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간증이 있는 삶 (딤전 1:12-17)

첨부 1


간증이 있는 삶 (딤전 1:12-17)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한 마디로 ‘간증이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이 약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이 약속대로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행하신 소중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행하신 소중한 체험들이 ‘간증거리’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이 예언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대로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행하신 일들을 증언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행하신 일들을 증언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증 거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간증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간증이 있는 삶입니다. 

간증이 있는 삶은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살기 때문에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축복입니다.
간증이 있는 삶은 그 자체로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체험을 간증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라는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눔으로 믿음을 갖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간증이 있으십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살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신 체험을 나누며 살고 계십니까? 
이것은 축복이며 또한 명령입니다. 이 복을 누리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간증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간증할 때 사탄이 개입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탄이 간증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간증을 잘못되게 만들어버립니다.

사탄의 개입으로 잘못된 간증의 대표적인 예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 자랑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간증할 때 우리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부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이야기할 때 자기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런 일을 행하셨다고 말하게 합니다. 자기가 남다르게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간증이 주님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고 결국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 간증이 자기 자랑이 되게 만듭니다.
다른 하나는 과장입니다. 사탄이 우리가 간증할 때 과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부축입니다. 특히 간증을 듣는 사람들을 더 감동받게 하고 더 놀라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미혹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작게 또 때로는 크게 과장을 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없는 사실도 가상으로 만들게 합니다. 결국 간증을 거짓이 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간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간증을 잘 해야 합니다. 자칫 자기 자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간증 내용이 과장이 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행하신 그대로 간증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그야말로 간증거리가 정말 많은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간증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간증 속에서 간증하는 삶의 모범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증할 때 귀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생각이 있는 간증

오늘 본문의 간증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에게 편지에 써서 보낸 것입니다. 특히 자신을 대신해서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한 간증입니다.
12절에서 이렇게 간증을 시작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바울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직분을 맡겨신 것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간증거리가 참 많은 사람입니다.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간증거리가 저 산처럼 높습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했던 목회의 성공담이 저 바다처럼 넓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간증거리 중에 유독 자기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디모데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이제 목회를 막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자칫 기도 응답의 그 놀라운 기적을 간증하면, 본격적으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디모데가 위축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의 위대한 성공담을 간증하면, 목회 초년병으로서 디모데가 두려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디모데에게 꼭 필요한 간증을 택해서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증은 생각이 있는 간증이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을 배려하는 간증이어야 합니다. 듣는 사람들을 돕는 간증이어야 합니다.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간증이어야 합니다.

한 권사님 생각이 납니다. 이분은 아들 셋을 모두 서울 대학교에 입학시킨 분입니다. 그것도 둘은 서울 법대에 다른 하나는 물리학과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셋이 모두 신앙이 참 좋습니다. 이 권사님의 남다른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다른 사랑의 교육방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 교육에 대한 남다른 간증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아들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넌지시 권했습니다. “아들 교육에 대한 간증을 나누시지요. 젊은 엄마들에게 큰 도움이 될텐데요...  ”
이 권사님 답이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덕이 되지 않습니다. 자랑이 되고,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 이 권사님의 성숙한 신앙태도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간증이 생각이 있는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간증의 열매를 깊이 생각하는 간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은혜를 아는 간증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얻게 된 것도 귀하고, 사랑을 받게 된 것도 귀하지만, 무엇보다도 주의 은혜를 받은 것이 정말 귀하다는 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우선 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전에 자기는 ‘비방자’였다는 것입니다. 행 26:11을 보면 바울은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목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전에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했고,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게 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전에 자기는 ‘박해자’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을 찾아서 남의 나라 다메섹까지 쫓아가서 괴롭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자기는 ‘폭행자’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을 폭행했습니다. 체포해서 투옥시켰고, 또 스데반을 순교의 자리에 이르도록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바울은 자기는 자격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은 이것을 은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자격 없는 자기가 왜 이런 대우를 받는지 너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왜 저입니까?”(Why me?) 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안다는 것은 자격 없는 자기를 택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왜 저입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김춘근 박사라는 분이 쓴 [왜 나입니까?](Why me?)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신의 간증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분의 간증은 두 번의 ‘Why me?’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Why me?는 은혜를 알지 못할 때 물었던 물음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깨닫고 난 뒤 다시 Why me?를 묻습니다.
이분은 단돈 200불과 가방 셋만 가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108:1의 경쟁을 뚫고 LA 페퍼나인 대학의 교수가 됐습니다. 2000여명 되는 교수 가운데 최우수 교수상도 받고, 대학 총장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암선고를 받게 됩니다. 피를 토합니다. 이분이 너무도 비통해서 따지듯 물었습니다. ‘Why me?’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완치가 됐습니다. 알리스카 주립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10년 동안 주지사의 경제특별고문으로 일하였습니다. 주정부로부터 ‘경제개발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습니다. 미주 한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신앙 회복운동을 펼쳐서 미국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JAMA(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라는 단체를 만들고, 예수 대각성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분이 이제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Why me?’ 하나님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저를 부르셨고, 저를 사용하십니까? 그러면서 이분은 바로 이것이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는 하나님께 ‘Why me?’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증은 바로 이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겸손으로 나누는 간증

오늘 본분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자기가 죄인 중의 첫째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가장 큰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말이 과거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은 과거에 정말 죄인 중의 괴수라 할 수 있었습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주를 위한 일꾼입니다. 사도 중의 사도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주님의 뜻을 잘 알고,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도 자기가 여전히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 그 누구보다도 자기가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기독교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방 지역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사람입니다. 교회도 가장 많은 수를 개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장 권위있고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고백 정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 중의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한 마디로 겸손함 때문입니다. 비록 자기가 영적 지도자이지만 바울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지도할 위치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6절을 보면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하심이라”자기가 지금 이런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것은 주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늘 주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았습니다. 오늘도 부족하고 연약한 자신을 주님께서 참아주고 계신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오늘도 자신이 이렇게 사역하고 있다는 점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겸손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인도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에게서도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 떠날 때 곁에 있던 사람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당신 장례식 때 성경 어느 곳을 읽으면 좋겠습니까?” 캐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 같은 죄 많은 인간에게 장례식에서 뭐라고 말해 준다는 것조차 과분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구지 성경을 읽어야 한다면 시 51:1을 읽어 주시오” 즉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그리고 그는 자기의 비문에 이렇게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월리암 캐리 1761년생 죄 많고 약하고 능력 없는 벌레인 나는 당신의 긍휼 하신 성수에 기대하고 잠드나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참아주시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참아주시기 때문에 이렇게 사역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비록 남다른 영적 지도자이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 서면 벌레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서면 다를 것 없는 아니 남보다 더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사람 앞에서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의 제자요 영적인 아들에게 자기가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허물을 감추고 자기의 업적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여전히 겸손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캐리에게서도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원래 구두수선공 출신이었습니다. 인도에서 성공적으로 선교사역을 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의 옛 이력을 안 뒤 그를 조롱했습니다. “당신은 구두 짓던 사람이 아니요” 그 때 윌리엄 캐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구두를 짓지 못하고 겨우 수선을 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겸손으로 나누는 간증이 큰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간증이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간증은 올바른 간증이어야 합니다. 생각이 있는 간증, 은혜를 아는 간증, 그리고 겸손으로 나누는 간증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간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소중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