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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복된 삶을 위한 2대 키워드 (골 3:18-19)

첨부 1


복된 삶을 위한 2대 키워드 (골 3:18-19)
  
< 행복은 예술작품 > 
  
며칠 전에 한 초등학생이 쓴 “아빠는 왜?”란 시가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냉장고는 먹을 것을 주고/ 강아지는 놀아 주는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가정에서 투명인간이 된 것입니다. 어떤 아빠는 침대 대신 소파에서 잡니다. 비참한 일입니다. 대화 없이 조용히 하숙생처럼 지내니 싸울 일은 없지만 그러면서 점점 아빠는 소외됩니다.
  
아빠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존재 이전에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철없는 아이는 아빠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 아빠가 없으면 먹을 것을 주는 냉장고도 없고 놀아주는 강아지도 없게 됩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아빠가 무너지면 그날부터 상처와 고통과 소외감이 가중됩니다.
  
남자 자신도 문제입니다. 남편의 관심과 아빠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때 바쁘다는 핑계로 늦게까지 밖에서 술 마시고 즐기다 나이가 들면서 돈도 못 벌어오면 존경 받기 힘듭니다. 정과 존경은 마음을 함께 한 시간만큼 생깁니다. 함께 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도 얻기 힘듭니다. 결국 가정에서 홀로 자녀를 키우며 외로움을 참는 아내들은 점점 남편에게서 마음이 떠나게 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행복한 가정은 마술로 생기지 않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행복해지는 가정은 없습니다. 행복은 일종의 예술작품입니다. 예술가가 각고의 노력 끝에 작품을 만들듯이 행복한 가정도 힘쓰고 애쓰며 노력하고 헌신할 때 이뤄집니다.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있고 싶으면 먼저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십시오. 훌륭한 인격자와 함께 있기를 원하면 먼저 훌륭한 인격자가 되십시오. 그처럼 복된 가정을 원하면 더 성숙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려고 애쓰십시오.

  
< 복된 삶을 위한 2대 키워드 >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여자가 창조되고 가정이 창조됨으로 완성됩니다. 그것은 가정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가정은 밥 먹는 하숙집이 아니라 영혼의 보금자리입니다. 특히 복된 가정을 만들려면 가정의 중심축인 부부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또한 부부는 가장 중요한 최소 공동체이기에 좋은 부부가 되는 원리는 복된 공동체를 만드는 기초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처럼 복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좋은 동반자와 동역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복종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이 구절에서 “복종하라!”는 말은 영어로 submit이라고 합니다. 영어에서 sub는 ‘아래에’란 뜻이고, mit는 ‘있게 하다’란 뜻입니다. 즉 ‘아래에 있게 하는 것’이 복종입니다. 복종이란 성경적인 위치 설정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합니다(고전11:3).
  
남편에게는 가정의 대표로서 지도권이 있고 자녀에 대한 축복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 생각에 남편의 주장이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처럼 여겨져도 그 차선책을 기쁘게 따라주면 그 차선책이 오히려 복된 선택이 될 때가 많습니다. 전도서 9장 11절 말씀을 보면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지 않고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지 않고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성공은 인간의 논리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집니다. 자세히 보면 복종을 통해 남편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 자체가 복이고 성공입니다.
  
어떻게 복종해야 합니까? 에베소서 5장 22절 말씀은 주님께 복종하듯 하라고 합니다. 자기 남편에게는 막 대하고 남의 남편에게는 살갑게 대하면 남편은 결국 ‘내 편’이 아닌 ‘남 편’이 됩니다. 그런 가정을 하나님이 축복하실까요? 힘든 얘기입입니다. 대단해 보이는 남의 남편에게 잘 보이기보다 보잘 것 없는 자기 남편에게 잘 보이면 그때 남편은 신나서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결혼 하나는 잘했어! 힘들어도 아내 때문에 살맛이 나!” 
  
그처럼 주께 복종하듯이 복종하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첫째, 남편이 구원받습니다(벧전 3:1-2). 어떤 불신자 남편은 아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조롱합니다. 아내의 가슴에 ‘인터넷 댓글 달기의 비수’를 꽂는 것과 같은 얼마나 비겁하고 매너 없고 사악한 언행입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전에는 감정대로 대응했지만 믿고 난 다음부터는 최대한 참습니다. 그러면 남편도 깨닫습니다. “아내도 성격이 있는 편인데 저렇게 참는구나! 예수란 분이 정말 위대한 분인가 보다.” 그러다가 결국 남편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둘째, 복종하면 자기 내면이 단장됩니다. 요새 많은 여성들은 예쁘게 되려고 뼈를 깎고 살을 찢습니다. 얼굴과 전신 재건축 비용이 엄청납니다. 그러나 그런 재건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인 화장입니다. 화장품은 코스메틱(cosmetic)이라고 하는데 그 단어는 ‘우주(완벽한 질서)’란 뜻을 가진 코스모스(cosmos)와 같은 헬라어 어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화장은 ‘얼굴의 질서를 잡는 것’이고 최고의 영적 화장은 ‘질서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질서를 잘 지키려는 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십니다.
  
