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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11) : 향유를 부은 마리아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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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사람들(11) : 향유를 부은 마리아 (요 12:1-8)

지난 20일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이웃 사랑 바자회’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헌신하였고 함께 참여해 주었습니다. 해마다 교회에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었는데 적합한 사람을 선정하여 돕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복지가 상당히 향상되어 이제 어려운 사람들도 국가가 제도적으로 잘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었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생활 속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돕게 감동적으로 잘 도와주는 자를 시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보에 광고해 놓은 것처럼 올해는 각 개인에게 2만원씩을 오늘 예배가 끝난 후에 드립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족끼리 모아 서로 상의하여 돕든지, 아니면 개인별로 돕든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체험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 홈페이지 “열린대화”란에 있는 “미담소개”에 사연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도와준 사람의 이름을 실명을 써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 중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도와주신 감동적인 사연을 뽑아 1등은 자전거 2-3등은 18만원 상당의 건강식품, 4-6등은 13만원 상당의 화장품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많이 꼭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대 전통은 구제를 행하는 사람의 구제 방법에 따라 그 선행의 정도를 여덟 단계로 나누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단계의 구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어 그가 사업을 일으키게 하거나, 혹은 그와 동업을 하던지 직업을 구해주어 그가 구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돕는 일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구제하는 자나 구제 받는 자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도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계명을 지키고 상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돕는 자는 자기가 누구를 돕는지 알지만 도움을 받는 자는 누가 돕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상대가 부끄러움을 덜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기를 돕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나 도움을 주는 사람은 누구를 돕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도움 받는 사람이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자기의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 부끄러움을 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도움을 요청받지 않았으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경우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어려운 사람의 요청을 받고 직접 돕는 단계입니다. 

일곱 번째 단계는 자기가 도울 수있는 양보다 적은 양을 돕되 기쁜 마음으로 돕는 경우입니다. 

여덟 번째 단계는 무뚝뚝한 태도로 돕는 경우입니다. 

히브리어로 구제를 “쩨다카”라고 합니다. 원래 '의 (Righteousness)' 또는 '정의(Justice)'나 공의(Justice)를 뜻합니다. 구제는 공의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의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대인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구제에 참여 하여야 합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구제에 쓰는 것이 보통 수준이고 이십분의 일이나 그 이하를 구제에 쓰는 사람은 인색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십 분의 오를 쩨다카에 쓰는 사람은 최선을 다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십 분의 오 이상을 구제에 쓰는 것은 권장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구제 대상의 선정에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제일 순위는 아내, 남편입니다. 제이 순위는 자녀들 중의 미성년자들입니다. 자기 가정에 어려움이 없다면 가정 밖의 사람들을 돌아봅니다. 자기 가정 밖의 제 일 대상은 부모님입니다. 그 다음은 장성한 자녀들, 자기의 형제자매들, 가까운 친척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의 가난한 이웃들 등으로 확장합니다. 

유대인의 집에 가면 어느 집에 가던지 쉽게 동전함을 발견할 수 있는데 구제를 목적으로 만든 이 동전함을 가리켜 ‘푸슈케’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의 용돈을 아껴 푸슈케에 넣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들은 푸슈케에 떨어지는 동전소리를 들으며 누군가가 이 돈으로 도움을 받으리라 확신한다고 합니다. 

푸슈케는 가정뿐 아니라 회당, 또는 유대인 학교에서 쉽게 발견된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촛불을 밝히기 전 각각의 유대인 가정에선 동전을 푸슈케에 넣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어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것을 모아 자녀들에게 가장 적합한 사람에게 가장 좋은 방법으로 구제하게 하여 경제 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구제를 임무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민족이 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쁜 일하기보다 좋은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작은 돈이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열린 교회 식구들이 모두 감동적인 구제에 동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구제에 기념될 만한 일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는 돈 문제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9일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한센씨 병자였다가 치료를 받은 시몬의 집에 가서 잔치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와 누이 마르다, 마리아가 참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깨어 예수님께 부으신 것입니다. 당시 노동자 1일 품삯이 1데나리온이니까 약 3000만 원쯤 되는 거금입니다. 이것을 보고 가룟유다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5절 보세요. 낭비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자기 이기심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두 사람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평가하시기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1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 물질, 시간, 재능 등을 통해 사람을 만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습니까? 아니면 기념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습니까? 

