 하나님의 사람은 가치가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지요.

우리에게 소금이 되라는 말은 어디서든지 잘 어우러지라는 뜻은 아닐까요? 우리가 어우러지고 녹으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맛을 내는 것 말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 어우러지면서 뭔가 다른 맛을 내야 하지 않을까요? 소금을 넣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맛 말입니다.

소금의 가장 강력한 기능 중의 하나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다!”라는 것쯤은 알겠죠?
이 지구에 인류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 인구가 늘어남에도 살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소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소금으로 절인 음식들인 ‘염장’ 기술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이렇게 존재할 수 없었죠. 소금이 들어가는 것에 단순히 맛을 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아시나요?
물속에 흙을 넣거나 모래를 넣는다고 성분이 변하지 않습니다. 음식에 넣을 수도 없습니다. 소금의 가치는 바로 ‘변화’에 있고 ‘변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단조로운 삶에 소금이 들어가면 ‘영적 갈증’을 유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부패하고 썩은 집단에 그리스도인이 들어가면 뭔가 충돌이 일어나야 합니다. 부패 세력과의 화학반응이 무섭게 일어나야 합니다. 썩는 곳에 소금이 떨어지면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소금이 들어가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질적인 변화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요? 소금인 줄 알고 넣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소금기가 다 없어진 소금은 가장 가치 없습니다.
처음부터 흙이요, 모래였으면 기대하지 않았을 텐데, 분명히 소금의 모양을 하는데 소금 맛이 나지 않을 때 그것을 버리는 사람의 마음이 어떨까요? 얼마나 짜증이 날까요?
오늘 성경에 보니까,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에서 소금을 얻는 방법이 특별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사해에 이르는 요단지구대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해수면 아래에 있는 지형입니다. 아마도 빙하기 전 바다였던 곳일 가능성이 많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소금이 땅에서 그냥 파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 중의 빗물 때문에 모양은 소금이지만,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있었습니다. 그 소금을 파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모양만 소금인 것들은 밖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로 캐 고르는 ‘세속화’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중해 연변에서 서식을 하는 들오리들이 여름을 노르웨이로 이동하는데 마침 화란의 상공을 지나게 되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 농가의 뜰에서 집오리들이 평화롭게 모이를 줍고 있었다.

이때 한 들오리가 갈 길은 아득하고 또한 피곤하여 그만 평화롭게 보이는 집오리 떼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앉았다. 그 집오리들은 들오리에게 융성한 대접을 해 주었다. 며칠 후에 들오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자기 대열을 찾아가려고 날아 보았으나 그동안 몸에 기름이 끼어 날 수가 없었다.
다시 겨울이 되어 창공을 날아가는 자기 대열을 보자 허전해지고 마음에 가책을 느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없어졌다. 몇 년 후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집오리가 되어 시궁창을 뒤집고 있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진의입니다.
이제 세상에서 소금이 된다는 의미가 명확하지 않나요?
소금이 들어가는 곳에 화학 반응이 일어나야 합니다.
맛이 달라져야 합니다.
맛이 나야 합니다.
부패를 방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Becoming a contagious Christians/예수를 전염시키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조금 다른 표현을 썼죠. 소금이 된다는 것은 “갈증을 유발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의미는 세상 사람이 크리스천을 만났을 때, 영적 갈증을 느끼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죠. 그들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죠.

빌립보서 4장 8절 말씀을 보세요.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무엇이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둘째로, 진실을 드러내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메시지 성경에 보면, 빛이 되라는 것을 “하나님의 빛깔을 드러내라!”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등불을 들고 있게 한다면, 설마 너희는 내가 너희를 통 속에 숨겨 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단 위에 둘 것이다.”

저는 진실은 드러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진실은 우리가 규명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으므로 어둠이 물러가는 것처럼 드러나야 합니다. 빛 앞에서 어둠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빛이 있으면 드러납니다.
빛의 또 다른 뜻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많은 부정과 거짓 모략이 많습니까?

