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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일을 하신 성령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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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일을 하신 성령 (행 2:1-4) 

  
예수님이 부활한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다. 승천하고 나서, 열흘이 지난 후, 성령님이 임했다. 성령님이 하늘로부터 임한 날이 오순절인데, 초실절(부활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50일째 되던 날에, 십계명을 받아, 거룩하게 살도록 한 날이기도 하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그 오순절 날이, 가득 찼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한 때에 일한다. 일찍 오는 법도, 늦게 오는 법도 없이, 정확하게 그 때에 온다.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면, 조급해 진다.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때를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주면 교만해지고, 망할 수 있기에,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게 한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지만, 그 때를 알지 못해서, 계속 방탕하며, 죄를 짓는 사람도 있다. 흩어지지 않고, 다락방에 모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성령님이 3가지 현상으로 임했다. 

1. 어떤 모습으로 임했나? 

(1) 생명의 바람으로 임한 성령(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 바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호흡으로, (겔37장)에는 생기(루아흐, 󰖙וּר, 바람)라고 표현했다. “생기야 저 뼈에 들어가라 하자, 하나님의 생기가 뼈에 들어갔다. 죽었던 뼈들이 움직였다. 뼈들이 서로 서로, 짝을 맞추고, 뼈 속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겼다. 가죽으로 덮였다. 
큰 군대처럼,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성령의 바람이 분 것이다. 성령의 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이며, 영이다. 하나님의 생기인데,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던 무리 속에, 바람처럼 불어왔다. 이것이 오순절의 시작이다. 

강한 바람(βίαιος)은, 생명의 바람이다. 오염된 도시에 바람이 불면, 오염된 공기는 물러가고, 맑고 신선한 공기로 채워진다. 이처럼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악령들이 오염시킨 것들을, 물리치게 된다. 악령은 마음과 환경을 더럽혀, 추하게 만들지만, 성령의 바람은 더럽고 추악함을, 깨끗이 몰아낸다. 
그래서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음란 방탕, 거짓말 등, 더럽고 악한 것들이 모두 추방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넣어, 생령이 되게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호흡, 숨결이, 하나님의 바람이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마음의 염려 근심, 슬픔 고통 괴로움이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게 된다. 성령의 바람은 운동력이 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운동력이 생겨서,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 성령의 바람은, 거대한 변혁의 바람이다. 개인과 가정, 사회에 변혁의 새바람을 가져오게 한다. 성령의 바람이 불자, 예루살렘을 온통 변화시키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인류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다. 성령의 역사 없이 말로만 전하면,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귀는 이 세상 풍속을 지배하는 자이다. 마귀는 먼저 사회구조를 잡고, 우리를 무너뜨린다. 공중 권세 잡은, 악한 마귀를 이기려면,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님이 이길 능력을 줘야 하는데, 이 능력이 생명이다. 이 생명이 들어와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생명이 들어와, 악령을 이길 수 있다. 기독교인은 생명의 능력이 있기에 공중권세 잡은 자를 깨부술 능력이 있고, 이 세상 풍속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다. 성령이 들어오면, 세속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지 않고, 그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 있는 모습을 갖춘다. 

죽은 고래는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 가지만, 살아있는 조그만 송사리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차이는 크기가 아니다. 생명이다. 생명이 있으면, 이 세상 풍속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교회의 핵심은 생명에 있다. 덩치가 크다고 강한교회가 아니다. 
성도의 능력은 ‘얼마나 돈이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은 원한다. 세상을 거슬릴 수 있는 능력이, 넘쳐나기를 바란다. 

(2) 거룩한 불로 임한 성령(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성령의 불이 임했다. 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보면, 하늘을 향하여 갈라진 혀들이, 날름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불이 타오르면, 혀와 비슷하다. 이렇게 혀처럼 보이는 불이,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였다. 모인 모든 사람들 위에, 혀같이 갈라지며, 살아 움직이는 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불은 한 곳에, 덩어리로 뭉쳐 있지 않고,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했다. 이 불은 (출3장)에도 나타난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떨기나무에 붙은 불을 보았다. 하나님의 불이기에, 계속 붙어있고, 사라지지 않고, 나무도 타지 않았다. 그때 모세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 불 가까이로 끌려갔다. 하나님의 성령의 불은, 우리를 끌어당긴다. 더러운 신을 벗게 했다. 거룩함으로 이끄는 거룩한 불이다. 
(출19: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오순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말씀을 주신 날이며, 성령은 말씀대로 살도록 힘을 준다. 