오늘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가족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자녀들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날마다 말썽만 부리면 부모에게 피해를 주고 세상에 악을 행하다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아니면 부모님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기념이 될 만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습니까?

직장에서 "이 사람은 차라리 우리 회사 직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회에서 "이 사람은 차라리 우리 교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가정에서 "이 아이는 차라리 우리 식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 딱 한 번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기념될 만한 인생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린교회에서 열린교회의 후대 신앙인에게 기념될 만한 인물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장이 있는 한 직장에서 기념될 만한 인물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정에서 대대손손에게 기념될 만한 인물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여인이 기념이 될 만한 인물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의 헌신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을 발을 닦은 것입니다. 

1. 우리는 내게 주신 것으로 주님께 헌신함으로 기념될 만한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헌신의 대상) 

헌신은 헌신에 대한 대상이 중요합니다. 누구에게 헌신하느냐에 따라 기념이 될 수도 있고 차라리 낳지 않았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헌신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 탐욕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값진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입니다. 자신의 형제 나사로가 예수님을 통해 살아났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목숨과 3백 데나리온을 바꾸겠습니까? 생명을 살려준 분에게 그것은 낭비가 아니고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다부어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은혜를 모르는 가룟 유다에게는 허비로 보이고 쓸데없는 낭비로 보이고, 제자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는 장례를 준비한 것이 된 것입니다. 구속사를 성취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7절 보십시오. 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8)”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은 어떤 경우도 낭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인생을 투자하는 것, 예수님께 물질을 드리는 것, 예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될 때 1893년 캐나다인 에비슨 박사가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병원을 설계토록 했습니다. 비용은 당시 돈으로 1만 달러 정도가 소용될 예정이었습니다. 선교부에서 일부 사람들은 병원을 짓는데 너무 큰돈을 허비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작은 병원 여러 개를 짓는 것이 낫다는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비슨은 누가 뭐라해도 흔들리지 않고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초교파 해외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때 바로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지배인이던 세브란스가 감동을 받아 1만 달러를 헌금을 한 것입니다. 마침내 한국 최고의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1904년 11월에 개원하게 된 것입니다. 세브란스 병원이 있는 한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기념이 될 것입니다. 그것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사용했으면 누가 기념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헌신은 낭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해 최신의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내가 일주에 천만 원씩이 들어가는데도 계속 치료를 하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쓸데 없는 낭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낭비가 아니라 마지막 헌신입니다. 예수님보다 돈을 좋아 하는 가룟 유다의 눈으로 보니까 허비입니다.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지도 않고 관계를 가지지도 않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허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짓는 것 낭비라고 합니다. 왜 어려운 사람들 돕지 쓸데없이 교회 건축에 돈을 소비하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자신들은 기부도 하지 않으면서 욕하는 것입니다. 

기부 후원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종교적 성향의 분포를 살펴보면 개신교 47.5%,천주교 11.1% 불교 7.3%로 기독교인들이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강철희 논문). 미국 기독교인은 99% 돈, 재능 시간 기부하는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기독교 전문 조사업체 바나그룹). 

세계 선교를 하는 것, 이웃을 구제하는 것 낭비라고 봅니다. 주님의 일 하는 것 낭비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 청소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것 부려먹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여인을 비난하는 자들은 주님과 무릎을 맞대고 함께 말씀을 듣던 무리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헌신은 어떤 헌신이든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헌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는 온 천하에 알릴 기념비적인 행동이었다고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사람의 비난보다는 주님으로부터 칭찬 듣는 일이 좋은 일입니다. 경제 원리에 맞지 않아도 주님이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비난해도 주님이 인정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는 것 절대로 손해가 아니고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 우리의 물질, 우리의 건강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갚아주십니다. 주일 날 예배하는 것, 낭비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부한다고 예배를 낭비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새벽 기도회를 낭비로 생각하시며 새벽 기도회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시간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1924년 제 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영국의 에릭 리들은 100m 경기의 금메달 유망주였습니다. 그러나 경기 일정이 주일 오후로 잡히자 즉시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며 그를 가리켜 "조국을 배반한 위선자".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이라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했답니다. 국민들의 비난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체 출전을 포기하고 그날을 평소처럼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하며 온전히 주님께 드렸답니다.