40년 전 링글린 브라더즈 서커스단이 뉴욕 공연을 할 때였습니다.
공연 중 갑자기 정전이 됐습니다. 1분간이었지만, 관중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무대에서는 조련사가 호랑이 네 마리의 재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철창 속이니까 관중에게는 위험이 없었으나 캄캄한 데서 조련사가 호랑이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하고 캄캄한데 무대에서는 조련사의 채찍 소리와 호랑이의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다시 켜지자 관중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뒤에 기자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듯이 행동해야 합니다."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를 여전히 제압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원수 마귀를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려면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랑의 빛, 진리의 빛, 평화의 빛, 생명의 빛을 나타낼 때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 본향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기준이 아니겠습니까?
김난도가 쓴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거리에 나가면 약도가 있습니다. 길을 찾을 때 당신은 지도에 무엇부터 찾나요? 당신이 가장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은 ‘you are here'라고 쓰인 현재 위치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각 건물의 위치를 표시해놓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좌표를 알려주지 않으면 지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I am here'를 찾지 못하면 목표도 실행계획도 무의미합니다.

빛이 있는 곳에 ‘정체’가 드러납니다. 빛이 있으므로 주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빛이 되어주는 사람과 빛을 보고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아주 명백하게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5~16절에 보니까 두 가지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빛이 된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누군가가 바라보고 따라올 수 있는 기준이 되라는 것이죠.
우리가 살다 보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구분이 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아니, 그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삶을 살라는 것이죠. 적어도 이 나라의 중요한 때가 되면 국민을 위하여 한마디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여야 하겠습니까?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빛이 된다는 것은 어둠의 영역을 물리치는 것이죠.
빛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빛이 퍼져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높은 탑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보면 야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을 만끽하고자 한 곳으로 다 모은다고 하면 그곳은 휘황찬란할지 모르지만, 다른 곳은 어둠이 되겠죠.
빛은 모이는 것이 아니라 퍼져 나가야 합니다. 사실 이 말씀 속에 교회의 사명이 있고, 크리스천들이 살아가야 할 본이 있지 않을까요?

15절의 말씀이 재미있죠. 메시지 성경의 표현을 보죠.
“…내가 너희에게 등불을 들고 있게 한다면, 설마 너희는 내가 너희를 통 속에 숨겨 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단 위에 둘 것이다.”

빛은 드러나야 빛의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세상에 녹아야 하듯이, 빛은 세상 속에서 빛나야 합니다.
빛이 비치는 곳에 죄가 드러나고, 빛이 있는 곳에 무엇이 위험한지 경고할 수 있으며,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정철이 쓴 [학교 밖 선생님 365]에 나오는 ‘걸림돌을 디딤돌로’라는 제목의 이야기입니다.
길바닥엔 수많은 돌이 있다.
그중엔 당신을 쓰러뜨리는 걸림돌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그것도 그냥 돌일 뿐이다.

다른 길도 많은데 굳이 걸림돌이 박힌 곳으로 방향을 잡으며
내 앞엔 걸림돌만 있다고 투덜거릴 이유는 없다.
때로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여유가 필요하다.
지름길일수록 걸림돌이 많다.

또 하나는, 그 빛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올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빛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요? 사실 빛이란, 그 존재만으로 영광이 되고 영향력이 드러납니다. 어디에 가나 그 존재가 표시가 나기 때문이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자녀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드러날 때마다 하나님 형상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단 위에 둘 것이다.”
빛의 정체성, 즉 우리가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영역이 물러가야 합니다. 우리가 빛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차원을 벗어난, 교회차원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아주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나를 괴롭히는 말씀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아니다. 내가 이해하는 부분이다.” 실존적인 고민 속에 내가 있습니다.

이 고민은 빛이 되어야 하는 고민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절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문제도 드러나지 않고, 죄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고민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등경 위에 올라가 빛을 발할 때, 온 세상이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둠이 물러가야 합니다. 죽었던 양심이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것이죠.
그리고 당신은 그 누군가에게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죠.
당신의 삶이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켜 주느냐는 것이죠.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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