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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못 박고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 (시 33:18-20, 행 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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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못 박고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 (시 33:18-20, 행 4:10-12)서론 

이순신장군을 성웅이라 칭합니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에 옥포해전, 한산도해전, 부산포해전, 당황포해전 등을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한산도에는 두억(頭億)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순신군대가 자른 왜군의 머리가 그 마을에 억 개나 밀려왔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왜군은 이순신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있다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본영이 있는 한산도 제승당에 왔습니다. 한산도에는 왜군이 얼씬도 않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이라 불리는 곽재우장군도 얼마나 용맹했던지 왜군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시대에 김두한의 이름만 들어도 왜경들이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월남전에서는 한국군의 이름만 들어도 베트콩들이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왜 벌벌 떱니까?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인물이 떨 만큼 힘이 있고 용맹하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수아 2:9에는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라고 합니다.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서 들어가려고 할 때에 여리고의 왕과 백성들이 이스라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 떨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름은 내 자신을 말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 전체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가지는 자기의 것이 이름입니다. 정해준 이름은 대개는 죽을 때까지 가져갑니다.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죽은 후에도 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이름을 잘 보존하고, 훼손당하지 않게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유대인의 성명철학에는 사람은 지어준 이름대로 산다는 사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자신이나, 자신의 혼이나, 자신의 명예나, 자신의 권위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국인들도 이름에는 의미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짓지만 좋은 뜻을 가진 자를 선택하여 이름을 짓습니다. 
  
위대한 교부이며 설교가인 크리소스톰은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지어주라, 어떻게 하든지 선하게 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을 잘 지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 이름대로 된다”(people become what you call them)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은 이름도 잘 지어야 하지만 “망할 것”이란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그렇게 부르면 망합니다. 대신 “흥할 것”이라고 많이 해야 흥합니다. 
  
이름에는 의미가 있고, 뜻에 따라 이름을 짓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보면 이름에 뜻이 다 있습니다. 레아가 첫째 아들을 낳고 ‘보라 아들이라’는 뜻으로 르우벤이라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낳고 ‘들으심’이라는 뜻으로 시므온이라 지었습니다. 셋째 아들을 낳고 ‘연합’이라는 뜻으로 레위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들을 낳고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으로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라헬의 몸종인 빌하는 라헬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가 아들을 낳아 ‘억울함을 푸심’이라는 뜻으로 단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들을 낳고 ‘경쟁함’이라는 뜻으로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아들을 낳고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가지신 이름인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대로 이루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옛날에는 지방자치제 규약으로 ‘향악’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상민에게는 태형 40대를 때렸고, 양반들은 때릴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써들고 앉자 있게 하는 명예형을 내렸습니다. 이런 이름에 가하는 형벌을 ‘만좌명책’(滿座名責)이라 불렀습니다. 

역사에 보면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이름을 엉터리로 적어놓고 무당으로 하여금 저주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고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은 고귀한 구원의 능력이 있는 이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적으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했을 때에 관원들이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그 물음에 대하여 해답을 주었습니다. 그 해답을 통하여 오늘에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이 건강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4:10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합니다. 너희는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너희”가 죄인임을 알라고 하는 경책인 동시에 “하나님”은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악은 언제나 죽이려 하고, 선은 언제나 살리려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죽음이나, 아픔이나, 고통을 원치 않으십니다. 죽이려는 종교를 보세요. 신의 이름으로 테러와 전쟁을 일삼는 종교는 바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을 원치 않고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건강하게 하십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에 대한 해답이 주는 의미입니다. 첫째는 베드로가 “내가 고치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고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손을 이용하지만 사람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친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6:17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치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낫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치유가 있는데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기가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환자를 때리고, 묶어 놓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지난 주간에도 익산의 어느 목사가 아이를 고친다고 데려다놓고 굶기고 학대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7:22에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기가 행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성경에 19번이나 있습니다. 고치시는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 예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 가운데 가장 소박한 이름에도 치유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나 하나님의 아들 같은 위대한 이름은 말할 것도 없이 더 큰 힘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에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치유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은 영혼을 살게 할뿐만 아니라 육체가 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 장로님은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영혼도 구원받고 육체도 강건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병환 중에 회개하고 육체까지 건강해진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사람이 육체를 외면하고 살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 모두가 육체로 구원받고 영적 육체로 다시 그리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에 보면 벤허가 친구 멧살라의 모함으로 노예로 잡혀가고 어머니와 누이가 한센병에 걸려 굴 속에서 삽니다. 마차경기로 멧살라를 이긴 벤허가 집으로 돌아오다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시는 것을 보고 벤허가 일으켜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비가 내리고 번개가 비치는 순간 어머니와 누이의 한센병이 낫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틴어로 ‘cure’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치유의 의미와 함께 돌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예수님의 돌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고치시고 심령을 돌보심을 의미합니다. 육체가 치유 받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치유의 참 의미가 아닙니다. 
  
