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 (히 4:14-16)

첨부 1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 (히 4:14-16)

저는 여러분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한다. 신앙생활은 길게 봐야 한다” 지금 고난 중에 있다고 영원히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잘 된다고 영원히 잘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말을 할 때마다 요셉의 예를 들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길게 보지 않고 순간만 본다면 종살이 하는 요셉은 실패한 것입니다. 옥살이 중에 있는 요셉은 비참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누구도 요셉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요셉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역전 시키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옥한흠 목사님께서 미국유학시절에 작은 도시에 있는 한인 교회를 8개월 동안 섬기신 일이 있었습니다. 
교인들 중에 한 분이 세상적으로 보면 이미 성공한 의사였습니다. 그 의사가 어느 날 옥목사님과 몇 명의 교인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분이 좋은 집을 샀기 때문입니다. 큰 정원이 있는 3층짜리 멋진 양옥집이었습니다. 이 의사가 안내하는 대로 지하실로 내려가 보았는데 최고급 오디오 장비를 갖추어 놓고 필요할 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 감상실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를 믿는 집인데도 이상하게 어느 방은 온갖 종류의 양주병들이 진열되어 있는 장식장이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방은 울적하면 내려와 한잔 마시면서 기분을 풀 수 있는 카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침실을 비롯하여 어느 방이나 그 화려함이 굉장했습니다. 그 의사는 자기가 그만큼 성공하고 화려하게 산다는 것을 은근히 내 비치려고 그랬는지 상당히 우쭐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반면 옥목사님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의사는 옥목사님과 나이가 비슷했는데 그 의사의 형편과 목사님의 형편이 비교되면서 옥목사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옥목사님은 가족도 데려 오지 못한 채 한 달에 겨우 몇 백 불로 공부하고 있는 목사요, 유학생의 신세였기 때문에 그 의사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감정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옥목사님이 소천하시기 전에 미국에서 전화가 왔답니다. 그 의사가 자기 병원 로비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옥목사님이 그 소식을 듣고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래도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을 텐데. 무슨 고민을 안고 씨름하다가 자살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믿었던 예수님이 그에게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자신의 믿음이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때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런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도대체 그 사람의 믿음 생활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닷가에 가면 방파제가 있습니다. 파도를 막기 위해서 둑을 쌓은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올 때 항구에 정박해 있는 작은 어선들은 방파제 덕에 안전합니다. 만약 방파제가 없이 계속해서 큰 파도를 맞는다면 그 작은 어선들은 산산조각 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신앙은 작은 어선이 피할 수 있는 방파제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파도를 만납니다. 고민과 갈등 그리고 좌절감과 상처들. 이런 것들은 크고 작은 파도가 되어 우리를 치려고 밀려옵니다. 이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인생의 파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심각한 고민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믿는 신앙의 대상이 잘못되었던지 아니면 신앙의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믿음이 잘못된 것일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신앙과 생활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 있던 믿는 유대인들에게 보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동족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또 그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로마의 핍박이 극심했기 때문에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밑바닥 생활을 할 수 밖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버렸습니다. 배교하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상황 속에 있던 믿음의 사람들에게 해답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당시 고난 중에 있던 믿는 유대인들에게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죄를 범하면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아갔습니다. 제사장은 제물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리며 제주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제주는 자신의 죄가 사해졌다고 믿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당직 제사장이 매일 같이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침이 되면 상번제를 지냈습니다. 양 한 마리를 잡아 제단에 드리면서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사장은 이 짐승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면 온 백성들은 자기의 죄가 용서받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유대교는 7월10일을 대속죄일로 지켰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에서 온 백성들의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사하여 달라고 제사 드리고 나오면 밖에서 대제사장을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은 모든 죄에서 사함 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제도는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입니다. 히 10:1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구약의 성전 제도는 완전한 성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드렸던 제물 역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장과 대제사장 제도 역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모형과 그림자를 붙잡고 있었지만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림자가 보여주려고 했던 실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14절에서는 수신자들에게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설교는 그 당시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했던 이유 두 가지만 본문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서 믿는 도리를 굳게 잡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은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는 사람들이 심판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앞부분에서는 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주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또 하나는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안식입니다. 11절에 보니 우리들은 영원한 안식을 사모해야 합니다.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라는 말은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안식,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13절에 보면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거치는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 심판대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영원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공로로 심판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는 절망입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벌입니다.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유황불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완전하고 영원한 제물이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 변호사의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공로를 주장하므로 우리가 무죄라고 변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변론을 받아드리시고 예수님의 주장대로 믿는 우리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이게 하시는 분입니다.