에릭의 이러한 결정은 주님을 위한 헌신적 결단이었습니다. 며칠 뒤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닌 400m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답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마다 "저렇게 달리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 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답니다. 결국 그는 예상치 못했던 세계 신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에릭 리들은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처음 200m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한 주일 성수 신앙관으로 영원한 기념비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2. 우리를 헌신할 수 있을 때 그 기회를 잃지 않고 헌신하여 기념될 만한 인생으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헌신의 기회)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칭찬을 해 주셨겠습니까? 마리아는 정성을 다해 준비한 그 값진 향유를 부음으로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였다고 예수님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7) 유대 지방에서 향유를 붓는 것은 손님이 집에 오면 땀을 흘리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몇 방울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게 되면 시신을 잘 닦은 후에 향유를 온 몸에 골고루 바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것을 몇 차례 예고 해 주셨는데 그 말을 기억하고 주님께 향유를 부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행동이 바로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그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것을 믿고 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것은 단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기회였습니다. 이 기회를 마리아는 잘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분을 내어 허비한다고 합니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아 주는 것이 가치 있고 경제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항상 있는 것과 항상 있지 않은 것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기회를 잘 포착하라는 말씀입니다. 헌신도 기회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헌신은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잃지 말고 인생을 주를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기념이 될 만한 헌신을 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면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으러 달려갔지만 붓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마가복음 16장).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 한번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십자가로 가시기 불과 9일 전일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이 때 예수님께 사랑의 표현을 드리지 못하고 주님의 임종의 소식을 접했었더라면 평생 뼈저린 아쉬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녀는 기회를 잃지 않았습니다. 살면서 기회를 잃지 않고 헌신하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시던 날 밤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가지고 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드리고 경배를 하였습니다. 
벳새다 들녁에서 한 소년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려서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마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위하여 마지막 유월절 만찬장을 준비하여 예수님께서 12제자와 함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 나귀를 드린 무명의 사람도,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 내어준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시몬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단 한 번 밖에 없는 기회를 잘 활용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념이 된 사람들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과 올라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명의 제자들은 기도해야 할 기회를 그만 잃어버렸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지만 잠만 자다 결국 다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기도할 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습니다.

기회는 뒷걸음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구역장님들과 수련회를 가는데 휴게소를 들렸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잊을 때 잘해.”라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유행가지만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미하다고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신문에서 '연탄 할아버지' 한 장당 10원씩 장학금 기부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70세 할아버지인데 연탄 배달해 번 돈의 10% 3년 동안 796만원 장학금은 내 놓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연탄 1장당 375원에 공장에서 떼어와 500원에 판답니다. 주유비· 인건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돈은 1장당 100원 그 중 10원을 장학금으로 기부한다고 합니다. 

자신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강원도 평창에서 자녀 2명을 다 기른 후 67세 되던 해 뉴수에서 '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둔다.'는 기사를 보고 어릴 때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기부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우리 형편에 남을 어떻게 돕느냐"고 반대했답니다. 90세인 노모를 모시고 세 식구가 먹고살기도 빠듯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강 할아버지는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도 배우지 못해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나 같은 사람은 더는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답니다. 그는 "요즘 사람들이 10원짜리를 우습게 아는데 10원도 모이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는 큰돈"이라며 "내 땀 흘려 버는 돈으로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돕는다는 생각만 하면 매일 아침 눈이 절로 떠진다."고 말했습니다. 