치료는 “누군가에게 통하는 방법이 있지만 누구에게나 통하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는 모든 사람에게 통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지 못할 병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몸을 깨끗하게 치유 받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의 이름 외에 구원받을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줄 수 있는 신인(神人)은 없습니다. 대신 죽을 사람도 없고, 다시 사실 하나님의 아들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요즘에 ‘기독교는 너무 폐쇄적이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기독교의 폐쇄성이나 기독교의 독단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자가 없다는 것이 폐쇄적이고, 독단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것이 폐쇄성이고 독단이라면 기독교는 그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타협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문을 닫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활짝 열려 있습니다. 대화도 합니다. 교류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란 사실은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예수님 외에 많은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구원자는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예수님 외에 누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대신 죽으셨습니까? 누가 다시 살아나셨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란 헬라어로 ‘헤 소테리아’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사람을 고친 육적 구원뿐만 아니라 죄와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 전체가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받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며, 모든 사람이 육적 영적 완전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21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16에도 마찬가지로 구원의 보편성을 말씀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그를 믿는 자”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구원을 받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단어의 하나가 ‘단번에’(once for all)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만대를 위하여 단번에’라는 뜻의 헬라어 ‘에파팍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에 구원이 되는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2장에는 바울이 천부장 앞에서 변증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16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에 하나님 우편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 예수님의 이름에 부탁하면 우리의 영혼을 받으십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에 각자의 영혼을 부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을 받으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건지다’, ‘도로 사다’, ‘회복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표를 구할 경우에 ‘표를 얻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구원이란 하늘나라로 가는 승차권을 얻은 것입니다. 설날이나 추석 때에 귀향열차나 비행기나 버스의 승차권을 얻는 것은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귀중한 표입니다. 귀한 음악회나 프로야구결승전의 입장권을 누군가가 구해준다면 엄청나게 기뻐할 것입니다. 구원은 가장 귀한 하늘나라의 입장권 표를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어디엔가 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승무원이 승객의 기차표를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표를 호주머니에서 찾고 있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는데 승무원은 “아인슈타인 박사님, 저는 당신을 잘 압니다. 속이고 타실 분이 아닌데 표를 못 찾는 걸 보니 있는 줄로 알고 그냥 갑니다” 하더니 자리를 떴습니다. 

승무원이 검표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아직 찾고 있었습니다. 승무원은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걱정 말고 표를 찾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그게 아닙니다. 내가 내릴 역이 표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어느 역에서 내리는지 알 수 없어서 표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천재들은 이런데 소홀한 경우가 많습니다. 목적지를 알지 못하면 내릴 수 없습니다. 목적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데서나 내립니다. 
  
얼마 전에 KTX를 타고 전주에 설교와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그 KTX는 여수까지 가는 기차였습니다. 갈 때는 혹시 내가 내릴 역을 지나칠까 조바심이 나서 잠이 오지 않고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는 용산이 종점이기에 안심하고 잠도 자고 쉴 수가 있었습니다. 지나칠 염려도 없고 못 내릴 염려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종점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가 예수님의 이름인 것을 알기에 늘 평안합니다. 자유합니다. 즐겁습니다. 이런 평안과 자유함이 하나님이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결론 

프랑스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에 배낭 속에 두 권의 책을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성경과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파스칼이 ‘팡세’를 집필한 동기를 어느 책에서 보았습니다. 파스칼의 여동생이 불치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환상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나 그녀의 눈을 건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동생이 파스칼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오빠, 이상한 일이 있어요. 기도하는 가운데 십자가가 나타나 내 눈을 건드렸는데 방금 내 눈이 고쳐져서 잘 보여요”. 

이때 파스칼은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철학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 파스칼이 죽은 후에 그의 옷에서 이상한 가죽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파스칼이 입던 옷깃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적은 가죽조각을 지니고 다녔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 육체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함께 고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우리를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힘입니다. 영생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게 하신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을 의지하여 우리 육체가 치유 받으며, 우리 영혼이 영원히 사는 구원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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