고전 1:30에 보면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므로 의를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잃어버린 의로움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 때문에 의롭게 되고 최후의 심판도 이기는 것입니다.

윌리암 맥도날드가 쓴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사업에 부도를 내고 고통을 당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무서에서 수억 원 세금 고지서가 날라 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세금을 다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무서에 가서 호소했으나 “영수증이 없으면 어떤 해결책이 없습니다.”라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아내는 집으로 돌아와서 집안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영수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포기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할 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방에 앉아 간절히 하나님께 깊은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너를 도우리라.” 분명히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응답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은 거꾸로 진행 되는 듯했습니다. 세무서에서 세금을 내지 않으면 고발하겠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부인은 더 간절히 기도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기도하는데 호랑나비 한 마리가 집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집안에서 날라 다녔습니다. 어린 아들이 호랑나비를 잡으려고 따라다녔습니다. 온 집안이 난리가 났습니다. 호랑나비는 응접실 소파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들은 나비를 잡으려고 소파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소파 밑까지 들어갔다 나올 때 종이쪽지 하나가 묻어 나왔습니다. 보니까 남편이 낸 영수증이었습니다.

그 부인이 세금 영수증을 가지고 세무서로 갑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억 원의 세금을 내야 했고 내지 못하면 구속될 위기에 놓였었지만 영수증 한 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되었습니다. 
부인은 그 세금의 압력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말씀은 주님이 우리의 세금 영수증 들고 하나님께 변론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로 때문에 심판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는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봅시다. 심판을 이긴 우리들은 이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심판의 보좌가 아닙니다. 은혜의 보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잔뜩 쌓아 놓고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면 은혜를 주시는 보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은혜의 보좌는 어디 있습니까? 은혜의 보좌는 천국에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는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말합니다. 우리가 그 보좌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아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천국에 있는 은혜의 보좌 앞에 어떻게 나아갑니까? 죽어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처럼 신비로운 체험 가운데 3층천에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마 6:6 말씀대로 은밀하게 우리를 보시는 것입니다.

골방이라 함은 하나님과 나만의 만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습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 향한 상태로 기도한다면 그곳이 교회가 되었든, 버스 안이 되었든, 회사가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그곳이 기도의 골방입니다. 교회가 아니어도 되지만 교회라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진실하게 주님을 향하여 기도한다면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지 기도의 골방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또 하나의 방법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모인 이 자리, 이 예배 시간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데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머뭇거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지성소는 절대로 보통 사람들이 못 들어가는 곳입니다. 일반 제사장들도 못 들어갔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나 아무 때나 들어가면 다 죽습니다. 그러니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갈 때도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대제사장도 부들부들 떨고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는 허리에는 종을 달고 발목에는 긴 줄을 묶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가면 죽는데 어떻게 들어갑니까? 그런 경우에는 대제사장을 묶고 있는 줄을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들에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까? 

큰 대제사장 때문에, 주님의 공로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시는 큰 대제사장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본문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는 영이십니다. 

롬 8:26을 보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바나바 훈련원을 운영하시는 이강천 목사님이 계십니다. 제가 그분의 기도 응답에 관한 글을 읽고 은혜가 되어서 좀 소개하겠습니다.

이강천 목사님이 한 번은 학생들과 해외로 선교 훈련을 나갔습니다. 대만에서 일주일, 홍콩 마카오에서 
일주일, 태국에서도 일주일, 방글라데시에서도 일주일 머물면서 훈련을 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선교팀이 방글라데시에 갔을 때 목사님의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밥맛이 떨어지고 잠을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새벽 2시까지 뒤척이다 잠이 들어도 깨면 새벽 4시였습니다. 두 시간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시 잠을 청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5시부터는 혼자 엎드려 기도하다가 6시에는 일어나 성경 말씀 묵상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본문은 다니엘서 10장이었는데, 다니엘서 10장에는 다니엘이 하나님의 엄청난 환상을 보고 기절하여 힘이 빠져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인자 같은 이가 나타나서 어루만지며 “강건하여라. 강건하여라” 하시니 다니엘이 힘을 얻어 일어나는 말씀이 보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힘주시는 하나님을 만나 내가 힘을 얻고 소생하리라’는 믿음으로 묵상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힘이 빠진 자를 일으키시는 주님, 저도 지금 다니엘처럼 힘이 빠져 있으니 저를 만져 힘이 새롭게 하옵소서. 제가 본문을 소리 내어 읽을 터이니 말씀대로 제게 임하시고 저를 만지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본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목사님은 주님이 만지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기도했습니다. “어루만지시며 힘주시는 주님. 제게 오셔서 저를 만지사 힘을 주옵소서. 아니면 오늘 다른 일 보러 못 가십니다. 

