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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들의 반응을 넘어서 (행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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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반응을 넘어서 (행 2:3-13)

: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충만케 하시는 권세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자동차에 기름 넣는 것을 깜빡 잊고 운전하다 보면 주유 표시등이 켜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를 가리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은 ‘무엇이 났다’고 합니까?

그런데 그런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어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본 말로 ‘엔코(えんこ)’라는 말에서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본래 어린 아이가 방바닥에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자동차 같은 것이 고장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연료가 바닥이 나다’, ‘물건이 다 떨어지다’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 말이 영어의 엠프티(empty)에서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엠프티는 ‘비어있는’이란 뜻입니다. 영어로 엠프티를 일본식으로 발음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졌든 우리말로는 ‘기름이 떨어졌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기름을 가득 채우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만땅’이라는 말은 원래 한자어 ‘찰 만(滿)’과 영어로 ‘탱크(tank)’가 결합한 말이라고 합니다. 역시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입니다. 주로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채워 넣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말로 ‘가득 채우다’는 말이 있으니 이런 말도 역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영에 하나님의 영이 ‘엠프티(empty)’한 사람,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주저앉은 것을 넘어서 완전히 죽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새로 태어납니다. 거듭난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요 5:24).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 들어와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충만은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충만은 그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충만은 흘러 넘쳐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믿는 사람은 성령 충만을 사모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제자들은 다락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행 1:14). 이렇게 기도하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I. 강림
  
성령의 강림은 신비였습니다. 사람의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체험한 것이기에 제한적이지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실체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먼저, 그 집 안에 함께 모였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보였습니다.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임하다[kaqivzw/카디조]’는 말은 ‘주저앉다’, 즉 ‘자리 잡고 앉다’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 각 사람의 영에 들어와 완전히 정착하여 머무르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임재라고 부릅니다.

1. 각 사람에게 임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들어와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성경은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b)고 하셨습니다.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존 웨슬리는 좌절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에 대해서도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기록한 1738년 5월 24일자 일기 내용입니다.

“저녁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나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이는 한 집회에 참석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로마서에 대한 루터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에 대하여 설명할 때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고 그때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나 같은 죄인의 죄마저도 또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존 웨슬리의 회심’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입니다. 

사람마다 체험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임재 없이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난 성령님의 임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6, 히 13:5). 그래서 우리에게 다시는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는 ‘엠프티(empty)’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영으로 함께 계시는 성령의 임재를 확신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와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구별하여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였을 뿐만아니라 충만을 경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충만하다[plhvqw/플레도]’는 말은 ‘가득 차다(to fill)’입니다.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만 임재하신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하게 하셨습니다(하다[divdwmi/디도미]). 임재하신 성령님께서 그 분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방언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여러 가지 모습입니다(고전 12:4-11). 같은 성령님께서 다양하게 일하십니다. 그래서 종종 성령 충만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함께 계신 성령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2. 각 사람에게 충만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한 번 임하신 성령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능력이 언제나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하였습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계속하여 누려야 할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에게서 성령님께서 탄식하는 일이 있습니다(롬 8:26).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으로 성령께서 일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존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집회에서의 회심이 있은 지 6개월 후, 페터레인이란 곳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1739년 1월 1일자 웨슬리의 일기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새벽 3시까지 계속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쁨으로 부르짖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땅바닥에 엎드러졌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과 놀라움으로부터 겨우 회복 되었을 때 우리는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 당신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이후 존 웨슬리는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됩니다. 우리는 경건의 훈련과 성경의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른 장작이라도 불이 붙지 않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성령의 불이 임할 때 비로소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의 문제는 구원받았다는 교인은 많은데,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는 성도가 적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고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도 신비(神秘)이거니와 성령의 충만도 신기(神技)한 일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방언하는 제자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놀람 그 자체였습니다.

  
II. 놀람
  
제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각각 자기 나라의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하였는지를 간락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6절 말씀입니다.

