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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롱을 당하신 예수님 (마 27: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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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롱을 당하신 예수님 (마 27:27-31)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구속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야할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단지 십자가를 지신 것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이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신 것이지만, 그 전에도 많은 예비적인 형벌이라 할 수 있는 모욕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천지 만물을 홀로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에 사람 몸을 입고 오신 것,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오신 것도 인간이 말로 할 수 없는 희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온갖 멸시와 천대를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세상의 주인이 세상에 오셨으니 영광을 받아야 마땅하신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 부요와 영광을 다 내어 놓으시고 세상에 계실 때에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 참으로 비천한 가운데 있는 인생인 우리들도 받지 못할 그런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한 몸에 받으셨는데, 다 우리를 위해서 받으신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실을 요한은 알고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인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나 대신 욕을 당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그 은혜를 감사할 뿐 아니라 나도 주님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살 각오와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받으신 첫번째 고난형벌은 채찍질입니다. 

(마27: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 채찍질은 무서운 고통의 형벌입니다. 채찍질 당하는 사람은 옷을 벗게 되고 손은 뒤로 결박한 채로 그 등을 구부린 채 기둥에 묶이고 긴 가죽채찍, 그 끄트머리에 날카로운 뼈나 쇠붙이를 붙인 것을 가지고 마구 때립니다. 채찍을 맞은 죄수의 등은 바둑판같은 모양으로 찢어지고, 이런 채찍을 맞으면 누구나 다 기절하거나 거의 미쳐버리고 죽기도 한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고난을 당하여 보신 분들이 계시지만, 이런 채찍질의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모진 고초를 당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인데, 주님은 왜 이런 고초를 당하셨습니까? 

이 채찍질을 당하신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왜 이 채찍질을 당해야했습니까? 


두 번째 형벌은 바로 조롱과 희롱입니다.(마 27:27-29)

이제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그 머리에 씌웁니다. 또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게 하고 그 앞에서 군병들이 무릎을 꿇고 희롱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많은 군중들에게 둘려싸여서 놀림을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모욕을 당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모욕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들은 진정 십자가에 달리시는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 몸입고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모욕하며, 장난질하는 무서운 죄였지만, 이들이 모르므로 담대했습니다. 

옷을 벗긴다는 것은 우리들도 이런 말을 잘 사용합니다. 옷을 벗었다. 어떤 위치에서 내려오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의 과거의 어떤 이력을 생각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선한 일이나 교훈들에 대하여 다시는 생각나지 못하게 파묻어 버리는 잔인한 짓입니다. 

그리고는 홍포를 입힙니다. 붉은 색 옷은 왕들만 입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는 뜻에서 입힌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왔다는 자면 다윗 같이 자신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구해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십자가 하나도 해결못하는 자가 무슨 유대인의 왕이란 말인가 조롱하는 뜻입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만 되십니까? 만왕의 왕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면류관을 씌웁니다. 

그 면류관은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에 여러 종류의 가시가 있지만, 그 때에 예수님께 씌어졌던 가시면류관은 쓰면 살을 뚫고 들어가기 때문에 이것 쓰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렇게 가시면류관을 씌운 것도 조롱입니다. 왕의 금 면류관은 영광의 상징인 반면에 가시면류관은 저주와 고통과 아픔의 상징입니다. 가시는 저주와 고통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이렇게 했지만,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요, 그러나 저주와 고통을 당하신 것은 인생의 죄와 사망을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인 것을 보여주십니다. 

주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들이 나음을 입고, 주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들이 평안을 얻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왕이면 마땅히 권위를 상징하는 금홀을 손에 들게 해야 하는데 그 손에 갈대를 들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앞에 엎드려서 경배하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조롱했습니다. 

(마 27: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저는 이 대목에 오면 할말을 잊어버립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하여 본 일이 더러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가래침 뱉음을 당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얼굴은 그 죄 많은 인간들에 의해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들고 계신 갈대를 빼앗아 그 머리를 때렸습니다.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그 입에 궤사도 강포도 없으신 거룩하시고 온유하신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로 그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아무 말씀 않으시고, 그들을 욕하지도 그들에게 가지신 그 권능으로 위협하지 않으시고 희롱을 다 받았습니다. 

