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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사랑이 너희와 함께 (고전 1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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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이 너희와 함께 (고전 16:21-24)    

언젠가 지방에 갔다가 식당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점심시간이 지난 후라 식당은 조용했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둘러보니 눈에 익은 달력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달력은 다름 아닌 우리 교단 여전도회연합회가 발간한 선교달력이었습니다. 아주머니에게 물었습니다.<누가 교회에 다니십니까?> 아주머니께서는 당신께서 교회에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그 짧은 대화가 있은 후 아주머니는 훨씬 친절했고, 이것저것 반찬을 더 가져다 주셨습니다. 제가 식사만 하고 나와도 되겠지만,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게 된 이유는 달력을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고, 그 반가움은 함께 주님을 믿는 성도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지구촌에는 70억 8천 6백만 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8초마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12초마다 한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의 극히 일부만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친밀도도 모두 같은 게 아닙니다. 특정 요소에 따라 훨씬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피로 맺어진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동향, 동문, 직장동료 등은 훨씬 친밀합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앙의 동지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성도를 위해 헌금을 하기도 하고, 처음 만난 사이에도 친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세상에 많은 교회들 중에서 땅끝교회에 함께 몸담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보통 사이가 아닙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사도가 당시 교인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21절에서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라고 함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한 친밀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편지를 직접 쓰지 않고 대필을 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장 22절을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되어 있는데, <더디오>란 인물이 로마서를 쓸 때 바울의 대필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대필을 하게 했던 이유는 안질을 심하게 앓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도 대필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끄트머리에서 인사말은 직접 썼습니다. 친필로 문안하는 이유는 배려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정성을 기울여 문안하는 대상은 누구였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인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사랑했습니다. 본문 24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아멘!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바울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이들이 바울을 위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바울도 이렇게 사랑의 마음을 전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무렵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바울 사도의 관계는 오히려 편치 않았습니다. 

본래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한 후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후 바울은 떠나고 <아볼로>가 후계자가 되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 후 바울은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현재 이 편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이 편지를 받은 후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불량한 이들의 충동에 넘어가서 바울을 배척하면서 비방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의 마음이 불편할 무렵 <글로에>집 사람들을 통해서 고린도교회가 파당이 갈라져 다투고 있고, 도덕적으로 문란하며, 부활을 비롯한 교리적 문제에 혼란이 있고, 어떤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오히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몰고 가는 등의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여러 문제에 대해 신앙적 충고를 담아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이 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고, 바울을 불신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 대한 온당한 대접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바울은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11장 9절을 보면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이 겸손하게 처신할수록 시시하게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은 권위가 없으며 예수님께 직접 부름 받은 열 두 사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폄하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10장 10절을 보면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울은 편지을 읽어 보면 그럴듯한데, 막상 만나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비방한 것입니다. 바울은 가급적 부드러운 사랑으로 그들을 대했는데, 오히려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대로라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언사가 고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함으로써 변함없는 사랑의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여러분, 상대방은 자신을 비방하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데, 바울은 왜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을 같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같은 고난을 겪으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동지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수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구주로 믿고,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동지였습니다. 

어떻게 이들은 동지가 되는 것일까요?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예컨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불린 곳은 수리아 안디옥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을 보면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안디옥 시민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은 자신들과 다르다고 경멸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함께 경멸당하는 동지>의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끼리 위해주지 않으면 누가 위해주겠습니까? 

당시 그들은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기록에 의하면 로마제국의 인구가 5천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 기독교인은 매우 적었습니다. 더구나 복음이 로마에 전해진 후 받은 핍박과 박해는 극심했습니다.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 Tacitus>는 네로 황제 시대에 기독교에 가해진 박해를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네로는 소위 <인류를 증오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던 한 집단을 교묘하고도 잔악한 방법으로 처벌하였는데, 그들은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그들의 이름은 로마 황제 <디베료, Tiberius>의 치세 때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했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이라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로마의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그때 그들의 죄목은 방화 혐의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인류를 증오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되, 유희의 대상으로 이용당했다. 짐승의 가죽을 입힌 채로 개들에게 던져져 찢김을 당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밤중에 어둠을 밝히는 횃불로 사용된 자들도 있었다. 네로는 자신의 정원에서 이러한 쇼를 연출하였으며, 자신은 전차 경주자의 옷을 입고 전차를 탄 채로 그 사이를 돌아다님으로써 볼만한 광경을 만들려고 하였다. 시민들은 죽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기까지 하였다. 결국 그들은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개인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임을 당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런 극심한 핍박을 함께 지고 가는 동지였습니다. 비록 일부 문제가 있어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서로 갈등한다 하더라도, 로마 제국과 사단의 세력과 맞서서 함께 싸워야 할 하나님의 군사로서 전우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끼리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성도들끼리는 서로 아껴주고, 보호해주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기도하고 도우면서 영적 싸움을 함께 싸워야 했습니다. 바울은 조만간 이런 핍박이 올 것을 내다보면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동지애로 사랑한 것입니다. 

또 기독교인들은 살아가는 방식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일반인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있습니다. 