저는 오늘 얍복강 나루터의 야곱이 되렵니다. 저를 만지셔서 회복시키시기 전에는 아무데도 가실 수 없습니다. 제가 다시 본문을 읽을 터이니 말씀대로 저를 만지소서.” 

목사님은 다시 본문을 읽으며 기도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랍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또 다시 소리 내어 읽으며 기도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한글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영어로 성경을 읽고 싶은 감동이 일어나더랍니다. 그래서 NIV 영문 성경을 펴고 같은 본문을 읽었는데, 우리말에는 “강건하여라 강건하여라” 라고 번역된 부분이 영문으로는 “Be Strong, Be Strong Now”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말에는 표현되지 않은 Now(지금)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단어에 감동을 받고 “Oh Now Halleluah! Oh Lord, Touch me 
Now”(오 지금 할렐루야 오 주님 지금 나를 만지소서.)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에너지가 목사님의 온몸에 전류처럼 흐르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날 아침 어루만지며 힘주시는 주님을 만났고, 그날 아침부터 식사를 잘 하고 잠도 잘 자고 방글라데시 일정을 힘차게 감당하게 됐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힘입은 것입니다. 

이강천 목사님의 다른 기도 응답입니다. 바나바훈련원 설립을 위해 공장을 매입했고 등기이전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공장을 훈련원으로 활용하려면 많은 수리비가 필요했습니다. 목사님은 어느 날 말씀을 읽던 중에 눅 12:33을 읽게 되었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이 말씀이 목사님 눈에 들어오면서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후원 통장에 있는 것을 모두 털어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라.”, “주님. 바나바훈련원을 세우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두 털어 나누어 주면 어찌합니까?”, “그러면 네가 공장 수리 해볼래?”, “아니요. 주님이 해 주셔야지요.”, “그렇다면 다 나누어 주렴. 그리하면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경험하리라.” 

참으로 이상한 명령이었습니다. 돈을 더 모아야 하는 때에 나눠 주라고 하시니 목사님은 ‘참으로 역설적이로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주님의 말씀이니 우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통장에는 30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주님. 누구에게 나누어 줄까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몇 사람이 생각나더랍니다. 첫째는 마을 노인회 회장이 생각났습니다. 마을 노인정을 짓는데 돈이 모자라 모금하는 중이라며 은근히 도와주기를 바라는 말씀을 하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100만원을 도와주어야 되겠다는 감동이 왔습니다. 

또 강원도 원통에서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떠오르며 거기도 100만원을 보내 격려해야겠다는 감동이 왔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포항에서 개척교회를 하는데 건물을 새로 짓고 빚을 갚지 못해 어려움을 당한 후배 목사가 생각이 나며 그곳에 격려금을 보내도록 감동이 왔습니다. 목사님은 감동대로 돈을 다 써버렸고 후원 통장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대전에서 건축업을 하는 한 장로님이 찾아왔습니다. 장로님은 공장을 쭉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수리비가 5000만 원쯤 들겠군요. 그런데 뭐 현금 하나도 없이 후원금이 들어와야 한다면서요. 나 원 참…,” 그러더니 말을 툭 던졌습니다. “제가 외상으로 수리해 드릴게요. 하지만 공짜는 아닙니다. 우리 일군들이 다른 공사하면서 시간이 비는 틈틈이 공사할 터이니 재촉하지는 마세요. 대신 나도 공사비 달라고 재촉 안 할테니까요. 모금되는 대로 갚아 주세요.” 이렇게 해서 수리공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공사가 진행되자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수리공사 불가”라는 서명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섰습니다. 어이가 없었고 막무가내였습니다. 목사님은 동네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을 포기하고 기도실로 들어갔습니다. 주님께 이 문제를 상의하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미리 노인 회장에게 노인정 짓는 일을 위해 헌금을 나누어 주게 하지 않았더냐? 노인 회장을 대화의 통로로 삼아라.” 

목사님이 노인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의했더니, 노인 회장이 기꺼이 대화중재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서명운동이 곧 중단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건물 수리 공사가 완공되었습니다. 바나바 훈련원은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수리가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기도하므로 하나님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경험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 중에 신앙의 도전을 받고 있는 수신자들에게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도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우리를 때를 따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