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거의 죽은 자와 이웃 (눅 10:25-37)

첨부 1


거의 죽은 자와 이웃 (눅 10:25-37)


다음 달에 6·25기념일이 다가오는데 어제 북한이 단거리 발사체를 동해상으로 발사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사실 6·25 전쟁은 불법침략인 것이 온 천하에 알려졌는데도 북한에서는 분단국가를 통일하려는 민족주의 통일전쟁이었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 옐친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옐친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두 가지 최고의 예우를 했습니다. 하나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최고의 요리를 대접했습니다. 그 요리가 귀머거리 새 요리입니다. 

러시아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종 귀머거리 새가 있는데 그 새를 잡아서 요리를 하면 그 희귀성 때문에 그토록 높은 평가를 하는 요리입니다. 이것은 평민들은 구경도 못하고 아주 특별한 고관들이나 먹어본 경험이 있는 요리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제비집 요리를 높이 평가하는 것과 비슷한 음식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6·25 전쟁 비밀문서를 옐친 대통령이 김 대통령에게 공개해버렸습니다. 그것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 내용이었습니다. 그 문서가 공개되었습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친 계획을 내놓으니까 스탈린의 대답이 “미국이 개입하면 실패한다. 어떻게 하겠느냐?” 그랬더니 “미국에서 한반도까지 군인들이 오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남침 계획은 8일이면 완전히 끝나는 전쟁입니다. 더구나 남한에는 30만의 지하 노동당원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 전쟁은 삽시간에 끝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탈린이 승낙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밤중 전화보고를 했습니다. 

“한반도에서 지금 이런 일이 터졌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 보고를 받고 국회소집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미군 파병을 지시했습니다. 사실 트루먼의 신속한 결단 때문에 한국은 살아났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8일 만에 부산까지 점령당할 뻔했습니다.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지 않습니까? 나중에 소집된 국회 안보회의에서 “왜 대통령 혼자서 그렇게 중대한 결정을 밤중에 혼자 했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연합국이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아니했느냐? 실수는 한번으로 족하다.” 그렇게 당당하게 대답을 해서 한국전에 참여했습니다. 지금 한반도의 문제는 온 세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데 가장 큰 이유가 북한 통치자가 국정 통치 능력이 없는 철부지 청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한반도와 옛날 6·25를 기억하면서 오늘 성경말씀으로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르쳐서 보통 “사마리아 선한 사람”이라는 제목이 나왔고, 이로 인해서 많은 종류의 해석, 또 기독교인의 의무, 불필요한 책임추궁의 논리까지 이 말씀을 통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적 교훈이 어떻게 보면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나 인도주의 의무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이 평가됩니다. 불쌍한 사람에 대한 자비나 구제가 중심이 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적 교훈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밝혀봅시다. 오늘 이 비유는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온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사의 질문이 사회적 책임이나 인도주의를 물은 것이 아니고 영생의 문제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생의 문제에 대한 답변을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 자체에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율법사가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가?’입니다. 정말 자기가 모르는 어떤 문제를 알고 싶어서 겸손히 배우려고 예수님을 찾아왔는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 첫 절에 나와 있습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려고” 이 이유 때문에 온 것입니다. 율법사는 유대 사회에서 제일 유식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율법사 앞에서는 아는 체를 못합니다. 잘난 체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식의 우월성을 넘어서 종교적 우월성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사 앞에서 유대인들은 쩔쩔 맵니다. 그런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율법의 교사라고 했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교만에 가득차서 예수를 한번 만나 골탕을 먹이려고 1대1로 찾아온 것입니다. 

“당신은 나사렛 산골의 율법 학교도 못 다닌 무식한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일반 대중을 몰고 다니면서 잘난 체하고 설교를 하고 떠드느냐? 내가 질문하는 것에 대해서 한번 대답하라.” 망신을 주려고 덤벼든 것입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시험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영생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유식한 우월성을 가지고 예수를 망신 줌으로 대중에게 나타내 보일 계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아시기 때문에 율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했느냐?” 그랬더니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얼마나 대답을 잘합니까?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나한테 물었느냐? 네 대답이 옳도다. 맞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끝나야 됩니다. 질문과 대답이 아주 훌륭하게 잘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가 또 잔머리를 굴립니다. 이상한 질문을 또다시 했습니다. 

29절에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 이 질문도 이웃을 알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솔직히 문제아요 당시 종교인의 고질병 환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종교인들의 그 그릇된 신앙관을 깨우치려고 두 번째 대답,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을 하시게 된 것이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첫째 질문이 영생에 대한 이야기는 질문과 대답이 완벽하게 종결되었습니다. 구속적 질문은 이웃 설정에 대한 답변인데 영생을 얻은 자의 이웃에 대한 정의를 예수님이 설교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배경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본문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는 강도를 안 만납니다. 왜냐하면 이 여리고는 곡창지대입니다. 주변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황무지인데 비해서 여리고 땅은 얼마나 곡식이 잘 생산이 되는지 모릅니다. 제가 여리고에 갔을 때도 산 계곡을 내려가면 벌써 눈에 새파란 채소밭이 여리고에 아주 가득하고 과일이 아주 산더미같이 쌓여있고, 바나나 나무가 즐비하게 들어서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시도할 때 왜 여리고성을 함락시켰습니까? 다른 데로 들어가면 지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구태여 굳게 닫혀있고 지키는 여리고성을 찾아서 전쟁을 했습니다. 거기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나는 끊어지고 농사지어서 먹어가면서 전쟁을 해야 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데 여리고성이 첫째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농산물을 길러서 당나귀에 싣고 산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에 팔러 갑니다. 