때때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좋은 기회 만나지만 놓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부가 될 수 있는 기회,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는 기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기회, 승진할 수 있는 기회, 좋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기회, 봉사할 수 있는 기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 사랑할 수 있는 기회, 용서할 수 있는 기회, 헌신할 수 있는 기회,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는 기회. 기념비적 인생을 살만한 기회,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으로 헌신할 기회가 있을 때 헌신하여야 합니다. 기도로 헌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여야 합니다. 재능으로 헌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여야 합니다. 물질로 헌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여야 합니다. 찬송으로, 예배로, 섬김으로, 전도로, 아름다움으로, 헌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여야 합니다. 때가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직장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남편과 아내를 위하여 자식과 부모를 위하여 기회 주어졌을 때 헌신해야 합니다. 기회를 활용하여 하늘의 창고에 보화를 쌓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으나 하나님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주의 이름으로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해야 합니다. 아내를 주의 이름으로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주의 이름으로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효도하여야 합니다. 자녀들을 주의 이름으로 잘 양육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잘 양육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회를 직장을 가정을 주의 이름으로 섬길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섬겨야 합니다. 


3. 우리는 열정적으로 헌신하여 기념될 만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헌신의 열정)

적당한 헌신은 감동이 없습니다. 80도시 물로는 기차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마음 없는 헌신은 가증하게 보입니다. 진심 없는 헌신은 위선적으로 보입니다. 열정적인 헌신이 기념이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300 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었다고 했습니다. 향유 삼백 데나리온 어쩌면 그것은 그 여인의 전 재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서민들의 전 재산이 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준비하는데 10년이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결혼하기 위하여 준비한 것일 줄도 모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 헌신하였습니다. 기름을 바르는 방법 세 가지 중에 최선을 택하였습니다. 바르는 것, 부으는 것, 그릇을 깨어 드리는 것 중에 그릇을 깨어 전폭적인 헌신을 한 것입니다. 위대한 분에게 드렸으니 오직 그분에게만 드리고 그 그릇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깨어 버린 것입니다. 

마리아가 왜 이렇게 힘을 다해 주님께 자신의 것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는 기록을 봅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병들자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11:3)라고 전하게 할 만큼 이들 남매들은 예수의 사랑을 느끼고 보답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리 값진 것일지라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에 난 두 손 없는 소금장수 이야기입니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수십 채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 들이 포대가 놓여 있곤 했답니다. 13년째 아무도 누군지 몰랐답니다. 그런데 '범인'이 잡혔답니다. "나 혼자 여러 해 동안 소금을 나르다 보니 힘이 들어서" 읍사무소에 맡기겠다고 소금을 트럭에 싣고 그가 자수했답니다. 서산 부성염전이라는 소금밭을 짓는 소금장수 강경환 씨 이야기입니다. 

그는 1972년 12월 24일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은 6학년 때 해변에서 '안티푸라민' 통을 닮은 깡통을 발견해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길래 그걸 떼내 가지고 놀겠다는 생각에 돌로 깡통을 두드려답니다.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지뢰(발목지뢰)인 줄 모르고 두드렸다가 그만 손목 아래 두 손이 사라졌답니다. 3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어머니가 밥 먹여주고, 소변 뉘어주며 살았다고 합니다. 모든 게 귀찮아서 농약 먹고 죽으려고 한 것만 두 번이라고 합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주막에 출근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모든 게 귀찮았어요. 술로 살았죠. 괴로우니까.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어요. 주막에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가서 그런 거나 먹고 살았죠." 

그런데 술을 처먹고 집에 온 어느 날 밤이었답니다. 책상에 유인물이 하나 있기에 무심코 봤다가 휙 던져버렸답니다. "아침에 유인물을 보니까 정근자씨라고, 팔 둘이랑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강의를 한다는 거예요. 가서 들었죠. 야,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반도 아닌데, 이 사람같이 못 살라는 법 없지 않나…." 