사실 얼굴을 예쁘게 화장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면의 단장입니다. 내면이 잘 단장되면 볼수록 예쁘고 더 같이 있고 싶고 어디든지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처럼 내면을 단장하는 최고의 비법이 바로 복종입니다. 사라는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아브라함을 ‘내 주인(아도나이)’이라고 불렀습니다(창 18:12). 그 결과가 90세에 아이를 낳는 청춘 인생이 되었습니다. 복종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최고의 영적 화장품입니다.
  
셋째, 복종하면 자기 통제를 잘하게 됩니다. 특히 가정과 교회 내의 복종은 세상 조직상의 상명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자기 통제의 산물입니다. 즉 ‘남을 위한 순종’이 아닌 ‘나를 위한 순종’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복종이 필요하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엡 5:21). 그처럼 서로 복종하려고 하십시오.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지시하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상처와 불행과 저주를 낳습니다. 
  
서로 복종할 줄 알아야 그 관계를 통해 천국이 펼쳐집니다. 왜 인간관계가 나빠집니까? 복종할 줄은 모르고 복종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종은 최상의 인간관계를 만드는 자기 통제의 비법입니다. 복종을 통해 가정 천국과 교회 천국을 경험한 사람이 대인관계에도 성공하고 최고의 인물이 되고 최고로 인정받는 성도가 됩니다.
  
서로 복종하는 것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서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삶의 기본자세입니다. 두 인격체가 모이면 서로 복종하고 섬겨줌으로 서로 맞물려서 조화를 이뤄야 하고, 세 인격이 모이면 각각 서로 복종하고 섬겨줌으로 서로 어울려서 조화를 이뤄야 하고, 일곱 인격체가 모이면 각각 서로 복종하고 섬겨줌으로 일곱 빛깔이 어우러진 무지갯빛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결국 복종은 복된 공동체를 만드는 키워드입니다.
  
제가 대학생 선교회 활동을 할 때 그 멤버가 거의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반면에 교회에는 90대 어르신부터 갓난아기까지 있었습니다. 어느 공동체를 통해 더 배울까요? 같은 연령층만 모이면 더 ‘재미’가 있지만 다양한 연령층이 모이면 더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연령층이 모인 곳에서도 배울 것이 있지만 다양한 연령층이 모인 곳에서는 더 배울 것이 많습니다. 결국 같은 연령층의 모임보다 다양한 연령층의 모임을 통해 더욱 큰 축복을 얻습니다. 
  
100명의 ‘또래 청년들이 모인 교회 청년부’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청년과 100명의 ‘남녀노소가 모인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청년 중에 어느 청년을 사위로 삼고 싶을까요? 저는 단연 후자의 청년을 사위로 삼고 싶습니다. 지난 20여년의 목회 경험을 통해 후자의 청년이 대체적으로 더 내면의 단장을 이루고 더 인간관계도 좋고 더 축복 받고 더 결혼도 잘하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 딸한테 수시로 말했습니다. “얘야! 큰 교회에서 청년부 활동만 잘하는 청년이라면 결혼 대상으로 삼는 문제를 한 번 더 고려해봐라.” 청년들은 사려 깊은 부모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그 의미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 깊은 인생의 경험과 관찰에서 나온 얘기들입니다. 
  
어떤 부모는 같은 또래와 어울리면 좋겠다고 또래가 많은 교회로 보냅니다. 그러나 또래 친구는 세상에서 사귀면 됩니다. 교회에 와서까지 또래들만 찾으면 잠시 ‘재미’는 있어도 ‘의미’를 얻을 기회는 줄어듭니다. 또한 또래끼리 있으면 시험도 잘 듭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 청년부 청년들이 은근한 신경전과 짝 찾기로 상처와 아픔도 많이 겪고 시험도 많이 듭니까? 그러다가 결국 교회를 완전히 떠나는 청년들도 꽤 많습니다.
  
또래 친구를 교회에서까지 찾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잠시 신앙적 재미를 얻는 데는 도움이 될지라도 전인적 신앙을 얻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또래의 노는 재미 때문에 신앙성숙이 방해 되고 시험에 빠질 때도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또래끼리 재미있게 어울려 다니는 것보다 다리가 불편한 80이 넘으신 어르신들을 위해 밥과 반찬을 나르면서 봉사할 때 훨씬 더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해집니다.
  
