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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서 (시 8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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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와 '아직'의 사이에서 (시 85:1-13) 

<슈베르트>의 작품 중에 8번 교향곡을 흔히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부릅니다. 이곡은 그가 25살이던 1822년에 쓴 것입니다. 이 곡이 이렇게 불리는 이유는 1악장과 2악장만 완전하게 작곡 되었고, 3악장은 아홉 마디만 오케스트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미완성이라고 하지만, 1악장과 2악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줍니다. 평생토록 슈베르트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브람스>는 이 곡에 대해 말하기를 <이 곡은 양식적으로는 분명히 미완성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 

이 두 악장은 어느 것이나 내용이 충실하며, 그 아름다운 선율은 사람의 영혼을 끝없는 사랑으로 휘어잡기 때문에 누구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온화하고 친근한 사랑의 말로 다정하게 속삭이는 매력을 지닌 교향곡을 일찍이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도 음악처럼 미완성일지라도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렇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건 우리의 영혼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성경을 따라 <과거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 때 우리들은 본래 죄인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3절은 우리 가 본래 어떠하였는지를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는 본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죄를 지으며 살았고, 이로 인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 아픈 과거 이야기는 놀라운 반전을 이루어 계속되었습니다. 그 반전이란 이런 희망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을 이어서 보면 이렇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아멘! 

이 반전은 우리로 하여금 기쁨으로 <현재 이야기>를 이어가게 만들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현재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8장 15절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아멘! 

여러분, 유감스럽게도 많은 분들이 이 놀라운 은총을 받았지만, 여전히 과거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죄인인 것처럼, 깊은 죄책감에 빠져,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분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난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고, 아직 신앙생활이 미숙한데, 그런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고아원에 살던 한 아이가 이미 자녀가 여러 명 있는 어느 부부에게 입양되었다고 해 보세요. 이 부부는 아이를 자신들의 가족부에 등록했습니다. 이젠 합법적으로 그 가정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젠 그 집에서 자고, 먹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이의 입에서 <아빠, 엄마>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고, 그 댁의 자녀들에게도 <형, 누나>란 말이 아직 어색합니다. 그 가정의 분위기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아이가 그 집 아이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 아이는 그 집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 집 자녀가 된 것은 이미 이루어진 현재의 사실입니다.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시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이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령님께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당당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우리에게 <넌 구원 받았느냐? 아직도 그렇게 형편없는데, 구원은 무슨 구원을 받았겠느냐?>고 물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난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비록 자신이 볼품없는 존재처럼 여겨진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자 하나에게까지 천사가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을 보면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존귀합니다. 이 은총을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오늘 본문은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고라 자손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셋째인 레위 지파 소속으로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이들이었습니다. 이 시는 그들 중 누군가가 지은 것입니다. 

이 시 역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주전 586년에 유다 왕국이 바벨론 제국에 멸망하여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살다가 주전 538년부터 시작된 예루살렘 귀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 역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엮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과거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과거 이야기 역시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우상을 숭배했고,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며,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과거에 죄로 인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로 인해 징계를 받았고,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을 때 그들의 <현재>는 어떠합니까? 그들에게도 반전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구원으로 그들은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먼저 1절을 읽어 보실까요?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이게 그들이 받은 구원입니다. 지금 그들은 더 이상 바벨론에 있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더 이상 포로가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죄와 허물로부터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그들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우상숭배를 비롯한 온갖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들의 죄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2-3절을 읽어봅시다.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이게 그들의 현재 이야기입니다. 

현재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사하게 만듭니다. 기뻐하며 춤을 추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 이미 부르심을 받은 사람, 이미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은 사람,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 이미 축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 이루어진 이야기>입니다. 이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이야기>, <이미의 이야기>에는 2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2절은 1절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게 문제입니다. 

