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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롬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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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롬 10:9)
 

[나와 너]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 진 유대교 철학자 마틴 부버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하루는 부버가 한 랍비를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랍비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랍비가 다그치듯 또 물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처음 받아본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또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선생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자기가 평생 하나님을 믿어온 사람이고, 또 하나님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해 온 사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할 수 없어서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부버는 집에 돌아와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됐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왜 랍비의 대답에 즉시 대답하지 못했을까? 평생 하나님을 믿어왔고, 또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을 해 온 내가 왜 머뭇거렸을까?” 부버는 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3인칭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익숙했지만, 2인칭의 하나님의 대해서는 익숙하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부버는 객관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연구했고, 그 하나님에 대해 책을 쓰고 강의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인칭의 하나님에 대해 익숙한 삶을 살아왔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인칭의 하나님에 대해 익숙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런 성도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3인칭의 하나님에 대해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앞에 나 혼자 서서 하나님을 독대해 본 체험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2인칭의 하나님에 대해 익숙하지 못합니다.

마 16: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해 하는 말을 전해드렸습니다. 즉 제자들이 남들이 하는 이야기로 3인칭의 신앙고백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신 것입니다. 네 이야기를 해 보라는 것입니다. 2인칭의 신앙고백을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로 이 2인칭의 신앙고백을 묻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나는 예수를 어떤 분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입으로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고백해야 할까요? 사도신경을 보면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예수님에 대해 고백해 온 신앙고백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2000년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해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같은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이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를 ‘주’로 고백해 왔을까요? 도대체 ‘주’라는 무슨 뜻이기에 예수를 ‘주’라고 고백해 온 것일까요?

초대교회 시절 교인들이 당면한 가장 실제적인 문제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즉 예수님을 부를 적절한 호칭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신약성경에도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메시야’, ‘인자’,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다윗의 아들’ 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호칭들은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헬라 문화권에 살던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말 낮설었습니다. 

예를 들어 ‘메시야’, ‘다윗의 아들’과 같은 호칭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인자’라는 호칭은 특히 유대 묵시 사상적 배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반신반인’의 영웅으로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따라 초대교회가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적절한 호칭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할 때 아주 적절한 호칭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퀴리오스’(Kyrios) 즉 ‘주’라는 호칭입니다. 

물론 ‘주’라는 호칭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통용되던 호칭이었습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노예가 자기 주인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자가 스승을 부를 때, 존경하는 웃어른을 부를 때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이런 뜻에서 ‘주’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전혀 다른 뜻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그리고 10:13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를 ‘주’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 ‘주’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단순히 상전, 존경하는 분이라는 뜻이었지만, 이제는 그 호칭 안에 ‘구원’이라는 개념이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라는 말은 전적으로 신학적인 호칭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의 아주 특별한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고전 13: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누구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고 고백하게 해 주시는 사람들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특별한 사람들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고백하는 것일까요?

1. 예수가 나의 구주라는 고백

초대교회가 예수를 ‘주’라고 부르게 된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저들이 예수 때문에 구원받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라는 말을 다른 말로 ‘구주’라고도 불렀습니다. 즉 ‘구원을 주시는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왜 기독교는 구원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과거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과거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분이시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서 제일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죄인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도무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탄식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때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자기 안에 있는 죄를 깨닫고, 자기 힘으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절규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거듭나게 될 때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는 그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뼈저리게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놓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바로 유일하신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죄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의 주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셨다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해방과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 문제가 다 예수 안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죽어도 천국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지만 아버님을 너무도 늦게 전도해서 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18년 동안 전도했지만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세상 떠나시기 직전 3일 전에야 비로소 아버님이 예수를 믿게 되셨습니다. 암으로 투병 중이셔서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전도했습니다. 

3일 전에 다급하게 전화하셔서 예수 믿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려가서 영접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도폭발 전문 강사인 친구 목사님을 모셔서 차근차근 복음제시를 다시 했습니다. 하나씩 다 답을 하시며 철저하게 예수를 영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목사님이 분명하게 물었습니다. “지금 죽으시면 천국 갈 확신이 있습니까?” 아버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예 지금 죽어도 저는 천국 갈 줄로 믿습니다.”

그 후 제 모 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병상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온 자녀손을 다 모으시고 유언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은 이제 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제 제사 대신 예배를 드려라...” 그리고 3일 뒤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그 때 아버님의 그 마지막 얼굴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평안하고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 속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천국 가셨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 갈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천국 갈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우리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2. 예수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고백

초대교회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가 온 만물의 주인이시고, 교회의 주인이시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의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히 1:2-3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2절을 보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만물과 교회와 우리 자신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3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고 보살피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오늘 생존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이 점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깨닫게 되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점을 깨닫고 나면, 내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바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을 깨닫고 나면 이제 내 인생을 주님께 맡기게 됩니다.

찬 384은 제 애창곡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곡을 작사한 분을 알게 된 후 더욱 즐겨 부르게 됐습니다.   

이곡을 작사한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태어난 지 6주 만에 약사의 실수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으로 믿음 안에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2살이 됐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면서 또 한 번의 큰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됐던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한데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되자 크로스비는 절말 큰 시련을 겪게 됐습니다.
그러나 크로스비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다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총으로 맹아학교를 졸업하게 됐고, 그 학교 교사로 봉사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체험한 그 풍성한 은혜를 이렇게 찬양으로 노래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주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나의 입으로 신앙고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나의 주시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선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돌보아주신다는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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