그 후 그는 변했답니다. 그는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술을 끊고, 일을 하기 시작했답니다. 삽질을 익히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답니다.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였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내의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하루 2시간 잠을 자며 염전을 일구었답니다. 그는 손을 잃은 대신에 얻은 사랑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소금 한 포대가 1만 원가량 할 때 1000원을 떼서 모았다 불행한 사람들을 도왔답니다. 그는 말합니다. "조금만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겁디다. 소금 한 포대 팔아서 1000원 떼면, 5000포대면 500만원이잖아요. 하나를 주면 그게 두 개가 돼서 돌아오고, 그 두 개를 나누면 그게 네 개가 되어서 또 나눠져요. 연결에 연결, 그게 사는 원리지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사람이 무엇이든 성공하려면 두 가지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는 성실입니다. 또 하나는 능력입니다. 이것들은 열정에서 나옵니다. 사랑은 열정을 만들어 내고 이 열정이 기념비적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열정 포트폴리오"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들은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넬슨 만델라, 지미 카터, 달라이라마를 위시한 세계적인 기업가, 정치가, 학자, 작가, 음악가, 크고 작은 기업의 CEO들, 퓰리처상이나 아카데미상 수상자들, 교사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 노벨상 수상자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성공한 전 세계 200여 명의 사람들의 인생을 통해 지속적인 성공 비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0년에 걸쳐 이들을 인터뷰한 결과 저자들은 이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행동과 사고방식의 패턴을 찾아냈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점을 도출해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열정'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밀그램은 단 세 사람만 있으면 최종적으로는 거대한 집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불러 훈련시켰지만 그 중 3명과 중심적인 사역을 합니다. 그들은 1세기 역사를 변화시켰으며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때 12지파를 통하여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지만 선봉장에 서서 적을 섬멸하며 땅을 점령하는데 앞장 선 지파는 세 지파였습니다. 세 명의 수가 작은 수가 아닙니다. 열정을 가진 세 사람이면 수많은 군중을 모을 수 있습니다. 물이 100도가 되어야 증기기관차를 움직이든 열정을 가진 세 사람이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인류가 누리는 역사적 산물이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작품입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열정은 세상에 기념비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대표적인 공통점입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정열적으로 작곡했습니다. 그는 최소한 하나의 곡을 열 두 번 이상 다시 썼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8백 개 이상의 곡을 작곡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8년 동안 무려 2천 번이나 스케치했다고 합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어떻게 하면 슈퍼스타를 키울 수 있나"를 알아보기 위해 스포츠, 과학, 예술 부문에서 뛰어나게 이름을 떨친 사람들 120명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답니다. 결과는 그들을 키운 대부분의 부모는 열성파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부모는 보통 부모보다 월등히 많은 시간과 정성을 아이에게 쏟았다는 것입니다. 무딘 화살촉은 과녁을 뚫을 수 없습니다. 

주를 위한 헌신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주를 위해 사는 삶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막14:6)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기념해 주었습니다(막14:9). 벳새다 들녁에서 한 소년의 5병2어의 헌신은 아이와 여자를 제외하고도 5천명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는 큰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예비한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헌신은 그의 아들 마가로 하여금 바울과 함께 세계선교를 하게하고 복음서 중에 최초로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헌신은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됩니다.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힘, 강퍅한 마음을 녹이는 힘, 교만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 나태한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됩니다. 

세상에는 헌신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힘도 많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조명 받는 자리가 아니라 헌신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헌신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3-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는 것 절대로 손해가 아니고 낭비가 아닙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을 향해 시간을 드려 예배드리는 것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청소하는 것, 식당에서 봉사하는 것, 김치 하나 해오는 것, 성도들을 차로서 봉사하는 것,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 전도하는 것, 남모르게 교회의 어려운 일을 말없이 감당하는 것, 힘든 이웃을 향해 격려의 말 한마디 해주는 것, 옆에 안은 교회 식구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던져주는 것,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이름도 빛도 없이 물질로 시간으로 재능으로 몸으로 봉사하는 것, 지나가는 걸인에게 구제의 손길을 펴는 것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상급으로 쌓이는 거룩한 투자입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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