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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마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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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마 5:10-12)

(마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 

1.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세계를 변화시킨 가장 극적인 세계사 100대 사건>가운데 하나가 서기 60년대의 기독교 대 박해입니다. 비록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사후 300년 동안 모든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뿌리를 내렸지만 신자 수는 불과 로마제국 인구의 10분의 1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신앙이 확고한데다 소수의 사람들의 종교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는 자연히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을 유태인들과 동일시하여 똑같은 취급했으나 예수가 죽은 후에 곧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서로 다른 점들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상징인 황제에게 희생제물을 바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반역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인들의 편견은 그런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유태교도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많았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쉽게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이 성찬식을 하면서 사람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기독교도들의 이런 끔찍한 의식의 결과로 재난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생겨나 “기독교인들 때문에 비가 안온다.”는 말이 속담처럼 로마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서기 60년대에 네로 왕 치하의 로마 대 화재 당시 최초의 대규모 기독교도 박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망이 없었던 네로 황제는 화재의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으로 기독교인들을 선택했습니다. 기독교인들 수 백명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습니다. 

또한 황소에 받히거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횃불”이 되어 불타 죽기도 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울도 로마의 기독교인 대량 학살 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서기 2세기경에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었으나 98년에서 117년까지 재위한 트라야누스 황제는 기독교인들도 정식 재판을 받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금지했습니다. 

로마황제들은 순교자들이 생겨나도 기독교가 위축되기보다 오히려 번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위기가 닥치면 대부분 숨어 지내면서 고비를 넘겼습니다. 대체로 순교자들은 사람들의 편견이나 야만적 관습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순교자들은 종종 관료들의 분노를 돋우었으며, 심지어 어떤 순교자들은 고문을 당하면서 기뻐하기도 하여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원형경기장에서 로마시민의 오락을 위해 야수들에게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들은 곧 기독교역사에 기록되어 그리스도가 몸소 겪었던 고통을 견디어 낸 본보기로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었습니다. 3세기에 테시우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로마인들이 로마의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며 이를 확인하는 증명서를 받아야한다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곧 가짜 증명서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칙령은 효력이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몇 년 후 발레리아누스 황제 (257~9)가 비슷한 칙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303년 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소위 “대 박해”를 시작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는 이들은 고문, 투옥, 또는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수 천명이 죽었지만 전체 기독교인 수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은 사람들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하늘에서 상급이 크다.” 는 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로마의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 높은 곳에 지금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로마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숨져간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승리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길바닥에 끌려다니다 죽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부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진 후 매맞아 죽었습니다.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설교했습니다.
맛디아와 바나바는 모두 돌로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네로에 의해 로마에서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이들 순교자들을 두고 불행하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들로 천국을 소유한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3:21입니다.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한 의”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의로우신 분은 한 분 예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받는 핍박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5:18-20입니다. 

(요15:18-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는 사랑을 받지만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미움, 핍박을 받으면 그것은 그들보다 먼저 예수께서 영적으로 박해를 받으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그들이 예수께 속하였고 또한 예수께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을 미리 아시는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17:14-19입니다. 

(요17:14-19)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예수 믿음으로 사는 성도 여러분이 세상에서 비록 미움을 받을지라도,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하게 보존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여러 사람들이 논쟁으로 스데반의 증거를 막아 보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논쟁으로도 스데반을 이길 수가 없게 되자 사람들을 매수해서 거짓 증인으로 내세워 고소했습니다.(행6:8-15) 스데반은 고소고발 당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택한 사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된 사건,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 태어나신 일,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로마 당국에 넘겨줘 십자가에 죽게 한 살인자였다는 사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다는 것 등을 논리정연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위선과 악행을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스데반의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듣고 마음에 찔렸지만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고 오히려 스데반에 대해 이를 갈았습니다.

(행7:54)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리고 스데반이 그러한 증거를 한 후 “(행7:55-56)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신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틀어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끌어가 돌로 쳤습니다.(행7:56-58)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행7:59-60)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이 이렇게 순교하는 자리에 사울이 있었는데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가편 투표를 던지고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을 마땅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행 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사도행전8:1을 보겠습니다.

(행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교회에 대한 아주 강력한 핍박이 시작되어 초대 교회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지만, 그것이 오히려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 지역으로 증거하는 선교가 더욱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순교에 가편 투표를 던지고 스데반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겼던 사울이 훗날 바울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천국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더욱 널리 증거하게 하고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과 그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9:15-16입니다. 

(행9:15-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 말씀대로 사도 바울은 참으로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그를 두고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은 환난, 핍박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11:23-28입니다. 

(고후11:23-28)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환난을 수 없이 당했으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옷이 찢기고 벗겨진 채로 수없이 매를 맺고, 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투옥되었습니다. 

(행16:21-24)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그러나 바울은 한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4:16-18입니다.