(왕상18:38)에, 이 불이 또 나타났다. 엘리야가 사백오십 명의, 바알 선지자와 갈멜 산에서 대결할 때, 성령의 불이 나타났다.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 이 문제로 심각한 영적대결을 했다. 모든 악령을 몰아내고 태우는, 거룩한 불이, 하늘로부터 임했다. 
캄캄한 방에 불이 들어오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성령님은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다. 성령이 오시면, 마음을 환하게 밝혀 주어, 죄를 깨닫게 된다. 싸움의 대상이 악령임을 명확히 깨닫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악령과 싸우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성령 충만해서 기도하면, 기도가 또렷해진다. 교회가 성령 충만하면, 사람들이 똘똘 뭉치고,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아,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 불이 우리로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만든다. 불은 동력의 근원이다. 비행기는 불의 힘으로 간다. 
자동차도 큰 배도, 불의 힘으로 간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불같이 임해서, 우리의 신앙에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준다. 성령이 임하면, 마음속에 힘이 생겨난다. ‘불’은 태운다. 성령님이 불같이 임하면, 모든 죄악과 불신앙을 태우고,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다. 

혼자 힘으로는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며, 애써도 안 되지만, 성령의 불이 임하면, 세속적인 것이 다 소멸된다. 우리는 사역하지만, 사역할 힘이 있어야 사역을 한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할 힘이 있어야 하고, 용서하고 싶으나, 용서할 힘이 있어야 하는데, 불같은 성령이 임해야 한다. 

(3) 끊어진 관계를 연결시키는 성령(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었다.  
이 단절로 미움, 살인, 전쟁이 나타났다. 바벨탑 사건은, 대화의 단절을 증명한다(창11장). 대화가 단절된 인류역사에, 다시 연결되는 놀라운, 대화의 이적이 있었음을 말한다. 다른 언어들(헤테로스 글로사이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었을 뜻한다. 

언어를 통해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었다. 오순절 사건은, 대화의 회복이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을 지리적으로만 적용하면 안 되고, 장벽을 넘어감을 말한다. 
예루살렘은 종교의 도시다. 그곳에서 복음증거 하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두려움의 장벽, 의심의 장벽, 적대감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유다와 사마리아는 지리적, 종교적, 인종적, 사회적 장벽을 넘고, 땅 끝까지는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함을 보여준다. 

다른 언어들은, 옛날 번역에는 ‘방언’으로 나온다. 그러나 다른 언어들은, 구체적인 언어를 가진 외국어다. 오순절 날 여러 나라들에서 온, 여러 부족 출신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성령이 임하고, 사람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되었고, 다른 언어로 설교를 했다.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이 방언은 외국어(디알렉토스)다. (9-11)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여기 낯선 지명들이 많이 나오지만, 부족 이름이거나, 나라나, 지방의 이름들이다. 모두 15개의 외국어 방언으로 말했다. 
처음 4개 지역인,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메소보다미아는, 바벨론 지역으로 동쪽에 해당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유대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 곧 이스라엘 땅의 북쪽인 수리아지방을 말한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는, 소아시아 지역이다. 동쪽 바벨론 지역에서, 이제 북쪽 소아시아 지역으로 옮겨가며 설명했다. 
그 다음은 남쪽이다. 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은, 아프리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리고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가 나온다. 복음이 전해져야 할, 땅 끝이라고 간주되던 곳이다.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할례 받고, 율법을 지키기로 하고, 유대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을 말한다. 

