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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나의 자녀 (눅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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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나의 자녀 (눅 2:40)

아미엘은 말하기를 "어린아이들의 존재는 이 땅 위에서 가장 빛나는 혜택이다. 죄악에 물들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생명체는 한없이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린아이들 속에 미美를 발견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어린아이들 틈에서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천국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생활은 고스란히 하늘에 속한다"고 아이들을 예찬했습니다. 

특별히 교육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교육 현실을 놓고 한두 번쯤은 고민했을 것입니다. 교육 정책은 고사하고서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인성교육의 결핍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인성교육이라고 할 때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상식적인 것을 못하는데 대한 염려입니다.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공부가 어린아이 때부터 시작되고 대학을 들어가면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 중에 상당한 부분이 도구적 지식입니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인격이 좋다는 말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생소한 느낌이 들고 능력 있다는 말은 우리 귀에 익숙합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는 다니는데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 인격을 따지는 사람은 없고 흉내 내는 신앙이면 되고 오로지 살아가는 능력을 가지고 신앙까지도 평가해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앙 인격이 잘못되었으면 신앙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엡 6:4). 
자녀에 대한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고 양육권(교육권)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Ⅰ. 아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했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에 『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은 인간의 태를 만드셨습니다. 

욥기 31장 15절에 『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부르셨고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사 49:1)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았다고 했습니다(사 49:5).
하나님은 한나를 성태치 못하게 하셨습니다(삼상 1:5). 하나님은 다시 한나가 잉태해서 사무엘을 낳도록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은 인간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 『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라고 했습니다. 


Ⅱ. 아이들은 모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 해야 될 나의 자녀입니다. 

1) 태아교육이 있습니다. 

사사기 13장 13-14절에 『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수태고지를 받고 난 다음에 자기 남편 마노아에게 고했을 때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다시 물어보니 여호와 사자는 자기 아내가 한 말과 똑같이 마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태아는 생명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41절에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腹中)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44절에 『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5장 22절에 『 아이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 지라… 』고 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했을 때에 태중에서 에서와 야곱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은 태아 교육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은 태아 교육의 중요성을 밀도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기를 가진 어머니의 활동은 곧 태아에게 미칠 뿐만 아니라 태아에게 직접 전해지기도 합니다. 말하기도 끔찍스럽지만 태아를 없애려고 의사가 칼을 대면 태아는 그것을 감지하고 민감하게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분노, 걱정, 공포, 괴로움, 고통, 흥분, 마약, 알콜, 흡연, 약물복용 등은 어쩔 수 없이 태아에게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어머니의 정서활동이나 안정, 평화, 도덕성 함양, 즐거움 등은 태아의 성격이나 기질을 형성하는데 영향력이 있다고 오늘날 과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2) 영유아기 교육입니다. 

본문 2장 40절에 『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생아(영아)는 생후 3주까지를 말합니다. 이때는 새로운 환경에 접하기 때문에 특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태 밖에서 기독교적 환경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생아에게 어떤 환경을 부여해야 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환경이라고 할 때 개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부딪히는 모든 자극들을 의미합니다. 환경은 유기적 환경과 행위적 환경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유기적 환경이라고 할 때는 태아의 영양 공급이 지적 발달과 건강에 미치는 경우입니다. 행위적 환경이라고 할 때 인격적 환경과 자연적인 환경과 문화적인 환경을 말합니다. 

찬송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환경과 감사하고 봉사하는 환경은 신전 인격으로 양육하는 과정에서 신생아(유아)에게 필요한 환경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아기는 만 2세까지를 말합니다. 이 시기는 보행학습, 언어학습, 식음에 대한 학습, 신체적 배설작용, 통제 학습등이 있습니다. 

유아기는 모방심리가 최고조에 달할 때입니다. 어른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게 됩니다. 이때 아이에게 부모들은 어떤 본을 보여야 되는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쁜 것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좋은 것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기입니다. 아이에게 비치는 모든 사물과 피사체는 시청각 교재가 되는 것입니다. 

3) 유년기 교육입니다. 

본문 2장 40절에 『 …지혜가 충족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고 했습니다. 유년기의 예수님은 지혜가 충족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년기는 2세에서 5세까지를 말하고 그 이후는 아동기라고 합니다. 유년기는 급격한 변화로 자칫 잘못하면 어린이의 신기한 자연적인 성장에 매료되어 효과적인 교육을 망각하기 쉬운 때입니다. 
이때부터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하고 물리적 현실성에 대한 직설적인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구별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정서가 싹트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이 있듯이 이 시기에 경험하고 배운 것은 이후의 그 어떤 시기와도 비교가 안될 만큼 생에 큰 영향을 받는 시기입니다. 급격한 육체적, 정신적 발달로 인하여 부모들에게 인생의 신비를 느끼게 해주는 시기입니다. 

이 유년기는 복음을 심는 일생일대의 찬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기에 적기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부활 승천 재림의 복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런 장애 없이 그대로 심령에 꽂히는 시기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 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때의 교육은 어린이의 한평생을 좌우합니다. 

4) 아동기 교육입니다. 

본문 2장 52절에 『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선생들과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습니다(눅 2:46).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연령층 즉 6세부터 12세까지를 아동기라고 하는데, 6세부터 8세까지를 아동 전기, 9세부터 12세까지를 아동 후기라고 합니다. 