교회는 몸입니다. 다 머리가 되거나 손이 되거나 발이 되면 안 됩니다. 머리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어야 몸이 제 구실을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또래가 많은 곳으로 재미를 찾아 보내지 말고 남녀노소가 어울리는 곳으로 보내 순종과 섬김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게 하십시오. 그러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성숙해지고 더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처럼 공동체에서 순종과 섬김을 잘 배운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도 성공하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고 결국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2. 사랑
  
본문 19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 구절에서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히지 말라!”는 말은 복종을 강요하지 말고 복종할 마음이 들 정도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복종하고 싶어도 복종할 마음이 들지 않으면 복종이 고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복종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책임적으로 사랑하고 영적인 키와 마음과 정신의 키를 키우십시오. 그러면 복종도 얼마나 기뻐지겠습니까?
  
요새 사람들은 사랑의 뜻도 잘 모르면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많이 합니다.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나 매너가 좋은 것이 사랑의 작은 단편은 될 수 있지만 그것들 자체가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몸과 마음과 시간과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명상의 원리처럼 ‘내려놓음’에서 끝나지 말고 예수님처럼 ‘내어줌’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지상 최대의 낮아지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말구유에 누웠고 힘들게 목수 일을 했고 사람을 너무 사랑했기에 불의하게 체포당했습니다. 그리고 하찮은 사람들로부터 심문과 채찍질과 침 뱉음을 당했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 바로 진짜 사랑입니다. 그런 희생적인 사랑을 가지고 동반자와 비전 동역자를 아껴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동반자와 동역자를 깨끗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드는 것입니다(엡 5:26-27).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서로를 거룩하게 만들려고 자기를 바치는 평생의 헌신입니다. 자녀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은 자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의 책무이지만 동반자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은 평생의 책무입니다. 결국 부모의 책무보다 배우자의 책무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천국 갈 때까지 동반자와 동역자를 힘써 사랑하고 돌봐주십시오.
  
어느 날,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 1:2).” 그 명령대로 음란한 고멜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고멜은 바람기도 많고 유혹에도 잘 넘어가서 누가 명품을 사준다면 잘 따라나서는 헤픈 여자였습니다. 그런 여자를 성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런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바로 배우자의 책무입니다.
  
이제 매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많은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동반자와 동역자를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은 감정적인 소꿉장난이 아니라 현재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이 함께 있게 하신 동반자와 동역자를 꿈과 비전을 향해 달리는 거룩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삶에서 선교와 나눔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최소한 동반자를 사랑하는 것과 병행하며 하십시오. 동반자 사랑은 성도의 평생책무이자 필생책무입니다.
  
어떻게 동반자를 사랑해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3장 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 구절에서 “동거하라!”는 말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한 몸이 되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또한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는 말은 “이해력을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계속 같이 있으면 약점도 많이 보이고 때로는 지겹습니다. 그래서 이해력이 필요합니다. 즉 동반자의 식성, 성품, 사고방식, 그리고 가치관 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동반자나 동역자가 되었으니까 무조건 자기를 따르라고 하면 안 따라 옵니다. 동반자를 잘 이해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면 늙어서 이사 갈 때 이삿짐 버리듯이 버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동반자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학위는 없어도 행복할 수 있지만 동반자를 알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해력에 감사한 마음을 더함으로 이해력을 이해심으로 발전시키십시오. 자세히 보면 남자보다 여자가 비교적 혼자 잘 삽니다. 하나님이 여자의 평균 수명을 높이신 이유가 다 있습니다. 때로는 여자가 더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은 아내가 아프다면 겁이 덜컥 나고 측은한 생각과 함께 더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깊이 생각하면 자신의 동반자와 동역자가 되어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서 말 한 마디에 상처를 입고 사소한 일도 근심하는 노파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이해력과 이해심을 가지고 동반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젊었을 때 생각 없이 상처를 준 말들 때문에 나중에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별은 큰 사건 하나로 감행되지 않습니다. 작은 상처가 누적되어 불신이 쌓이면 어떤 순간에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그처럼 모든 사람이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거룩한 이해력과 이해심을 가지고 동반자와 동역자를 아껴주십시오.

  
< 은밀한 섬김의 축복 >
  
세상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현재 하나님이 함께 있게 하신 동반자와 동역자입니다. 동반자와 동역자는 천국 삶을 함께 상속받을 자로서 천국 갈 때까지 동행할 평생 동지이자 공동 천국 상속인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축복과 행복을 같이 누릴 이너써클(inner circle)의 일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여건에서 동반자와 동역자를 최대한 귀하게 여겨주십시오.
  
