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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만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눅 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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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만이 우리의 할일입니다 (눅 14:7-11)

목사들이 늘 예배를 마치고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목사님,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매주일 들어도 좋고 또 늘 듣고 싶은 말입니다. 한 주간 동안 고민하고 열심히 준비한 설교가 듣는 이로 하여금 은혜를 느끼게 했다는 말만큼 기분 좋은 말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목사가 주일날 설교를 한 뒤 무척 우쭐해졌습니다. 자신이 듣기에도 자기의 설교가 꽤 근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반응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어느 목사라도 교인들을 붙잡고 “오늘 내 설교 어땠습니까? 은혜 받기에 충분했습니까?” 하고 물어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을 꾹꾹 참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심 칭찬 내지는 좋은 평가를 기대하면서 넌지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세상에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 같아?” 그러자 아내가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모르긴 해도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숫자보다 한 사람은 적을걸요.” 하더랍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가치가 높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큰소리로 울음을 울면서 시작한 생은 자라가면서 상황에 따라 자기의 자랑거리를 나타내기를 좋아하고, 때로는 잘난 체하기도 하며, 남들에게 자기의 장점을 뽐내기를 좋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는 가운데 생겨나는 부작용이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자기만 드러내는 경우도 만납니다. 이러한 인간의 성품을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제어하며 사느냐가 그 사람의 인간됨을 말해줍니다. 

이 교만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 교만의 성품을 이기기 위해 갖가지의 방법들로 자기를 다스립니다. 명상을 하기도 하며,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교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적극적인 방법을 일러줍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겸손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교만하지 않으면 된다고 앞에 나서지도 않으려는 것은 소극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죽은 듯이 없는 듯이 사는 것이 결코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이란 분명히 있어야할 자리에 있으면서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리에서 나를 스스로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겸손입니다. 

[로널드 고에츠] 라는 사람이 오늘날을 <반 겸손의 시대> 라소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뿌리를 사상적 문제로 올라가서 [칼 마르크스], [프로이드], 그리고 철학자 [니체]를 꼽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론> 이나 <프로이드의 사상> 이나 <니체의 인간을 초월한 철학> 은 뭘 말하고 있느냐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하나같이 겸손을 미덕으로 이야기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겸손은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며 인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요소이므로 겸손하다가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는 겸손이란 없습니다. 언제나 과시하려고 하고 뽐내려고 합니다. 

이 겸손이 없는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가 자기 자랑입니다. 틈만 나면 자기 PR을 하게 됩니다. 자가기 잘났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알리려합니다. 물론 이 시대를 자기 PR의 시대라고 하여 성공의 요소로 인정하기도 합니다만 그래야만 살아남는다는 냉정함이 인간성도, 사회성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배려가 없는 삭막한 현실입니다. 
간혹 보면 주변에 친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불행한 사람들인데 왜 불행해 졌느냐를 생각해야합니다. 왜 친구가 없는지를 돌아보아야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고 늘 불만만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만족하며 삽니까? 즉, 자신의 겸손은 어디까지 왔느냐 말입니다. 자기 능력, 자기 지혜, 좀 더 나가서 거울을 보면서 자기 얼굴에 대해서 혹시 불만이 많습니까?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조그만 더 잘났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지금 성형중독의 시대라고 합니다. 누가 보아도 예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더 예뻤으면 하는 마음에 여러 번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얼굴에다가 자기 스스로 식용유도 집어넣고 하다가 얼굴이 아주 흉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립니다. 성형에 집착한 나머지 정신적인 문제까지 생겨서 병원에 입원한 것도 보았는데 얼마나 불행합니까? 처음 모습이 그만하면 됐었는데 이제는 돌릴 수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자기됨에 대하여마저도 불만과 원망이 많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에 대해 불만과 원망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자신에 대한 착각 때문입니다. 지나친 이기적인 생각,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교만을 만들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교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 내게 주신 경륜, 내게 주시는 이 환경, 내 처지, 내 지위,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일에 대하여 원망이 많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겸손지수를 봅시다. 겸손한 사람에게 감사가 있고, 은혜가 있지만 교만한 사람에게는 불만이 있고 원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초빙한 데는 속셈이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라든가, 존경해서라든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좋은 뜻에서 모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기의 위치를 높이고자하는 교만에서 예수님을 초빙했습니다. 뭇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으시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병자도 고쳐주시고, 좋은 말씀도 해 주시고, 능력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런 인기 있는 사람을 자기 집에 모셔서 자기의 신분을 과시해 보려는 교만한 속셈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잔치는 시작되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 자리를 잡고 앉아야합니다. 그런데 초대 받은 사람들 역시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전부가 윗자리를 찾습니다. 하기야 끼리끼리 논다고 바리새인이 초청한 사람들이 뻔한 사람들 아니었겠습니까? 항상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이 자리 문제가 아주 민감합니다. 우리 옛 어른들도 보면 둥그런 상에 들러 앉는데도 이상하게 윗자리 아랫자리가 구분됩니다. 윗목 아랫목에 유달리 신경을 곤두세우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좀 더 위에, 좀 더 높은 데에 앉고자합니다. 어쩌다 윗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 주인이 오더니 “당신 보다 높은 손님이 오셨으니까 좀 내려앉으시오”해서 망신을 당하기도하고 아랫자리에 앉았다가 윗자리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추태를 보시고 제자들에게 실물교육을 하십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차라리 낮은 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와서 높은 자리로 옮겨 줄 때 그것이 훨씬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처음부터 스스로의 겸손을 가지기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자신의 가치는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아무리 높인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높게 봐주어야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솝 우화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 나귀와 수탉이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무서운 사자 한 마리가 울을 뛰어 넘어 들어왔습니다. 사자를 본 나귀는 눈앞이 캄캄하여 옴짝달싹 못하고 수탉은 놀란 나머지 “꼬끼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지붕위로 뛰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닭 우는 소리를 들은 사자는 몸을 움츠리더니 그냥 울 밖으로 뛰어서 도망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나귀가 짐승의 왕이라는 사자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도망치는 모습이 하도 우습게 보여서 자기가 도망치는 사자를 뒤쫓아 가서 혼내줄 모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한 참을 쫓기던 사자가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되자 뒤돌아서서 쫓아오는 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사자가 닭 우는 소리에 놀라서 도망친 것은 닭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닭 우는 소리에 날이 밝아서 사람들이 몰려올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교만한 나귀는 자기는 항상 듣는 닭 우는 소리에도 두려워서 도망치는 사자가 깔보였던 것이지요. 그 얼마나 착각이요, 어리석은 판단입니까? 우리는 스스로 교만하여 나귀처럼 인생길에서 착오와 어리석은 판단을 내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만이나 교만 때문에 자신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인생을 그르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라는 진리의 말씀을 하십니다. 남이 낮추어서 낮아지는 것은 심판입니다. 내가 낮추어서 내가 낮아지는 것이 겸손입니다. 남에 의해서 억지로 낮춰지는 것은 망신입니다. 하지만 남이 뭐라고 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나를 스스로 낮추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칭찬 받을 만한 참 겸손이라 할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 낮아질 때 하나님이 나를 높여주신다는 진리입니다. 높이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는 말씀을 명심하실 것입니다. 겸손만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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