사람들, 저를 생각해보면 별로 잘난 것도 없는 사람이 또 정말 조롱과 멸시를 받을 짓을 하고도 조롱당하면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힘이 없어 대들든지 그렇지 못하면 저주와 욕이라도 하여야 할 것인데 우리 주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모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으로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받으실 그분이 왜 능욕을 받으셨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신앙생활도 포기하고 자기 명예 회복을 위해서 복수하고 보복하는 일들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앞에 당하신 형벌은 차라리 죽음보다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욕과 희롱과 고난을 왜 당해야했습니까? 이것은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당하신 그 형벌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 그 놀라운 은혜의 성질을 알게 하시는 것임을 깨달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해야합니다. 만일에 이들의 조롱과 희롱과 고난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지셨는지를 우리들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 능력이 무한하시고 지혜가 풍성하신 주님께서 왜 이런 고난을 받으시되 말 한마디 대꾸하지 않으시고 이를 다 당했습니까? 이 주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우리들도 이 성질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를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맺은 것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옷 벗음을 당한 것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갈대를 손에 드시면서 원수들의 조롱과 멸시를 다 받으시되 한 말씀도 않으신 것도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침 뱉음을 당한 것도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합니다. 주님께서 갈대에 머리를 맞으심도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합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주님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53:1-8을 읽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1-8)

여기에 나타난 메시야가 그리스도입니다. 
2절 부터의 우리라는 단어 대신에 '나'라는 단어를 넣어서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읽고나서) 이제 믿어지십니까? 
주님께서 왜 옷 벗김을 당했습니까? 왜 붉은 홍포를 입었습니까? 

이는 영광의 보좌를 비우시고 비하하신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보이십니다. 당신의 그 옷을 벗으시고 붉은 옷을 입으신 것입니다. 인생의 구세주로 피를 흘리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이 분이 낮아지심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가 가난해 지신 것은 우리를 부요케 하심입니다. 

왜 주님께서 그 무서운 채찍에 맞았습니까? 당신의 죄악입니까?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채찍에 맞아야하는 것이 마땅하건만 주님께서 우리 대신에 다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고침을 입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까? 가시는 저주를 상징합니다. 고통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시조가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저주하셔서 이 땅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무쓸모 없는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들임을 계시로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았다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 가시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예수님, 영원한 왕이신 영광의 왕에게는 모든 만물들이 다 금으로 면류관을 드려도 그 영광을 다 드러내지 못할 것인데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우리 주님께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침뱉음을 당하고 희롱을 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죄의 값은 이렇게 무서운 것을 보여줍니다. 온갖 멸시와 조롱을 영원히 당할 우리의 부끄러움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간혹 청문회장을 보면서 깨달음이 없습니까? 사람들이 욕심으로 죄를 짓지만 그 죄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드러나게 될 때에 멸시를 당하며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저주가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이 세상뿐이면 그것도 다행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히 저주받고, 영원히 멸시천대, 영원한 부끄러움, 영원히 고통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우리를 여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벗으시고 붉은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영원히 감사해야하지 않습니까? 

이를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행해야합니까? (벧전 2:20-25 읽음)

벧전 2:20절 말씀에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에게 욕하는 사람들에게 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저주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기까지 순종하시고, 또 우리를 위한 구속의 역사를 위해 참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선을 행하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복수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아닙니다. 또 억울한 누명을 변명하고 복수하려고 부르심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기까지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나 이사야 53장에서 나타난 메시야의 모습을 볼 때에 세상에 많이 왔다간 영웅들과는 다른 주님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 교회의 모습이고, 고난당하신 종의 모습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많이 묵상하셔야 합니다.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시는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모습, 십자가 앞에서 온갖 고난과 모욕과 멸시를 당하시면서도 끝까지 참으신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며 그러나 위엄있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습니까? 

큰 교회, 큰 역사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가 아닌가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실은 큰 것으로 평가되는 세상이지만, 얼마나 그 삶이 화려한가, 어떤 보상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의 삶에서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닮아서 얼마나 인내하며 순종하면서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가느냐 못가느냐 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고 참으신 데 능력이 있습니다. 희롱을 다 당하시기 까지 순종하신 데 능력이 있습니다. 변명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욕을 당하나 욕하지 않으시는 능력, 억울하게 누명을 썼지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하고 그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희생의 제물이 되신 이것, 이 사랑이 능력입니다. 이 사랑의 능력이 온 세상을 변화시켰고, 천국을 이루어나갈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과 희롱을 당하면서도 십자가 위에서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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