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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만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롬 1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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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만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롬 12:14-17)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소극적인 문제 중에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을 뒤바꾸어 놓을 그 무슨 운명을 기다리며 삽니다. 간혹 운명이란 내가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고 뛰어드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거의 대부분은 내가 환경을 바꾸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고 환경이 나를 바꾸어 놓기를 갈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로 누군가가 나의 무엇이 되어주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마음입니다. 어찌 보면 이기적인 자세입니다만 일평생 그것을 구하며 기다리다가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가는 방향도, 목적도, 의미도 모두 그 틀 안에 묶어버리고 맙니다. 누군가가 이끌어 주어야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고, 누군가가 손을 잡아 주어야 일어설 수 있는, 혼자서는 전혀 무언가를 시도하지 못하는 반쪽 인생이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태어난 인생이니 그냥 먹고, 돈 벌고, 시집 장가가고 사는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는 방황 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한 번 뿐인 인생이기에 가는 길을 분명히 알고, 하는 일을 분명히 알고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인생이란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반자가 필요하고, 동행자가 필요하고 동역 자가 필요한 것이 인생입니다. 내가 도움을 받을 때가 있는가하면 도울 때가 있고, 내가 사랑을 받을 때가 있는가하면 사랑을 베풀 때가 반드시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려서는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고 자라지만 어른이 되면 받은 것을 돌려주면서 살아야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가난할 때 받은 도움은 넉넉할 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고, 받기를 원하기만 하면서 다가가기를 거부하며 주기를 마다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 에 보면 나이에 따라서 인생을 일곱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한 살 때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살 되는 아이 앞에서 아이의 비위를 맞추고 어른들이 오히려 아이 앞에서 재롱을 떱니다. 그래서 한 살 때는 왕입니다. 그리고 두 살 때는 돼지랍니다. 무엇이 깨끗한지 무엇이 더러운지 구별하지도 못한 채 마구 흙탕물속을 헤집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좀 지나 열 살이 되면 양이라고 합니다. 그때쯤 되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간수하고 제법 멋을 부리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열여덟 살은 말이랍니다. 크게 성장해서 자기가 지닌 재능이나 힘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려고 할 때라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자신감이 넘치고 그 힘을 어디에든지 써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망아지처럼 마구 날뛰는 나이가 열여덟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결혼하면 인간은 당나귀가 된답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서 그때부터 끝도 없는 인생의 길을 당나귀처럼 뚜벅 뚜벅 쉼 없이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년은 개에 비유합니다. 딸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자존심을 다 버리고 윗사람 비위도 맞추고, 원치 않는 아양을 떨고 주인을 기쁘게 하고자 하루 종일 꼬리치는 개와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함을 뜻합니다. 참으로 불쌍한 모습이지요. 

마지막으로 노년은 늙은 원숭이랍니다. 사람이란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로부터 따스한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서 살고픈 데 세상사람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아예 내다 버리기도 합니다. 젊었을 때는 뭇사람들로부터 꽤나 인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재주 부릴 힘도 없어서 쓸모없이 버려진 동물원의 늙은 원숭이 마냥 처량한 것이 노년이랍니다. 사람들은 늘 지금 재주를 부릴 줄 아는 젊은 원숭이에게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이란 늘 나쁜 것도 아니요, 늘 좋은 것도 아닙니다. 좋을 때가 있는가하면 반드시 나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진리란 좋을 때는 나쁠 때를 생각하며 겸손히 살 것이요, 나쁠 때는 좋을 때를 바라보며 참고 견뎌 인내하며 살 것입니다. 

한 인간의 불행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만을 골라서 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자기가 해야 할일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별도로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또 있습니다. 사랑을 해야 하고 돌보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는 평소 내가 싫어하고 저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베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돌보지 않아도 충분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저를 좋아하고 저가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과잉으로 교제하고 지나치게 두둔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순 된 생을 살아가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이게 곧 불행입니다. 

유명하다는 [하버드 대학경영대학원] 에서 사용하는 교재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두뇌를 갈고 닦고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을 잘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10%인데 비해 대인관계를 뛰어나게 잘함으로써 성공하는 확률이 85%에 이른다.” 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머리가 좋고 똑똑한 것보다는 인간관계가 원만한 사람이 훨씬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인관계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대인관계의 첫걸음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 적인 이야기로 서로 축복하라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설사 그가 나를 핍박하는 자라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아가다 보면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솔직한 심정으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 그대로 하자면 그런 사람을 저주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두고 한의 정서라고 합니다. 별로 좋지 않은 말입니다만 숱한 설움과 아픔을 겪으며 살아오다가 보니까 한이 서린 민족이라는 수식어가 꼭 따라다닙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요하면 무엇을 떠올립니까? <아리랑> 입니다. 

아리랑의 유래에 대해서는 명확한 것이 아직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만 이렇다 할 정설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가사를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가만히 반복해 불러 보면 숨은 뜻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임이 나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갈 테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리도 못 가서 발이 부르트든지, 발목이 삐든지 해서 넘어지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온 솔직한 마음이요, 곧 숨길 수 없는 우리들의 심정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져야할 정서는 이것이 아닙니다. 다른 영적인 정서가 있어야 함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 살지 말고 그 본성을 누르고 잠재워서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래야만합니까?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라면 성도로서의 영적정서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명하셨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눅10:5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 할지어다하라.” 유대인에게 있어서 샬롬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 가든지 일단은 그 가정에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일 그 가정이 복을 받을 자격이 있으면 그 가정에 복이 머물게 될 것이지만, 그 가정이 복이 받을 자격이 없으면 그 복은 복을 빈 사람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축복하는 것은 쉽습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축복하는 것은 즐겁습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축복하는 것도 역시 쉽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경우가 정말 어렵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핍박하는 사람, 그래서 미운 사람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축복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 받은 성도가 해야 할 마땅한 영적 정서입니다. 

자, 이 시간 조용히 내가 특별히 축복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합시다. 지금까지 나를 지독히도 괴롭히며 나는 또한 그로 인하여 미워하며 살았던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축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구원 받은 성도라면 이 상황에서의 축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축복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설령 그가 나를 미워하든지, 내게 악독한 말을 일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축복해야합니다. 결국은 그 축복이 내게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축복하는 삶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축복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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