: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하는 말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온 사람들에게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듣고 소동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소동하다[sugcevw/슁케오]’는 말은 뒤죽박죽으로 ‘혼합하다’는 말입니다. 모두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소동하다’ 또는 ‘어리둥절하다’는 말보다는 더 강력한 말입니다. 

1. 그들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자기 나라의 말을 하는 제자들을 본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 충만은 이렇게 보는 사람에게 혼란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7절 말씀입니다.

: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갈릴리 시골 사람인 제자들이 멀리 떨어진 자기 나라의 말을 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에서 ‘신기하게 여기다[ejxivsthm/엑시스테미]’는 ‘제 정신을 잃다’, ‘미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12절에서 ‘놀라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들은 깜짝 놀라서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2. 그들은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성령 충만은 그것을 받은 사람에게 신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통하여 황홀경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울은 라마 나욧에서 일시적이지만 성령에 사로잡혀 옷을 벗고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워있었습니다(삼상 19:24). 하지만 성령 충만은 이것을 보는 사람에게도 충격적 일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 놀람이었습니까? 8절입니다.

: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통하여 저마다 태어난 자기 지방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은 고작 ‘어찌 된 일이오?’ 하였을 뿐입니다. 무엇이라고 말로 할 수 없어서 그들은 ‘어떻게! 어떻게!’하였습니다.

3. 그들은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말로 할 수 있을 때는 덜 놀란 것입니다. 완전히 기가 막히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말을 해도 고작 한다는 말이 ‘어쩌지! 어쩌지’하는 정도입니다. 그들은 말문이 막혀 ‘어찌, 어찌’하였습니다. 성령충만은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고 그 능력에 복종하게도 합니다.
  
또 사람들은 놀라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 말씀입니다.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사람들은 모두 놀라 당황하였습니다. ‘당황하다[diaporevw/디아포레오]’는 말은 ‘어쩔 줄 몰라서 심히 난처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 어안이 벙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 그들은 당황하였습니다.

성령 충만, 그것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쁨이 넘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더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영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바르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때로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때로는 신선한 바람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사랑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서도 하늘의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본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제자들을 놀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놀라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놀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III. 놀림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철판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났는데도 놀라기는커녕 빈정거리며 놀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성령 충만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성령 충만은 그것을 보는 사람도 놀랍게 합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을 본 사람들 중에 더러는 제자들을 조롱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조롱하다[cleuavzw/클류아조]’는 말은 ‘입술’이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즉 ‘입술을 삐죽이다’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보고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 하며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을 비웃고 경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 어떤 이들은 조롱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현장에서도 자신의 아집을 꺾지 않고 버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을 차려서 사는 일이 아니라, 정신을 차려서 죽는 일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남을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딤전 4:2)입니다. 영적인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나타남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29 말씀입니다.

(갈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성령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성령의 나타남을 조롱하고 빈정거리고, 더 나아가 박해하는 일이도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던 것과 같습니다(마 12:24).

존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에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터레인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이후 성령의 강력한 나타남이 일어났습니다. 또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설교하는 동안 네 사람이 넘어져 경련을 일으켰다. 그중에 하나는 아주 의식을 잃고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들어갔다. 또 한 사람은 심하게 몸을 떨었다. 다른 한 사람은 온 몸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낼뿐이었다. 마지막 사람은 경련을 일으키고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였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것을 계속해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존 웨슬리의 신앙운동은 “영적인 오만, 열광, 거짓 교리, 이단의 특성을 가졌다”고 격렬하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 ‘민중의 사기꾼’, ‘목사직을 모독하는 자’, ‘온 영국의 최대의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악마의 젖으로 키워진 자’, ‘황무지에 본영을 둔 사탄의 사자’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성령의 임재와 활동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점잔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눅 16:31),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웨슬리가 주장한 성화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비난하고 조롱하기로 작정한(?)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에 취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성령에 취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거룩하게 되었으니 또한 성령의 충만으로 세상을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여졌으니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의 임재를 확신하고,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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