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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갈 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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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갈 1:11-24)
    
오늘은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인 김세윤박사가 지은 책 중에 ‘The Origin of Paul's Gospel’- ‘바울복음의 기원’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81년에 독일어로 쓰였고, 1982년에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되었고, 1994년에 와서야 우리 한국어로 번역된 책입니다. 한국인 학자가 저술한 책인데 한국 사람에 의하여 번역되었습니다. 그만큼 김세윤박사는 독일과 미국에서 바울의 연구에 대하여 가장 인정받는 학자요, 이 책을 저술함으로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했습니다. 김박사는 바울을 연구하면서 바울이 가진 복음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은 것은 다메섹 회심 사건으로 출발한다고 주장합니다. 

김박사는 바울을 자세히 연구하였습니다. 바울이 기독교회를 박해하고 나아가 기독교회를 박멸하려고 나선 것은 하나님과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 특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들려오는 예수라는 사람과 기독교회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이단이요, 사교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술책이라고 보았습니다. 

김박사는 바울을 연구하면서 그가 회심할 수밖에 없도록 사전에 준비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학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가 회심하기 전에 예수라는 사람과 기독교회가 주장한 케뤼그마(핵심 진리, 구원의 복음)를 어느 정도는 전해 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예수는 메시아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 ‘주’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모세의 율법이 구원의 방법으로는 근본적으로 평가 절하되었고, 어떤 부분은 완전히 폐지되었다”는 예비지식이 있었고, 이런 예비지식이 회심을 도와주는 어떤 ‘준비’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계에서는 바울이 회심하는데, 심리적인 준비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스데반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 박해 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당히 죽어가면서도 신앙을 지켜내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일들이 바울에게 어떤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회심에는 교회를 향한 광적으로 박해하는 것은 그동안 유대교에 대한 그의 억눌린 내적 회의의 표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박사는 이러한 예비지식이 바울의 회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완전히 유대교인이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바울의 회심에 있어 기독교회가 말하는 단편적인 진리나 복음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죽어가던 사람도 감동을 주지 못하였고, 바울은 유대교에 대한 조금의 회의도 없었고, 기독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홀연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립니다.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었는데,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극적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극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위대한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기독교회의 성도들, 주의 제자들에게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기독교회를 배교해야 하고, 자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과 살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울이 행22:4에서 간증하는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도 죽일 수 있었고,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없고 남녀를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고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행26장에 보면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고 또 죽일 때에 그는 찬성투표를 하였습니다. 

그가 간증하는 말을 들어보면 모든 회당에서 유대인들로 예수를 믿거나 기독교회로 전향할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 번 형벌을 가하였고, 예수에 대하여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심하게 박해하였으면 사도들을 제외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외국으로 도망가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살기 위하여 도망친 것이 예루살렘을 넘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에게서 가서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요청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만일에 기독교회에 몸을 담거나 예수를 믿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찬란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습니다. 단순히 주변이 밝아진 정도가 아닙니다. ‘홀연히’라는 말은 헬라어로 ‘엨사이프네스’라고 하여 ‘갑자기’, ‘뜻밖에’, 무엇을 예상한 바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여기 사울을 둘러 비춘 빛은 좀 더 강한 햇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영광스러운 ‘쉐키나’의 빛이었습니다. 둘러 비춘다는 말은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영광이 물리적인 현상으로 사울에게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둘러 비추는 그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요, 초자연적인 역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땅에 바짝 엎드려 있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사울을 부르시는데, 두 번이나 정확하게,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사울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빛 가운데 사울을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엎드러졌는데, 사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정말 하나님을 박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율법을 보호하고 수호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박해한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속에 말씀하시는 이 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시라면 사울을 책망하실 수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심히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사울은 지금 자기를 찾아오시고 자기 앞에 계시는 그 분에게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부르시는 그 분에게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주여”라는 말은 “퀴리에”라고 하여 구약에서 하나님에게 붙이는 호칭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왕을 ‘나의 주’라고 불렀습니다. 단순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는 누구이다, 나는....이다”라는 ‘에고 에이미’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실 때에 사용한 문구였습니다.

사울은 구약의 헬라어 성경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헬라어로 된 70인역의 구약 출3:14에 “에고 에이미”라는 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에서 회심 사건을 말하면서 예수님이 자기에 나타나셨다는 것, 그리스도의 현현을 복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기가 박해하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속에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자기가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고 박멸하려던 예수, 그 예수가 자기를 죽이시지 않고 살리면서 찾아오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 사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이 바울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신 사건을 바울 복음의 기원으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다른 말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합니다. 죄인의 삯은 사망인데, 자기가 주님을 박해한 것으로 말하면 당연히 죽어야 하고 심판에 이를 것인데, 용서하시고 찾아오시는 복음,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주님을 저주하고 대적하였는데, 그래도 버리시지 않고 찾아오시는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김세윤박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사건을 예수님의 계시로 보고 이것을 바울 복음의 기원으로 보았습니다. 

