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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배우긴 배우는데 (딤후 3: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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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배우긴 배우는데 (딤후 3:6-17)

때에 따라 필요하지만 디모데가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 그를 안팎으로 괴롭히는 문제가 있었다. 그 하나는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옥에 갇힌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을 지켜주셔야 하는데 그냥 옥에 들어간 것이 마음에 낙심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당대 1세기에 교회를 흔들어 놓은 영지주의라는 이단이었다. 영지주의란 쉽게 말해서 창조된 물질은 악하다는 것이다. 아이온(Aeon)이란 방사물이 신으로부터 계속 방사되어 마지막 방사된 아이온에 의해 신의 영향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 신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물질이라고 말한다. 그때 물질은 선이 아니고 악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론에 위배되는 것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선하다고 하신 것과 정반대의 논리인 것이다. 물질이 악하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입고 오신 육신도 물질이므로 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몸으로 채찍에 맞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신 것은 육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지주의의 물질이 악하다는 가르침은 기독론을 부숴뜨렸다. 

예수를 믿으면 그 분이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서 채찍에 맞고 피를 흘리시고 대신 죽으셨다는 대속론을 무너뜨렸다. 따라서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를 믿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을 얻으려면 영지주의가 가르치는 신화와 족보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특별한 지식을 가진 자라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물질은 본래부터 엄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 가령 부자는 깨끗한 부자라 할지라도 물질을 가졌기에 악하다는 상상을 한다. 가난한 자는 가령 불성실하고 도박을 해서 가난하게 되었을지라도 물질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선하리라는 상상을 한다. 육체의 배부름을 위해 먹고 마시면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상상한다. 이는 이상한 상상과 예측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의 유혹은 매력이 있게 된 것이다. 

영지주의는 신화와 족보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신화와 족보는 진리가 아니고 다른 교훈이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이 있듯 바른 교훈이 있는 곳에 다른 교훈이 역사한다. 

그래서 바울은 딤전4:7에서 신화를 망령되고 허탄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허탄하다’란 말은 늙은 노파란 뜻이다. 노파의 이야기는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화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신화는 꾸민 것인데 이 꾸며낸 신화의 내용이 족보다. 성경에서 족보는 창조 설화다. 즉 이것에 착념하면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부인하고 다른 창조 설화를 따르는 이 맛에 들면 집착하게 되고 거짓 교훈을 더 고집스럽게 추구하게 된다. 거짓을 좇는 것이 선을 좇으려는 것보다 지독하게 열심을 낸다. 저절로 복음의 대적자가 된다.

디모데가 그 당시, 내적으로 이런 영지주의의 도전을 받으니 참으로 그의 영혼이 곤고하였다. 바울이 디모데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게 한 것은 딤전1:3~4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복음이 아닌 다른 교훈의 가르침을 막는 자로 교회를 지키게 하려고 목회를 맡긴 것이다. 

딤전6:21을 보면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고 하였다. 디모데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했다. 

딤전6: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교회를 건강하게 돌보고 다른 교훈을 가로막는 사역으로 영생을 취하게 하는 이 일이 디모데의 사명이었다. 

그런데 디모데는 지쳐있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가 쓰여졌다. 두려움에 빠져 있고 이단의 싸움에 지쳐있는 디모데를 격려해서 끝까지 승리하는 믿음의 아들로 세우려는 목적으로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옥중에서 쓰게 된 것이다. 디모데후서 1장과 2장은 모두 격려의 장이다. 3장과 4장 후반부에 와서 “네 직무를 다하라”는 사역의 장이다. 오늘 읽은 디모데후서 3장은 두 종류의 배우는 자들을 비교해 놓았다. 
  

첫째 유형은 어떤 여자들이다.

딤후3:6을 보면 “어리석은 여자들”이라 하였다. 이 여자들은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라고 하였다. 

항상 배운다는 것은 Always Learning 이다. 언제든지, 어떤 경우에든지, 늘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배움으로써 발전하고 배움으로써 스승이 된다. 허나 이 여인들의 문제는 항상 배우나 이상한 가르침을 배우므로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가?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 진리는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항상 배우고 또 배워도 예수님을 인식할 수 없는 지식이라면 무용한 것이다. 세상 지식을 다 알아도 예수를 모르면 다 모르는 것이다. 세상 지식을 다 몰라도 예수를 알면 다 아는 것이다. 

