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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안에 나타나는 말세의 징조 (벧전 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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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 나타나는 말세의 징조 (벧전 4:12-1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양과 염소가 있어서 교회 나오지만 영생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영벌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심판은 앞뒤 문맥을 볼 때 영벌을 받는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교회인데 교회에서 심판이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교회 나온다고 다 구원을 받고 다 천국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갑니까? 17절 뒷부분에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교회만 나와서는 안 되고 복음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학은 믿음으로 구원 받고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이신득의 혹은 이신득구의 신학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복음을 믿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학과 본문에서 가르치는 진리가 서로 상충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항상 같이 다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면 당연히 복음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약 2:22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3명의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답니다. 첫째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듣는 남자가 성공한답니다. 둘째는 아내입니다. 남자들이 보통 아내의 말을 무시하는데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내비게이션 안에 있는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말보다 복음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복음이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입니다. 복음의 적용은 죄 없으신 그분의 공로를 나의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고전 1:30 말씀대로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복음에 순종한다는 말씀은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그 믿음의 도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발에 등이며 길에 빛이 됩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이 세상길을 갈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빛을 비추어주어서 우리가 가야 할 길도 보여주고 피할 길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말세 중에서도 마지막 시대입니다.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때에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마지막 때에 교회 안에 나타나는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영적인 잠에 빠지게 된다. 
   
여러분은 늘 깨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제 군대 후배 생각이 납니다. 이 친구가 성균관대학을 다니다가 입대를 했는데 잠이 많아요. 앉기만 하면 졸아요. 실내교육을 할 때 고참들은 졸지 않아요. 왠지 아세요? 밑에 아이들 조는 것 감시하느라 고참들은 졸지 않아요. 우리 때는 구타가 많았습니다. 졸다가 걸리면 매를 많이 맞아요. 졸던 사람만 맞는 것이 아니라 분대원들이 다 맞기도 하고 소대원들이 다 맞기도 합니다. 때로는 바로 윗 고참이 맞기도 했습니다. 

이 친구가 어느 정도냐면 하루는 관물조사를 하는데 그 친구의 총이 없어요. 군대에서 총이 없어졌으니 소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온 소대원들이 총을 찾는데 우리 소대가 2소대인데 3소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자기 소대에 총이 하나 남는다는 겁니다. 총에 일련번호가 있는데 자기 소대 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찾아와서 번호를 보니까 그 친구 총입니다. 3소대에 심부름을 갔다가 앉아서 졸다가 총을 놓고 2소대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이 친구가 저에게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해주는데 제가 잘 믿어지지가 않더군요.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날인데 버스에서 졸다가 종점까지 가는 바람에 시험을 못 봤습니다. 제시를 보는 날 또 졸다가 시험을 못 봤습니다. 제시까지 놓쳤으니 과락은 당연한 일인데 이 친구가 교수님에게 사정사정해서 교수실에서 다시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또 버스에서 잠이 들어서 시험을 못 쳤답니다. 다시 교수님을 붙들고 사정을 해서 교수님 집에서 시험을 보기로 했는데 또 버스에서 잠이 들어서 시험 시간에 늦고 말았답니다. 정말 답답한 친구이지요.
   
지금 시대에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깨어있지 못해서 마귀의 시험에 들어서 고생을 해놓고도 계속해서 졸고 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더욱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 25장에 보면 3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먼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열 명의 처녀가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열 명의 처녀들은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교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다섯은 슬기로워서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머지 다섯은 등은 준비하고 있었지만 여분의 기름은 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기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었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 세 명을 불러서 각각 재능대로 달란트를 줍니다. 한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았고 또 한 사람은 두 달란트를 또 한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바로 가서 장사를 하여 이문을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달란트를 땅을 파고 돈을 감추어 둡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을 합니다. 여기서 주인은 역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종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달란트로 이문을 남긴 사람들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고 달란트를 묻어두었던 사람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세 번째 비유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민족이 재림하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분류가 될 것입니다. 오른쪽은 양들이고 왼쪽은 염소들입니다. 양 편에 선 사람들은 영생에 들어가고 염소 편에 선 사람들은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마 25장에 나오는 이 세 가지의 비유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랑이 오고, 주인이 돌아오고, 주님이 구름타고 오십니다. 주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사람들과 못 들어가는 사람들로 나뉩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가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영생에 들어가는 사람들과 영벌에 들어가는 사람들로 나뉩니다.
   