갈1:11-12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김박사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롬1:4) 바울에게 계시하신 것이었다.(갈1:16)”고 합니다. 

롬1:4을 보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큰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것을 만 천하에 선포하시고 드러내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갈1:16의 말씀입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에게 계시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광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다시 김박사님의 핵심적인 해석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이 객관적이고 외적인 사건은 바울 존재의 중심부에 영혼을 뒤흔드는 영향을 주었다(고후4:6, 갈1:16). 그것은 바울에게 내적인 빛을 얻고(고후4:6) 그가 율법으로 획득한 의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림을 경험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활하고 높임 받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고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바울 자신의 의를 포기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이었던 것이다(빌3:7-10).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에 대한 그의 잘못된 판단(고후5:16, 갈3:13)에서 그를 하나님의 높임 받은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주(主)로 아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고후5:16, 갈1:16, 빌3:8)으로 바뀌게 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의 생애에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후5:17).”라고 쓰고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수고하던 유대교의 열정과 율법의 효능에 대한 모든 전통과 가치를 내려놓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완전히 새롭게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회심과 주님을 만나는 체험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은혜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었는데, 바울이 사도가 되었습니다(고전15:8).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의 현현, 주님이 나타나심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을 임명하신 순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사건을 회상하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탁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살전2:4에서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부르셨다고 증언합니다. 

갈2:7에서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라고 하셨습니다. 

고전1:17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바울이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온전하신 구속사의 핵심으로 정리하는데, 3년이란 세월을 보냈습니다. 

바울이 하루아침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하시는 은총이 무슨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3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고, 사도들의 전통과 합치되어야 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1. 바울은 말씀으로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13-18)

13-17절 말씀까지 읽으며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때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혈육의 친척들을 만나지 않았고, 먼저 된 사도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르신 다메섹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3년을 준비하면서 말씀으로 정립하는 시간,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깨달아 정립하는 시간, 준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18절입니다. “그 후 삼 년 만에”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삼년 만에”라는 말은 바울이 회심하고 나서 3년이 지났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고 예수님이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 사건을 설명하고 있으니 문맥으로 보면 회심한 후로 3년을 보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베드로 사도를 만나기까지 3년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사귐도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적인 진리를 구축하였습니다. 자신의 신앙, 바울의 신학과 사상을 정립하는데 그렇게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80년 생애 중에 영적인 깊이와 너비와 높이를 가지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3년의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그 말씀에 깊이를 더하는 영적인 성숙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구, 목사님, 참 좋은 말씀이지만, 먹고 사느라고 어디 시간을 낼 수 있나요?”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성정이 같은 바울은 3년이란 시간을 먼저 떼어 성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 구약의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신약에서의 성취의 말씀을 비교하면서 나의 신학으로 정립하여 합니다. 로마서를 보면 구약적인 사고로 출발하면서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의신칭의의 정통신학을 확실하게 정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요, 이것을 복음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혼자는 잘 믿는 것 같은데, 불신자들 앞에 서면 작아지고 졸아집니다. 그래 가지고 이단에 맞서서 담대히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 이제는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만의 복음이라면, 사도적인 전통과 맞지 않고, 이단 사설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3년 동안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나만의 복음이고, 사도들이 받을 수 없는 사적인 견해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기독교회의 사도들을 만나서 교제하고 그들과 말씀을 나누어야 했습니다. 

18절입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15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사도 베드로, 교회의 초석이 되신 사도, 반석이라고 하는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게바는 아람어도 반석이라는 뜻이요, 베드로는 헬라어로 반석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의인이라는 칭송을 받는 사람이요, 유대인들로부터 매우 존경받는 기도의 사람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의롭게 사는 사도였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두 기둥과 같은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서 정통신학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복음으로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도들이 지금까지 주장하고 전파하는 복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을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독불장군 식의 신앙이라면, 교회를 해치고 독선과 아집으로 교회를 어지럽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 구원받은 신학이라면 전 세계 모든 이들이 받아 구원받을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단과 사이비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교주를 신봉하고, 성경 말씀이 아니라 직통계시를 주장하고, 주님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인봉하신 날짜로 자기는 안다는 식으로 사람을 현혹하게 됩니다. 


3. 바울은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20-24절을 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은 바울이 자라나고 공부하였던 자기 고향이었습니다. 그동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율법을 공부한다고 하더니 기독교회를 박해하고 진멸하려고 하던 바울, 그가 자기 고향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신실하게 새로운 피조물로 살고 있습니다. 복음전도자는 자기 집, 자기 고향, 자기의 친구들 자기 동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정말 변화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기의 얼굴로 복음을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면 진리를 간직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바울복음의 기원이 되는 다메섹의 회심의 사건으로 바울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진리를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또 복음의 증인으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말씀으로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바울 같은 석학도 3년이었습니다. 그가 깨달아 알게 된 진리의 말씀은 온 교회가 공유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먼저 복음을 깨닫고 나의 신학으로 정립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그 복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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