바울은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엡 5:28). 가정과 교회에서 동반자와 동역자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몸을 최대한 아끼고 잘 먹이고 모든 위험에서 철저하게 보호합니다. 그처럼 동반자와 동역자를 최대한 사랑하고 돌봐줄 때 그 모든 행위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축복까지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사랑했기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복종하면서 위대한 가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한 동반자와 동역자 사랑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출발점도 됩니다. 자신의 사랑은 상대방의 헌신으로 그 사랑의 크기가 커지고 더 나아가 그 커진 사랑이 이웃을 향한 나눔으로 발전합니다. 그처럼 사랑으로 동반자와 동역자를 품으면 가정과 교회 전체가 활력을 얻고 그 활력에 사회에도 미쳐서 사회도 점차 건강해집니다. 
  
결국 동반자와 동역자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건강한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만드는 최대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2대 키워드인 ‘복종과 사랑’으로 동반자와 동역자를 최대한 힘써 섬겨주십시오. 그런 동반자와 동역자가 있었기에 저도 이제까지 사역을 잘 지탱시키고 내일의 꿈과 비전을 향해 달릴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꿈과 비전에 대한 의지가 나태해질 때 그 동역자들이 비전을 일으키는 불쏘시개 역할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저는 1996년 신학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 <네트영어>를 개발했습니다. 너무 좋은 줄 알았지만 당시에는 “목회자가 무슨 영어냐?”란 생각이 컸습니다. 그때 네트영어를 알게 된 한 동역자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우리 자녀들이 영어 때문에 너무나 고통이 심합니다. 그 고통을 네트영어가 해결해줄 수 있는데 왜 그냥 썩혀둡니까? 영어를 잘하면 선교 사역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원리를 그냥 썩히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란 얘기였습니다.
  
네트영어 강좌를 들어본 사람들은 영어실력이 탁월할수록 더 감탄합니다. 저도 네트영어 개발 후 지금까지 그냥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목회하면서 틈틈이 네트영어 사전을 만들어 현재까지 1400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네트영어 사전을 만들고 지금도 계속 업데이트를 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네트영어를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이 더 흥분하니까 저도 그 동안 품었던 선교와 나눔의 꿈을 이루게 할 하나님이 주신 도구란 확신이 점차 강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2008년에 몇 명이 투자에 관심을 보이자 한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자본의 투자를 받으면 투자자의 시선 때문에 선교와 나눔을 실천하는데 제약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심 없는 네트영어의 동역후원자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보세요.” 그 말이 하나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그리고 급할 것이 없었습니다. 틈틈이 네트영어의 이론과 자료를 더 구축하면 늦을수록 더 좋은 완성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후 5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온라인 새벽기도를 통해서도 네트영어를 조금씩 설명하며 기도부탁도 했지만 불꽃의 점화시기가 계속 지체되었습니다. 그러자 가끔 투자자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이 목사야! 조금만 더 기다려라! 투자자와 동역자의 차이는 크다. 내가 은밀하게 예비한 사람이 있으니 그때까지 계속 준비하며 기다리라.”
  
그런 내적인 음성들이 없었다면 당장 어디선가 무슨 일을 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이 예비한 은밀한 손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다른 저희 선교연맹 사역들도 그런 은밀한 섬김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잘 지탱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면 네트영어의 불꽃이 점화되어 무섭게 타오르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은밀한 섬김은 누군가를 일으키고 결국 자신도 일으킵니다.
  
장개석이 일본 사관학교를 다닐 때 중국인 학생들은 우월감에 빠진 일본인들의 천대와 멸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청결하지 못한 중국인의 습성 때문에 더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중국인 전용 화장실이 깨끗하기로 유명한 일본인 전용 화장실보다 더 깨끗해졌습니다. 누군가 쥐도 새도 모르게 청소한 것입니다.
  
어느 날, 교장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을 알고 싶어 은밀하게 밤을 새워 지켜보았습니다. 그때 새벽 2시경에 중국학생의 기숙사에서 청소 도구를 든 한 학생이 나오더니 화장실을 열심히 청소한 후 조용히 기숙사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바로 장개석이었습니다. 그때 교장은 주변 선생님들에게 장개석이 나중에 중국을 이끌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누구나 맞출 수 있는 예언을 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장개석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 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북벌에 성공해 국민정부의 주석이 되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하고 싶은 재미있는 일’을 하는 데 있기보다는 ‘해야 할 의미 있는 일’을 기쁘고 은밀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동반자와 동역자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그들을 은밀하게 섬겨주십시오. 지금처럼 남은 죽더라도 나만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때에 복종과 사랑과 섬김과 나눔의 삶을 통해 행복한 가정과 교회를 만들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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