예루살렘의 식탁은 여리고의 농산물로 채워집니다. 그러면 팔고 돌아오는 길에는 돈이 있지 않습니까? 인적이 드문 산 계곡을 돈을 지니고 지나가니까 강도들은 그것을 빤히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산속에 숨어 있다가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돈을 빼앗아가는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그 문화를 배경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기 나타난 강도들도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등장하는 몇 사람을 우리가 조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 때 세 가지를 늘 관계하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물질입니다. 강도에 대한 평가를 해봅시다. 이 사람이 살아가는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웃은 더 무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물질만이 소중합니다. 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웃을 살인해버리고 돈만 가지고 사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다.” 이렇게 말해서 유명한 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노릇을 하는 현대인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이버 공간에 살면서 느끼는 것이 야스퍼스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몰아내고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앉아있는 것과 똑같이 인간이 만든 기계들이 인간을 몰아내고 인간 자리에 앉아서 명령을 합니다. 기계가 시키는 대로 사람들이 순종합니다. 지금 이 강도는 하나님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계명이고 뭐고 다 필요가 없습니다. 이웃 같은 것은 필요에 따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가장 고귀하다. 이것을 내가 취해야겠다.” 처음에 이 율법사는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 대답에서 하나님과 이웃이 나타났습니다. “영생을 얻은 자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고귀한 인격대우를 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지금 이 강도는 강도라고 하는 사회적 문제아가 바로 영생과 관계되는 하나님과 이웃을 완전 무시하는 행동으로 그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생명을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인데 비해서 이 강도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의 귀신이 되어 영이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강도만난 현장을 제사장과 레위인만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전문적 종교인을 등장시켜서 이 예화를 말씀하셨는가? 바로 질문한 율법사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질문의 목적이 진정한 이웃을 발견하려는데 있지 아니하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종교가 다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지금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으로 믿으나 이웃을 잊어버린 상태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웃을 도와준다는 것은 나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서 할 수도 있는 일이고 어떨 때는 할 수 없는 일도 있고 그렇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열일 제쳐놓고 무조건 가서 도와주어야 한다면 그 자체가 더 무서운 율법이 됩니다. 그것은 할 수 있을 때가 있고 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에 초점을 두신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웃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전문 종교인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쓰러진 강도 피해자를 돌보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는 것은 그들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 율법은 피는 절대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죽은 시체를 만지는 것도 절대 부정이라고 취급합니다. 그 율법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율법사를 놓고 그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 강조하는 그 율법은 잘된 율법이냐? 그리고 그 율법에 충실하던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냐? 혹시 너희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율법 근본정신은 다 잊어버리고 율법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냐? 너는 율법의 선생이 아니냐?” 그리스 신화 가운데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를 학창시절에 다 읽었습니다. 나르키소스는 미남 청년입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느 날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에 너무나도 도취되어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침식을 잊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못의 한 송이의 수선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인들이 간혹 자기도취에 빠져서 세상을 부정하다고 피하고 이웃을 멸시하는데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렇게 되었다. 너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전문 종교인을 예로 든 것입니다. “너 같이 영생의 문제를 잘 아는 사람이 가져야 할 이웃에 대한 율법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격 대우해야 될 일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지금 나를 찾아온 목적이 너의 그 지식을 통해서 나를 한번 보기 좋게 망신을 주고 너의 그 유식한 율법의 힘으로 많은 사람에게 너를 옳게 보이려는 과시가 필요해서 나를 이렇게 찾아온 것이 아니냐? 그게 율법의 정신이냐? 너희들의 종교는 병들어서 이 죽어가는 사람과 같이 거의 죽게 된 종교이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진 이 환자 같은 너희들의 종교를 나는 복음으로 새롭게 하려고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관심을 가질 일은 왜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을 선하게 조명하셨는가? 그러면 그 시대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사람과 같이 정말 다 훌륭한 시민이요 종교인이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서 끝까지 덤벼들고 있는 이 율법사의 마음속에 사마리아 사람은 절대 이웃이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 길러온 여인에게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하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이 깜짝 놀라서 “당신은 유대인 남자가 어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거기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치 아니함일러라.” 그 율법사에게는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갖다 붙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 쓰러져서 강도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은 유대인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을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고 있을 때 유대인이 지나가다 봤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를 돌보는 것이 율법에 어긋납니다. 그래서 레위인과 제사장이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율법의 기초에 의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은 그 상태가 거의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이 유대인이 의식이 있었다면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할 뻔 했습니다.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인 것을 알 때에 절대 거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마 큰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여보시오! 비키시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을 받겠소?” 이런 관계입니다. 이웃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성의 이웃의 사랑의 문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월성과 열등감의 벽을 넘어서야만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상대가 유대인인데 괜찮을까? 내가 도와주고 더 큰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나?’ 그러나 그는 그 현장에서 자신의 열등감을 초월했습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주는데 경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이다.” 이 말씀은 불쌍하게 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영생의 문제를 질문한 율법사가 하나님 말씀의 비중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것인데 문제의 갈등은 “이웃이 누군가?” 이웃을 가르쳐주시는데 복음의 성격이 들어있는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요 문제는 이웃이라는 관계 설정이 분명해져야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는 사랑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분명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종교의 우월성도 집어던지고 사마리아인의 열등감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라. 그래야 너희는 서로 이웃이 된다.”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웃이 안되면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암시가 이 예화 속에 들어있습니다. 

