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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탕자의 귀향! 아버지의 환영!! (눅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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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아버지의 환영!! (눅15:11-32)

유명한 탕자의 비유이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다. 누가 탕자일까? 
귀향하는 탕자를 환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누가 귀향하는 탕자일까? 

1. 작을 아들- 집을 떠난 탕자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다. “아버지여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무슨 뜻인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유산을 달란다. 분명히 탕자이다. 
아버지가 허락하신다.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에 머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아들을 집에 묶어두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사랑은 강제가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며칠이 안 되어 먼 지방으로 가서.” 마음도 몸도 떠난다. 
왜 집을 떠나는가? 내가 원하는 집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아버지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사랑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 
아버지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실증이 난다. 관심이 없다. 있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집을 찾아 떠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내가 관심 있는 것을 찾아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떠난다. 이런 일이 순간순간 마음속에서, 생활 속에서 일어난다. 탕자의 모습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추구한 행복이 무엇인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한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추구한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흉년이다. 궁핍이다. 돼지가 먹는 것도 마음껏 먹지 못한다. 자유를 누리는가?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을 당한다. 
모든 것을 가진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상실했다.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줄 알았는데,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모든 것, 모든 사람에게 단절되었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죽음 외에 생각할 게 없는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새로운 발견을 한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자아의 재발견이다. 나는 아들이다. 거지같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자녀이다. 자녀 구실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자녀이다. 
돼지 주인은 나를 돼지만큼도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돼지만도 못한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자녀이다. 

탕자의 이 깨달음이 죽음대신 살 길을 선택하게 한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귀향을 선택한다. 
탕자의 귀향은 자기가 자녀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아버지께 돌아가고 싶은 소원이 일어난다. 
아버지 없는 자유보다 아버지 안에 있는 속박이 더 좋게 생각된다. 
망설임 속에서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탕자의 귀향이다. 

그러나 귀향하는 탕자의 마음이 여전히 불안하다. 왜 불안한가? 아버지에 대한 오해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오해이다. 나는 아들 자격이 없는데...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 
그래서 아들이 아니라 일꾼으로 받아달라는 것이다. 19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탕자의 회개는 자기중심적인 회개이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근거한 회개가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망설임이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의 신분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시려고 하신다. 그런데 나는 자격이 없으니, 부족하니 일꾼으로 남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조건적인 사랑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누구인가? 아버지 보다 다른 게 좋아서 집을 떠난 탕자는 아닌가?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2. 큰 아들- 집 안에 있는 탕자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어떤 아들일까? 
큰 아들은 여전히 집에 머물러 있다. 아버지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 동생이 귀향했다.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베풀었다. 소식을 들은 큰 아들은 기뻐하지 않는다. 달려가서 동생을 끌어안지도 않는다. 잔치가 벌어진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분노한다. 
어떤 아들인가? 몸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데, 마음은 아버지와 먼 아들이다. 그도 탕자이다. 집 안에 있는 탕자이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한다. 29절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함께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왜 불평하는가? 
동생과 비교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나는 열심히 노력했다. 오랫동안 많은 일을 했다. 

그런데 왜 수고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손쉽게 얻는 것을 나는 얻지 못하나? 
수고한 나는 건강하지 못한데, 그들은 건강하다. 열심히 헌신한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그들은 넉넉하다. 수고한 나는 관심 받고 인정받지 못하는데, 탕자 같은 그들은 관심 받고 사랑 받는다. 순종하고 섬기는 나는 소외당하고, 탕자 같은 그들은 환영받는다... 

왜 원망하는가? 대가를 바라는데 그 대가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가를 바랄 자격이 있다. 동생은 대가를 바랄 자격이 없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격 없는 동생에게는 송아지를 잡아 주고, 자격이 있는 나에게는 염소 새끼도 안 준다. 
상대적인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실감은 질투와 비판, 분노와 원망으로 나타난다. 

30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탕자가 된 큰 아들에게 더 이상 동생은 없다. 아버지도 없다. 아버지도 동생도 큰아들에게는 낯선 이방인들이 되어 버렸다. 동생을 멸시의 눈으로 내려다본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죄인! 아버지를 원망을 가지고 올려다보고 있다. 염소새끼 한 마리도 상으로 주신 않는 냉혹한 주인! 큰 아들은 집 안에서 탕자가 되어 버렸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집에 거하는 기쁨을 전혀 맛보지 못했다. 
왜?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사랑 없는 순종과 책임이 무거운 짐이 된다. 사랑 없는 섬김은 종살이가 되고 만다. 
그러니 누리고 있는 아들의 특권이 더 이상 특권이 아니다. 짐이다. 속박이다.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평거리이다. 

원망은 질투와 더불어 나타난다. 감사는 있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할 때 나온다. 
원망은 범사에 불평을 불러온다. 감사는 범사에 감사를 불러온다. 

교회 안에 큰 아들들이 많이 있다. 집 안에 있는 탕자들이 많이 있다. 어떤 사람들일까? 
더 헌신하고 수고하는 사람들 가운데 더 많은 원망이 생길 수 있다. 
더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비판과 원망이 생길 수 있다. 
더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분노가 일어날 수 있다. 

*나는 큰 아들 같은 집 안에 있는 탕자는 아닌가? 사랑 없는 의무감으로 봉사, 불평 비판... 
큰 아들의 귀향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내 속에 있는 집 안의 탕자는 귀향하려고 하는가? 


3. 탕자의 귀향과 아버지의 환영 

집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에게로 달려간다. 
귀향하는 탕자는 아들 자격이 없다고 고개를 떨군다. 아버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아들을 끌어안는다. 자격 없다고 말하는 아들의 입을 아버지의 입으로 막고 입을 맞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신다. 그냥 안아주고 입 맞추며 용서하신다. 

단지 종들에게 명령할 뿐이다. 돌아온 내 아들에게 최고의 옷을 입혀라. 
내 아들의 손에 상속자의 표시인 반지를 끼워주어라. 노예처럼 맨 발인 내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겨라.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다 회복시켜 주어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려 함께 즐기자. 내 아들이 돌아왔다. 내 죽은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 
아버지의 환영이다. 사랑의 환영이다. 최고의 환영이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집 밖에서 들어오길 거부하는 큰 아들에게 찾아간다. 귀향하지 않는 탕자에게 찾아가신다. 28절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와서 거부하는 아들에게 권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분노한다. 이건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아버지는 큰 아들의 행동을 나쁘게 말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자신과 아들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신다. 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작은 아들의 극적인 귀향을 기뻐한다고 해서 큰 아들을 덜 사랑하거나 덜 인정하거나 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둘을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두 아들의 형편에 따라 사랑의 표현이 다를 뿐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두 팔 벌리고 언제나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시다. 

사49:15-16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어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한 시도 잊지 않고 기다리시는 사랑의 아버지시다. 
내가 작은 아들이 됐든 큰 아들이 됐든, 하나님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가 귀향하는 것이다. 


맺는 말 

탕자의 이야기는 나를 찾으러 오시며 나를 찾을 때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세상의 아버지의 인간적인 사랑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집을 떠난 탕자가 아닌가? 아버지께로 귀향하는 자녀가 되자. 
집 안에 있는 탕자는 아닌가? 아버지께로 귀향하는 자녀가 되자. 
우리도 귀향하는 탕자를 환영하여 받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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