5) 아동기의 이상적인 기독교 교육입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에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아동기의 성장과 함께 기독교 교육은 필연성을 가지는 동시에 최고의 효과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아동들은 자기들이 들은 것을 믿습니다. 대견스럽게도 양심적인 것과 비양심적인 것에 대하여 정의감을 발동시킵니다.

가정에서의 어른들의 경건생활은 아동들이 바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표현되기만 한다면 그대로 믿고 따르기를 좋아합니다. 복음의 진수를 그대로 믿고 받으며 이것을 전하고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합니다. 
교회학교를 매우 좋아하게 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의 자신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믿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절기행사나 특별한 모임등을 매우 좋아합니다. 

가정에서 드리는 가정예배에 참여하기를 좋아하고 신령한 분위기에 매우 적극적인 시기입니다.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분반으로 모이는 활동을 좋아합니다. 교사들은 이러한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여 신령한 하나님의 지식을 공급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1) 기독교 교육은 도덕지상주의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아동 후기의 아동들은 매우 성숙한 면을 나타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을 모방하고 닮아가기를 좋아합니다. 영적 진리를 분별하는 시기입니다. 
교사들에게 많은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의 이론의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적극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학생들이 설교시간에 질문을 합니다. 당황하면 안되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설교는 곧 대화체로 바뀌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는 시기입니다. 각자가 더 나은 미래를 동경하고 관심을 가지는 시기입니다. 하나님께 도와 달라는 기도를 진지하게 드릴 줄 아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이해하고 공감하는 시기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장을 통하여 인간이 되어갑니다. 기독교 교육은 인격의 성장과 인간 발달을 교육의 중요한 과정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방향과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과제가 일반교육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소위 위인들과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마치 세상에서 말하는 위인들과 같이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물을 중심한 사건 중심의 알량한 도덕주의를 강조하므로 대다수의 국민정서와 영합하여 생명종교로서의 본연의 의미를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구속사적 교육을 목적으로 등장한 성경의 인물과 세상에서 말하는 위인들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교육은 절대 창조, 절대 구속, 절대 은총을 가르칩니다. 

(2) 교회교육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열악한 교육 환경에 대한 심적인 부담이 교회 교육의 본질 자체를 불신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비록 그 방법이 세련되지 못한 점이 있더라도 그것은 방법에 대한 문제이지 교육의 내용이나 본질에 대한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교회교육이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의 지배 정당성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과학 위에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상적 논쟁의 결론입니다. 

(3) 교회교육은 전인교육입니다. 

가정교육은 아동교육의 요람이자 최소 단위의 종합교육 현장입니다. 학교교육은 그 목적하는 바가 뚜렷합니다. 초등학교 교육에 대하여 교육법 제 93조는 "초등학교는 국민 생활에 필요한 기초적 초등 보통교육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대단한 말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기초교육이며 좀더 수준 있는 과학을 공부하기 위한 기초과정이라는 것을 초등학교 교육목적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육법 제 100조에 "중학교는 초등학교에서 배운 교육의 기초 위에 고등 보통교육과 전문교육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로 되어 있고 제 104조는 "고등학교는 중학교에서 받은 교육의 기초 위에 고등 보통교육과 전문교육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로 되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상급학교를 가기 위한 과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교회교육은 세상 과학을 연구하는 교육 기관이 아니고 세상의 과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창조, 구속, 통치, 보존, 섭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예배적 인격자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인화협동적인 인격자로, 자기의 존재의의와 특수한 사명을 자각하며 자기의 선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는 문화적 인격자를 양성함을 교육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정교육과 학교교육과 교회교육이 적당한 균형과 상호 보완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의 본질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과학을 연구하는 과정을 학교에 위탁했다는 표현이 적당합니다. 따라서 잘못된 학교교육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교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날 때부터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성경적 대답입니다.
시편 51편 5절에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 원죄 때문에 인간은 온갖 더러운 자범죄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자녀 교육은 이러한 죄악을 인간이 이 세상에서 호흡과 함께 신진대사를 하고 사물을 감지할 때부터 차단하자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어린이들의 환경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환경으로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날 때 자기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죄로 오염되어 있을 때는 본질적으로 무기력하고 무가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세대라는 말은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계급 및 예술파 청년들을 말합니다. 기성세대들이 요즘 젊은이들을 볼 때 한심합니다. 왜냐하면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식의 무기력한 젊은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청년기는 왕성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이상성과 낭만성과 더불어 진취적 열정으로 타오르는 시기입니다. 성경은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라고 했습니다(시편 110: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했습니다(요일 2:14).
그러나 요즘의 청년들의 모습은 상대적 이데올로기의 족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반항이 없는 것은 과도한 급진주의보다 불길하다"고 했습니다. "잠재적인 나치는 저항자들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참고 침묵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잃어버린 세대의 침묵과 순종을 오히려 불길한 징조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현상은 바로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는 해결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된 인간이라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태할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양육하고 신생아를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교육하고 유아기 유년기를 주님의 말씀으로 교육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사탄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이단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과학 지상주의자들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황금만능주의자들에게 빼앗기면 안됩니다.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도덕 지상주의자들에게 빼앗기면 안됩니다.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교육 지상주의자들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자녀 교육을 부모에게 맡겼습니다. 자녀 교육의 수고한 값이 부모에게 기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27편 3-4절에 『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양육하는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들의 천부적인 재능을 계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정확하게 받은 것을 가지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자녀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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