(고후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크고 영원한 축복에 비하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환난은 잠시,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지극히 가벼운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출세나 성공이나 건강이나 부귀영화 등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잠간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고 고통을 받았던 것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복과 상급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예수의 이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에 어떠한 박해와 핍박이 있다 해도 그것은 영원한 축복임을 믿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의”는 “믿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밤에 아브라함을 이끌어 밖으로 나가셔서 “(창15:5-6)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3:6-9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3: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롬4:3-8)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의로운 아브라함의 자손, 의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것을 믿는 사람들을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과 더불어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롬4:18-25)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됩니다.(롬9:30,4:13,고후5:21) 빌립보서3:9을 보겠습니다.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제 “내가 가진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지키는 생활, 그 어떠한 박해와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받게 되는 박해는 인내를 만들어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인해 받는 박해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는 축복입니다. 욥은 모든 재산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자식들마저 갑자기 불어닥힌 태풍에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한꺼번 다 잃어버리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여 입술로 범죄치 않았습니다.

(욥1:21-22)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자신의 환난을 두고 친구들이 위로는커녕 오히려 공박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답변도 얻지 못했습니다. 욥기23:8-12을 보겠습니다.

(욥23:8-12)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어 그의 답답한 마음, 그보다 욥의 영적 고독감을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는 말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당한 환난의 이유와 원인을 알 수는 없을지라도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환난의 길을 오직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하신 후에는 자신의 믿음을 정금같이 만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을 일정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겨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이 이렇게 믿음을 거룩하게 끝까지 지킴으로 욥은 마침내 믿음의 환난, 믿음의 시련을 통해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욥42:10-17)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믿음의 시련이 있을지라도 그 믿음을 끝까지 거룩하게 지켜 욥과 같이 갑절의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갈 바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히 11:8)입니다. 성경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나아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나 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거나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대로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보다 더 높기 때문입니다.

(사55:9-10)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복이라고 하시는 것과 사람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방법과 인간이 복이라고 누리는 방법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욕을 먹었거나, 손해를 보았거나, 핍박을 받은 것을 축복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출세하거나, 성공하며, 부귀영화를 누려야만 축복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잘 믿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출세하거나 성공하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이 제시한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 주시는 방법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사는 길을 세상에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복을 세상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시한 인류가 복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구원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마음을 지니고 사셨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복된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8복에 대한 교훈은 인간의 행복이 어떤 행위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 다시 말해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8복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8복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8복에 나타난 8가지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마음과 성품을 보여줍니다. 8복에 나타난 8가지 사는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는 방법 8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8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데반은 가장 많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며 돌멩이를 던져 죽이고자 하는 살기등등한 군중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천사의 얼굴을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고통이 심하다할지라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경력보다 신앙 인격이 천국에서 그 지위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한다해도 가해자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축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가 잘 되기 위해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2:14-21)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시편 기자도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하다며 그 유익함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편119:71-72입니다. 

(시119:71-72)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이 비록 험하고 많은 고통과 손해보는 일이 생긴다해도 그 길이 곧 “천천 금은보다 승한” 복된 길임을 믿으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이 초대교회처럼 박해와 핍박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옛날 그 형태의 핍박 못지않게, 견디기 어려운 다양한 현대적 박해와 핍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적인 것들은 투기장의 사자나 화형에 비해 매우 사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비아냥거리는 말투, 각종 신문과 매체들에게 쏟아지는 독설과 조소, 그리고 비방과 중상 등은 사소한 것이지만, 역시 매우 현실적인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증오의 표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에게는 암살자의 칼 대신 암살자의 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에도, 화형대와 고문대에 의연히 섰던 옛날의 영웅적인 믿음에 못지않은 믿음이 요구됩니다.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것’에 대해 믿음을 깨끗하게 지키는 인격적인 대응이 요구됩니다.

(잠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임을 믿고 인내하며 믿음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잠 12:19)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잠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오늘날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향해 혀를 마구 쏘아대는 일들은, 로마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과 우리 한국 기독교 초기 성도들이 당했던 박해와 핍박만큼이나 악랄한 것입니다. 예수믿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핍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한 가지 큰 이유는, 초대교회 당시처럼 실제적 적대 행위가 별로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 믿는 성도들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아니면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에 속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로 인해 수 천명이 순교를 당했지만 기독교인 수는 줄지 않고 오히려 그 믿음이 더욱 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를 변화시켰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결국 그 사회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받은 핍박이’ 세상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따르게 되는 손해와 박해를 받으려 하지 않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서 박해와 핍박을 모면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을지라도 세상과 모나지 않게 생활하여 박해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땅히 가져야 할 진리대로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성품과 인격적 결함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조롱과 핍박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며, 믿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어떠한 십자가라도 기쁘게 지고 가는 신앙생활로 장차 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받아 누릴 상이 풍성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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