익명의 저자가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쯤 집필한『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한(Epistola ad Diognetum)』이라는 문서가 그것입니다. 본래 이 문서의 사본이 처음 발견된 것은 15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어느 생선가게의 헌 종이 꾸러미 안에서였다고 합니다. 희랍어를 공부하러 온 젊은 학생이 이것을 헐값에 샀고, 그 후 한 신학자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문헌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앙리 에띠엔느, Henri Etienne>라는 사람이 1592년에 파리에서『디오그네스투스에게 보낸 서한』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면서부터입니다. 

그 후 이 문서는 스트라스부르그 시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870년 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지만, 이미 여러 번 연구되고 출판된 뒤였으므로 그 내용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 문서를 가리켜 <그리스도 신앙에 관한 한, 신약성경을 제외하고 이 책만큼 현대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저술은 없다.>고 극찬했습니다. 

이 문헌은 아마도 <하드리안 황제>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데, 디오그네투스가 기독교에 대해 던진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저자는 기독교인들을 <새로운 인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생각과 삶이 과거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이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이 문서의 일부를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저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아기를 갖다 버리지는 않습니다. 저들도 ‘육에 속해’ 사는 것이 사실이지만, 결코‘육을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저들은 지상에서 무척 바쁘게 활동하면서 지내고 있지만, 저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저들은 모든 법률에 순복하지만, 저들은 법이 요구하는 그 이상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에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죄를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생명에 이릅니다. 저들은 가난하나 많은 사람을 부하게 합니다. 저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완전한 풍족을 즐기고 있습니다. 저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나, 그 수욕 가운데서 영광을 받습니다. 저들은 선을 행하고 행악자로 벌을 받으며, 벌을 받으면서 생명에 이르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게 바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가정관과 가치관,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비록 자신을 오해하고, 비방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예수님이 구주되심을 믿는 사람들이며, 함께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할 사람들이며, 함께 천국을 향해 나아갈 사람들이며, 함께 세상 죄악과 악령과 싸워야 할 동지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으로 살기가 정말 어렵던 로마에서 함께 동지 된 입장에서 아끼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이런 유대감은 어떻게 맺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함께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맺어집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여기서 <저주>라는 강력한 단어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회원 자격을 가지려면 반드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부자요, 권력자요, 지식인이요, 유명인이라 하더라도 로마제국의 시민은 될 수 있겠지만,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들어올 수 없고, 천국의 시민은 될 수 없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22절 끝에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미래형의 기원을 덧붙입니다. 이 부분이 다른 사본에서는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라고 과거형으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섬기는 주님께서 이미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여셨고, 함께 그 분을 믿어 성도가 되었고,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함께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동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같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한, 그들은 동지였습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여주는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사이에는 의견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교인들의 모습에 실망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남들이 육체를 위해 즐기는 주일을 예배의 날로 삼아 예배에 참석합니다. 늘 기도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선교와 전도를 위해 헌신하고 헌금을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부흥을 위해 애를 씁니다. 때로는 과감한 다짐으로 희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성도를 바라볼 때 <이 분은 예수님을 알고 있다. 나와 같은 천국을 목적지로 삼고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공감한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성도 간에 깊은 교제를 나누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회 안의 모임에 통 참석하지 않는 분에게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한 번 갔는데, 배울 것이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의 모임에 가는 것은 유익을 위해서 간다기보다는  교제를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짐을 서로 나누어지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아보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시골의 두 젊은이가 도회지로 나와 교회에 출석했는데, 일 년 가까이 출석을 했는데도 아는 척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인내가 한계에 달했고, 두 사람은 다음 주에 결판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방법은 서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도 말을 걸어주는 이가 없으면 교회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는 자신이 먼저 말을 걸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앞의 친구는 교회를 떠났고, 후의 젊은이는 교회에 남았습니다. 그는 후에 후대가 기억하는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17세기의 저명한 청교도 목회자인 <리챠드 박스터, Richard Baxter>입니다. 

여러분, 서로 귀하게 여기고, 축복하길 원합니다. 땅끝교회에 몸담은 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도와 부산 지역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 대해,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과 이슬람권의 핍박받는 성도들을 향해, 세계 교회를 향해 사랑으로 동지애를 가져야 합니다. 같이 21세기를 살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반 기독교적 문화와 싸우면서 복음을 믿고 천국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우리끼리 서로 아끼고 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지하무덤으로서 성도들이 핍박 시기에 숨어 살던 카타콤에서 이런 글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음습하고 어둡고 불편한 곳에서도,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나는 사랑했던 당신들 덕분에 63세까지 살 수 있었소!> 평균 수명이 짧던 그 시대에, 그 많은 고난과 핍박과 조롱을 받으면서 캄캄하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63세가지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익명의 성도는 그 때까지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을 <사랑했던 사람들 덕분>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눈물이 울컥 나는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젠가 세월이 더 흘러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내가 그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산 것은 날 사랑해준 교우님들 덕분이었다>고 술회하면서 천국에 갈 수 있길 기대합니다. 

부디 같은 21세기에, 같은 대한민국에서, 같은 부산에 살면서, 땅끝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사이에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사랑의 마음이 흐르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천국을 향해, 주님을 위해 나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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