1절이 구원의 기쁨으로 부르는 노래라면, 2절은 안타까운 슬픔의 노래입니다. 1절이 감사의 노래라면, 2절은 탄원의 노래입니다. 1절을 부를 때의 마음은 <부족함이 없도다>란 마음이라면, 2절을 부를 때의 마음은 <난 어찌 할 수 없어요>란 아쉬움의 노래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2절이 이처럼 힘든 노래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바벨론에서 구원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의 상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구원을 받아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너무 기뻐서 춤추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서의 삶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여전한 혼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직 유다 왕국이 독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바벨론 땅에서 포로의 신분으로 살지 않고 예루살렘에 왔을 뿐, 여전히 그들은 패망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또 돌아와 보니 그 땅에는 여러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북 왕국을 주전 721년에 정복한 앗수르는 자신들이 정복한 백성들을 사방으로 이주하게 하여 섞여 살게 함으로써 민족의 순수성을 잃게 하여 통치에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오면서 생활 풍속이 섞였고, 서로 결혼하다보니 피가 섞였고, 신앙도 우상숭배와 여호와 신앙이 뒤섞여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치안도 불안했습니다. 비록 정부에서 총독을 보내 다스리게 했지만, 지방 토호들의 세력을 막을 힘이 부족했습니다. 치안 부재 현상은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왕의 허락을 받아 성전 재건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방 토호들이 공사를 방해하여 오랫동안 중단시킨 사건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또 사람들이 포로로 떠난 후 오랫동안 경제가 붕괴되어 있었습니다. 농토는 황폐해졌고, 무역 거래가 끊겼고, 사회 시설은 무너진 채로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습니다. 부푼 가슴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백성들은 이 힘든 상황에서 통곡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르는 <현재 이야기>의 2절은 슬픔의 노래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부른 슬픔의 노래입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비록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아직 분노를 다 거두지 않으셨습니까? 영원히 노하지 마시고 살려주십시오.>란 말입니다. 

<현재 이야기>의 2절이 슬픈 것은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으로 왔고, 이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기쁨의 1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분명히 죄를 용서받았고, 분명히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미 구원받기는 했으나, 아직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생각이 여전히 부정할 때가 많습니다. 육신의 정욕에 빠집니다. 안목의 정욕에 흔들립니다. 이생의 자랑거리에 도취되어 자신을 망각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여전히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못합니다. 과거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게으르고, 정직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늘 오락가락합니다. 또 여전히 고아원에 있는 아이처럼 주눅 들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는 <이젠 내 아들이니 당당하게 살라>고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과 패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합니다. 

이런 슬픈 2절은 제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목양실 책상머리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 일에만 집중해야 함을 잘 알지만, 여러 걱정으로 마음이 분산될 때가 많습니다. 은혜의 깊은 자리에 이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직 넉넉한 인격을 갖지 못하여, 인간적인 감정에 따라 휘둘릴 때가 많습니다. 때때로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믿음의 기도보다는 인간의 생각으로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때로는 거룩한 기쁨을 잊고 근심에 빠집니다. 

이런 일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길 원하지만, 실제로는 육신의 법을 따를 때가 많음을 한탄했습니다. 바울도 때로는 다투었습니다. 바나바와 다툰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때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늘 자신의 부족 때문에 안타까워했습니다. 

교우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분명히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건만, 말과 행동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배 생활이 잘 안되어, 주일 오전 예배로 때우듯 하고, 기도에 집중할 수 없고, 말씀을 읽는다 하면서도 말씀과 상관없이 살고, 좋은 남편과 아내로,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좋은 아들과 며느리로 살고 싶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일터에서 낙심하고, 때로는 자신이 무능한 것처럼 여겨지고, 때로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교만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원받은 사람답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낙심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현재 이야기>의 2절, 다시 말해 <아직 아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 완전하지 못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직 자녀답게 살지 못합니다. 이미 죄의 용서를 받았으나, 아직 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여 또 넘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아름답지만, 우리의 미완성 교향곡은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이대로 <이미>와 <아직 아님> 사이에서 머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하기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더욱 더 기도하고, 그 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고라 자손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볼 것을 다짐합니다. 

8-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시인은 다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 어중간한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이대로 진노를 남겨두지 않으실 것이다. 반드시 화평의 메지시를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자.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가깝다. 현재가 힘들수록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들이 <아직 아님>의 상태를 벗어나 <완성으로 나아가려는 기도>가 우리의 것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도 <미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미래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까요? 아직 부족한 우리가 더욱 완전해지는 것, 예배생활도 힘들어 비틀거리던 사람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인격과 삶이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것, 날마다 성령님 안에서 현실의 경제적, 가정적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나가는 것, 주님의 복음을 위해 더욱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 등 등, 이것이 미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중간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0-13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인애와 진리로, 의와 화평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 아님> 사이의 어중간한 자리에 우리를 방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완전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완성된 교향곡>을 만들어 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더욱 믿음으로 사십시오. 어중간한 신앙생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벗어던지십시오. 더 뜨겁고 확실하게 신앙의 대장부가 되길 기원합니다. 

이를 위해 더욱 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실 것이며, 인자한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실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더욱 성숙하고 온전해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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