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마 5:9)

첨부 1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마 5:9)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 계용묵( 1935년 <조선문단>) 소설 “백치 아다다”는 소유로 존재 가치를 평가하는 이 시대의 불행한 모습을 깨우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선천적으로 백치에 가까우며, 벙어리인 아다다(김초시의 딸)는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지참금을 가지고 겨우 시집을 가게 됩니다. 처음 5년 동안은 시집갈 때 가지고 간 논이 시집 사람들의 생계를 유지시켜 준 덕에 대우받으며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나 남편이 돈을 벌어 첩을 얻은 뒤부터는 학대가 시작됩니다. 

결국 친정으로 쫓겨온 아다다는 그녀를 끔찍하게 위해 주는 수롱이와 결합하여 신미도에 들어가 삽니다. 그러나 수롱이가 돈을 가지고 땅을 살 계획임을 알자 불안해합니다. 돈은 그녀의 삶을 불행에 빠뜨리는 화근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다다는 땅 살 돈을 바닷물에 던져 버렸고 뒤쫓아온 수롱이는 아다다를 데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신미도라는 섬으로 갑니다. 

수롱이는 아내를 얻기 위해 10년 동안 불피풍우(不避風雨), 모진 바람과 비를 무릅쓰고 품을 팔아 모아 둔 돈 천오백량(당시 밭 2천평을 살 수 있는 돈)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밭을 사자고 합니다. 수롱이의 돈을 본 아다다는 과거의 경험(경제적인 여유가 오히려 남편을 외도하게 했고 결국은 남편의 온갖 구박과 학대를 받게 해서 소박맞은 뼈아픈 경험)을 통해 그것(돈 천오백량)이 자신의 행복을 빼앗아 갈 것이라 믿고, 수롱이가 잠든 틈을 타서 새벽녘에 바다로 나가 돈을 던져 버립니다. 뒤늦게 이것을 안 수롱이가 홧김에 아다다를 발길로 차서 물에 빠져 죽게 합니다.

‘돈을 바다에 내던지는 장면’은 남편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돈을 바다에 내다 버리는 아다다의 순수한 사랑과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인 풍요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다다가 발길에 차여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소유가 존재의 가치를 짓밟는 그릇된 가치관을 고발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소유의 힘이 존재의 가치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그 때 조카 롯도 그와 함께 갔습니다. (창12:5)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복을 받아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다니던 조카 롯에게도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습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은 아브람과 함께 다니게 되어 덩달아 복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롯이 거하는 땅에서는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습니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이 불어나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 때에 아브람이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아브람은 혈육간에 재산 때문에 다투기 보다는 화평을 원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삼촌으로서 기득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조카에게 모든 것을 양보할지라도, 아니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다툼보다 화평을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롯은 자기 눈으로 볼 때 가장 아름답고 물이 풍부하여 기름진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창13:14-17)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재산권, 소유 문제로 골육지친이 다투는 것보다 서로간의 화평을 지키며 사는 것이 더욱 더 가치있다는 것입니다. 화평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화평을 이루기 위해 자신은 얼마든지 소유의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유보다 존재에 가치를 두고 화평을 지킨 것이 아브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화평을 지키고자 모든 기득권을 양보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입니다. 소유보다 존재의 화목을 선택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약 2:23) 이에 경에 이른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성도 여러분 모두가 아브라함과 같이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본래 에덴 동산에는 하나님, 그리고 아담과 하와, 모든 생물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동산 숲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평화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의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평화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므로 이제 인간과 자연사이의 평화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생존원리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 사회도 어느 정도까지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곳에는 어김없이 힘의 논리가 지배하여 인간과의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 모두에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인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도 에덴 동산의 평화를 소망하며 그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사야 11:6-9을 보겠습니다.

(사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세상에 충만할 때” 평화가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는 평화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난 3000년 동안의 인류의 역사에 3500번이 넘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 홍수, 가뭄, 태풍 등의 자연재해는 지금도 계속되는 가운데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한 인간의 부단한 노력가운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첨단을 달리고 있는 과학과 의학이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월등한 경제 이론이나 정치이념이 인간에게 평화를 안겨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참된 평화는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평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찬송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는 십자가로 하나님과 인간,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이룩하시고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엡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과연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인류 평화를 위해 행하신 일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3:5을 보겠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신약성경은 이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엡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인간은 평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한 평화의 길입니다. 예수 십자가가 없는 곳에 인류의 평화는 없습니다. 

(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화평케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 참된 축복이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인류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눅19:41-42)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우신 것이었습니다. 평화의 도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평화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고, 얼마 후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길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평화의 길을 트게 하신 십자가의 예수를 거절할 것을 미리 아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칼타고(Cathage)의 감독 키프리언 (Cyprian)은 258년에 순교당했습니다. 사형선고문이 낭독되자 그는 희열에 찬 밝은 낯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사합니다. 이제야 주님과 완전한 화목을 이루었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에게 죽음도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해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 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케 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신33:29)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먼저 화평을 누리지 못하면 인간 관계의 모든 평화는 일시적이며 참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바탕으로 인간의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과 화목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이제 예수 믿음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평화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 후서5:18-19을 보겠습니다. 