여기서 조명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조명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피를 흘려 거반 죽게 된 사람은 지금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택함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선택해서 온 세상을 이웃으로 삼아 구원의 빛을 비추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 앞에서 예수를 시험하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이 율법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야훼 종교가 거반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본래 율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온 세상의 이웃을 다 끊어버린 상태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데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보셨습니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이웃이 아니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예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죽게 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죽게 된 종교를 생명의 종교로 회복시켜야 되는 사람들이 유대 사회에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너 같은 율법사이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다. 만약 너희들이 자기희생을 지불하고 나선다면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 다 성취될 수 있는데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다. 피해서 도망가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병든 신학의 주인공이 되어있다. 그러니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겠느냐? 그래서 나는 그 죽게 된 환자를 살리려고 새로운 처방을 가지고 온 것이다. 복음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거의 죽어가면서도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늘 말씀의 지역이 예루살렘과 여리고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의 본 고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을 향해서 마태복음 23장에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것이 예루살렘이다. 그게 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너 같은 율법교사가 이 거의 죽게 된 하나님의 생명의 종교를 살려내야 되는데 피하여 도망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킨 것이다.” 지금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종교를 전파하는 자 중에 유대인은 없습니다. 다 이방 사람들이 구원의 빛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배척하는 종교 율법사라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자가 하는 일이 기껏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율법 지식으로 예수를 시인하여서 자신의 우월성을 돋보이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사는 거반 죽게 된 종교 지도자!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믿으면 그 율법사와 같이, 또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누구인가? 

우리가 남한과 북한을 인종적으로, 또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객관성 있는 평가로 세계가 인정하는 결론이 나 있습니다. 북한은 지금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가 거의 죽었습니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처방을 해서 살려내야 합니다. 인간 행복의 가장 기본적 조건인 식량 문제도 거의 죽게 된 환자 상태입니다. 북한을 40번이나 드나들면서 밀가루와 의약품을 전해주는 선교사 한 사람이 제 주변에 항상 20년 동안 계십니다. 항상 저를 찾아오십니다. 두주 전에도 찾아오셨는데 “제가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일주일 되었습니다. 

제가 다닌 40번의 평양 방문 가운데서 지금이 최악의 상태입니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누군가는 빨리 가서 살려야 할 거 아닙니까? 정치 제도는 3대 세습이라고 하는 현대 사회 보기 드문 악습을 이어온 거의 죽게 된, 그래서 많은 이웃들이 거의 된 그 환자를 살려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환자는 자신의 환자 됨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사에게 제일 힘든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의 경우에 다른 점은 이 사람은 강도를 만나 타인에 의해서 거의 죽게 된 형편이고 북한은 돌로 자기 몸을 상하고 있는 귀신 들린 사람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환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왜 인정을 안 하는가? 그의 손에 이상한 무기 하나가 들려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에 강도 만난 자는 건강하게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웃의 도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말하기를 개성 공단은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 30만 명이 날마다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낙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30만의 밥상을 도깨비 노릇을 해서 뒤집어엎어 버렸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간식으로 나누어주는 라면 한 봉지와 초코파이를 들고 가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는 그 불쌍한 주민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깨비장난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종교를 만든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거의 죽게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 북녘 땅에도 이 말씀이 적용이 되어서 그들에게도 따뜻한 빵과 자유가 부여되는 날이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의 계획대로 하루속히 올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의 이웃이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나이다. 자체 안에 있는 강도가 그렇게 쓰러뜨렸습니다. 이제는 외부의 누군가가 가서 처방을 하고 그를 살려주어야 될 지경이 되었나이다. 아무 죄도 없는 북한 주민들을 주님이 불쌍히 여기사 그러한 구원의 길이 속한 시간 안에 그 땅을 비추는 하나의 희망의 주님 선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렇게 긴장 상태가 고조된 한반도가 온 세계에 평화를 선포하는 축복의, 그리고 평화의 한반도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