이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그 후에 로마교회를 설립한다. 마지막으로 그레데인들과 아라비아인들이 언급된다. 대륙에 살고 있는 유대인만 아니라, 섬에 살고 있는 그레데인들도 있었다. 사막지방인, 아라비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즉 복음이 동서남북으로, 전파됨을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는 복음을 들고, 세계로 나가야하며, 민족주의를 뛰어넘어야 한다. 오순절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곳의 언어, 자기 고향언어로, 메시지를 분명히 들었다. 이 사건은 바벨탑의 비극을 극복한 사건이다.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쌓았던, 바벨탑 때문에, 사람들의 언어가, 서로 통할 수가 없었다. 성령님이 임하자, 언어가 통하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 언어, 인종, 학식, 명예를 뛰어넘어서, 문화적 장벽이 무너지고, 서로 통하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가 부활되고, 서로 통할 수 있었다. 

2. 하나님의 큰 일(11中).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며 하나님의 큰일(메갈레이오스, 위대한)을 말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일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오순절에 탄생한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커다란 일을 증언하고, 위대한 역사를 위해, 힘을 모으는 공동체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함께 꿈꾸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서로 용납하며 세계를 품고, 하나님의 커다란 일을, 꿈꾸는 공동체이다. 

이 일이 가능한 이유는, 성령의 충만을 통해 가능할 수 있다. (4上)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초대 교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개인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성령이 임하자, 하나님께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죽은 영혼을 살리려는, 공동의 꿈을 갖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죽은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는 목표를 위해, 개인차를 넘어서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나갈 수 있었다. 

성령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꿈을 위해, 개인차를 뛰어넘어, 목숨을 걸고, 영혼 구원을 위해 함께 전진하게 만든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위대한 사람들은, 사람의 능력에 있지 않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여호와의 신이 부어졌기 때문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성령의 기름 부음만 있으면, 쓰임 받을 수 있다.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남자는, 1년에 3차례, 곧 3대 절기 때, 예루살렘으로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했다(신16:16). 따라서 오순절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국외에 거주하는 자들(디아스포라)도, 예루살렘을 찾아왔다. 그들은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들은 먼 외국에서부터 왔다.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이 소리는 단수다. 여러 사람이 말할 때의 소리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사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소리는, 성령님이 강림할 때 들려온,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였다. 땅 끝까지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다. 

(6-8)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그곳으로 모여든 자들은, 소동하고 놀랐다. 
신기하고 특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디아스포라들이 살고 있는 국가나, 지방 언어로 말함을 듣게 되었다. 듣고는 미완료로, 계속적인 동작을 말한다. 그들은 마치 그 언어가, 자기들의 평상시 언어(디알렉토스)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유창하게 말했다. 

그들이 신기하게 여겼던 이유는 (7中)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갈릴리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이방나라의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느냐며 놀랐다. 배우지 못한 천한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무시하던 곳이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동네이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 했다. 이처럼 갈릴리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지역이었다. 또 갈릴리 사람에게는, 독특한 어투가 있었다. 사투리도 심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하니, 그 말을 듣는 자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3. 성령에 대한 반응(12-13)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그런데 이들의 반응이 서로 달랐다. 
예수님은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말씀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언제나 좋은 땅에만 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길가에, 때로는 돌밭에, 또 때로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문을 열고서,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복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 마음 문을 닫아놓고,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불행한 사람들이다. 본문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곳에 모인 자들은 다 놀랐다.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사실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아 ‘어찌 된 일이냐?’ 하였다. 긍정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베드로가 전한 복음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베드로의 설교가 끝났을 때인데,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회개했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 마음 문을 열고,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다 구원을 받았다. 
반면 성령님의 거룩하신 역사를, 술 취한 자들의 소행으로, 간주해버리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같은 자들이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한다고 하였다(마12:22-24).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훼방은, 점차 더 심해지고 악해져간다.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4:7), 위협했고(4:17). 잡아다 옥에 가두고(5:18),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더니(5:40), 급기야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기까지 했다(7:57-6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충성된 증인이 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님이 인도하는 대로, 입을 열어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듣는 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위대한 일에는 반대도 있고, 핍박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천사의 말로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성령님이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복음이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성령님은 우리를 통해, 그런 사람은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충성스런 증인이 되어 부지런히 복음의 씨앗을 심기를, 하나님의 위대한 큰 일을 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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