만물이 다 예수로 통하고 예수로 인하여 생겼고 예수로 완성된다. 예수를 모르는 배움은 무용하다. 예수께로 이르지 못하는 배움은 목마름뿐이다. 이 시대에 성경을 가르쳐준다고 가만히 다가와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배우기에 몰입하면 어리석은 이 여자들의 배움과 같은 것이다. 이 여자들은 항상 배우나 진리이신 예수에게 나아가기는커녕 허탄함에 빠졌다. 그 허탄한 배움이 어리석은 지식을 구하게 되고 영지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구원의 참 진리를 대적할 것이다. 

출7:11~12에 보면 마치 얀네와 암브레가 애굽의 제사장으로서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대적한다. 

나의 찾고 구하고 배우는 이 배움이 딤후3:8의 말씀과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되면 나는 교회를 허는 반대자인 것이다. 교회를 허무는 여우가 되면 그 배움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사람은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다. 예수 대적자가 되는 것이 그 결론이다. 

우리는 무엇을 배우면 주님과 가까워지는가? 아니면 주님과 멀어지는가? 항상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교회를 세우는 자인가? 헐어버리는 자인가?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 유형은 디모데이다.

어리석은 여자들과 배운다는 점에서 같았다. 그러나 그의 배움은 1.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딤후1:5을 보면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였다. 할머니의 믿음을 배우고 어머니의 믿음을 배우고 대를 이어 믿음을 배운 디모데는 거짓없는 믿음, 진실하고 순수한 믿음을 배웠다. 우리는 가정이 배움의 자리가 되는데 복음에 적대자를 불러들이는 집이 되어서는 안된다. 
  

2. 디모데는 언제부터 배웠는가?

딤후3:15 “어려서부터”라고 하였다. 행16:1을 보면 디모데는 비록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으나 어머니는 믿는 여자였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어도 믿음을 지닌 어머니 슬하에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가 중요하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 로버트 플검(Robert Fulghum) 목사의 책,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제목 그대로 유치원, 어려서 배운 것이 80세까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스펜서 닥터에 의하면 미국 기독교인의 입교 연경을 조사하였다. 548명은 20세 이전, 337명은 20~30세 사이, 96명은 30~40세 사이, 계 15명이 40~50세, 그리고 50세 이후의 입교자는 4명이었다. 

교인이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되는데는 어려서 배워야 한다. 교회에서 하는 어머니 교육, 성경적 부모교실은 아주 소중한 교회의 프로그램이다. 또한 여름성경학교도 중요한 시간이다. 어려서 배우도록 하라.
  

3. 디모데는 무엇을 배웠는가?

믿음을 배웠다면 그것은 다른 말로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딤후3:15 “성경”이다. 성경을 배우면 성경은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 

딤후3:16~17을 보면 성경은 
①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있게 한다. 
②의로 교육하게 한다. 
③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 
④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게 한다. 

그런데 성경을 배워도 어느 한 권의 성경이 아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오직 한 권의 성경만 가르치는데 건강하지 못하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하였다. 66권 성경, 모두가 내 영혼에 유익한 교재다. 디모데가 배운 것은 모든 성경이었다.

구원의 책,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축복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가 나오기 전 성경은 우리들에게 없었다. 왕, 귀족도 성경이 없었고 교회만 있었다. 성경을 가지고만 있는 것도 평민들의 소원이었다. 

1000년전 성경 편사자는 제1의 신랑감 후보였다. 성경 본문으로 사본을 만들기 위해 100행을 베끼는데만 한 달이 걸렸다. 마태복음 사본은 약 2,600행이다. 일곱 필사자가 다 베끼려면 26개월이 걸렸다. 노무자 품삯 100만원만 계산해도 2,600만원이 든다. 이것을 가지고 66권의 필사를 계산하면 15억원이 든다. 성경이 없는 나라에서는 지금도 방송에서 들리는 성경 소리를 받아 적어서 사용한다. 얼마나 성경이 귀한 것인가? 

그런데 그 안에 메시지가 더욱 귀한 것이다. 나는 성경 때문에 복음이 소망임을 확신한다. 로마서를 읽다가 부서졌다. 로마서 3장에서 걸려서 무릎을 꿇었다. 성경이 아닌 무수한 다른 책이 있지만 무릎을 꿇게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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