(고후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는 화목의 일에 힘쓰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롬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벧전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는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바로 십자가의 예수를 전파하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자들을 말합니다. 인류의 평화는 예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평화의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바로 ‘평화의 사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막힌 담도 허무는 화목의 길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간곡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바로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17:11-13을 보겠습니다.

(요17:11-13)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가 화목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는 우리들이 하나가 되고 우리 마음속에 기쁨과 평화가 차고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서로 하나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십자가 못박는 정신을 가지고 서로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십자가로 하나 되는 것, 인간과 인간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참된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처럼 십자가로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 5:18)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지 못하면 평화의 세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또한 하나님은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형제와 화목을 이루고 나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5:23-24을 보겠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전 항상 먼저 양심에 거스리는 죄나 형제, 가족 등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신의 그릇된 행위가 생각난다면(막 11:25), 지체없이 화해하고자 하는 노력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없이 살피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다함께 이사야1:10-17을 보겠습니다.

(사1:10-17)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화목하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소흘히 여기지 아니하고 베푸는 생활입니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 항상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에 화평을 이루는 생활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4. 화평을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약점을 이용하여 장자권을 약탈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이같은 일을 당한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여 그 한을 풀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죽기만을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원한(怨恨)을 눈치챈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멀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시킵니다. 형 에서가 품었던 분노가 풀려 야곱의 기만 행위를 잊어버리게 되면 기별하여 돌아오도록 하겠다면 외삼촌 집으로 보냈습니다.

(창27: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그렇게 해서 야곱이 외삼촌 집에 가 무려 20년을 지내며 장가도 가고 자식들도 12아들들이나 얻게 되고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하게 되었습니다. 

(창 31:1)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그런데 야곱이 고향이 가까울수록 심히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아무래도 형 에서가 마음에 걸린 것입니다. 20년 세월이 지났지만 그간 형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가운데 형을 만나게 되면 형 에서가 품었던 분노와 원한이 모두 풀렸는지, 아니면 더욱 더 이를 갈고 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심히 두렵고 답답했던 것입니다.

(창32: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그래서 야곱이 고향으로 가는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나루터에서 하나님 앞에 밤새 기도합니다. 다함께 야곱이 드린 기도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32:9-12입니다.

(창32:9-12)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 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형 에서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보자 아주 밝고 기쁜 얼구로 

“내 동생아”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야곱이 형 에서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33:10) ...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형 에서가 ‘내 동생아’하고 부르는 그 밝은 얼굴에서 따뜻하고 친절한 형제우애를 가지도록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빛을 본 것이었습니다. 복수심에 가득찬 형 에서의 마음을 그처럼 부드럽게 변화시켜 ‘내 동생아’ 하면서 자신을 영접토록 주장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형 에서가 품었던 분노와 원한을 봄 눈 녹듯이 녹아 버리게 하시고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킨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내가 너희 일행을 동행하리라’, 다시 말해 에스코트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창33:12)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이처럼 풀릴 것 같지 않은 분노와 원한일지라도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 화평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삭이 블레셋 땅에서 농사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어 농사지은 그 해에 백 배나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본래 목축업을 하는 사람으로 농사에는 전혀 문외한이었음에도 하나님께 복을 주시어 처음 지은 농사에 무려 백 배의 추수를 거두게 되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창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를 목격하게 된 블레셋 사람들이 몹시 배가 아파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목축업을 하는데 우물은 생명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그 땅에서 떠나라고 협박합니다. 이에 이삭은 군소리없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옮겨 그곳에 목축을 위해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는 그랄 지역 목자들이 몰려와 그 땅은 자기네 땅이기 때문에 우물 역시 자기네 것이라며 강탈해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이삭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사실 아무데나 우물을 판다고 해서 물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자신의 우물을 메워버리거나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며 대들면 그들과의 다툼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던 것입니다. 그리고 파는 곳마다 우물물이 펑펑 터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이 이렇게 손해를 볼지라도 그들과 다툼을 피해 다른 곳에 우물을 팠더니 하나님께서 그 지경을 넓혀 주시고 더욱 더 번성하게 축복하셨습니다.

(창26: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와 같은 일들을 줄곧 지켜보아왔던 블레셋의 아비멜렉 왕이 이삭을 찾아 왔습니다. 자기 땅에서 이삭을 추방했던 그들이 이삭을 찾아와 온 것입니다. 이삭이 “(창26:27)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고 묻자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26:28-29)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간단히 말하면, 아무리 이삭의 우물을 메우고 억지 떼를 써 우물을 빼앗아도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날로 번성하고 창대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조아리고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삭이 그들에게 과거지사를 묻지 아니하고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니, 그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그날 이삭의 종들이 이삭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판 우물에서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창26:32) 이삭의 관용과 화해의 정신에 하나님께서 축복의 우물물이 터져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화평을 위해 양보와 이해, 그리고 관용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풍성히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잠언16:7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또한 잠언 20:3에,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고 했습니다.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것보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입니다.’(잠 15:17)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지혜로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잠 17:1) 

화평은 오직 위로부터 나오는 참된 지혜입니다.(약 3:17) 

화평케 하는 자의 생활로 성도 여러분의 삶이 참으로 지혜롭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어 어디에 우물을 파도 축복의 우물물이 터져 나오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