마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의 비유 중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 교회 안에 나타나는 징조 하나를 보여줍니다. 마 25:5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말세에 교회 안에 나타나는 징조 중에 하나는 영적으로 잠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 졸며 잘새’
   
마지막 시대는 영적으로 잠들면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가는 마귀의 밥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계 12:12에 보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땅과 바다에 화가 있다는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 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구촌에 화가 있는 이유는 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나 남지 않은 것을 알고 크게 분내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벧전 5:8에서는 크게 분내어 내려온 마귀를 우는 사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배고파 우는 사자, 새끼를 빼앗겨서 우는 사자를 생각해 봅시다. 무시무시한 힘으로 인정사정 보지 않고 상대를 공격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귀의 공격을 피할 수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벧전 5:8,9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베드로 사도가 제시한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둘째, 믿음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영적인 잠을 말씀드리고 있기 때문에 깨어 있는 부분을 살펴봅니다. 그리스도인이 깨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24시간 한 숨도 자지 않고 버티는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이 깨어 있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마 26:41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눅 21:36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장차 올 이 모든 일은 덫과 같이 임할 마지막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능히 피하고 주님 앞에 서려면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날마다 정해진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기도생활이 마지막 시대를 승리하게 만들 것입니다. 

 
2.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지게 된다. 
   
사랑으로 사는 삶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 24:12에 보면 주님께서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말세의 구원을 연결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는 많은 환난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마음이 강퍅해지면 당연히 사랑은 식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믿음의 역사는 사랑으로 되는 것입니다. 갈 5:6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사도는 요일 4:8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아가페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그분과 단절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을 받았어도 아가페 사랑을 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인 것입니다. 심지어 하루에 몇 시간 씩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가페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6에서는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가 아가페 사랑을 하는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방법은 용서와 받아드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자를 용서하시고 받아드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고 받아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용서와 받아드림 때문에 탕자는 아들의 권세가 회복되었고,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가페 사랑으로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용서와 받아드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도와주고 나를 격려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나를 미워하고 나를 골탕 먹이고 나를 공격하고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이야 고마운 사람들이니 당연히 사랑할 수 있지만 후자의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드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원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들에게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44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교회 생활을 천국생활처럼 하려고 하면 시험에 듭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도 있고 미움과 다툼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고 눈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함께 부딪히다보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나오게 되고, 심지어 원수처럼 생각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상대를 공격하지 마십시오. 상처를 받았다고 돌려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를 물면 그를 죽이는 것만 아니라 나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님이 정글에 들어갔다가 코브라 뱀하고 맘마 뱀이 싸우는 것을 봤습니다. 코브라가 독이 굉장히 세잖아요. 그 독이 들은 이빨로 맘마 뱀을 꽉 물어 버리니까 얼마 안 있어서 맘마 뱀이 축 늘어지더랍니다. 코브라가 이겼어요. 이긴 코브라가 입을 쫙 벌리고 맘마 뱀을 먹기 시작하더랍니다. 머리부터 먹기 시작하는데 중간쯤 먹더니만 코브라도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냥 뻗어서 죽더랍니다. 

왜 그랬을까요? 코브라가 물어서 죽인 맘마 뱀 속에 있는 코브라 독이 코브라를 죽게 한 것이랍니다. 결국 원수를 죽인 그 독이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자기를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 선교사는 크게 느낀 것이 있었답니다. 우리가 이웃을 죽이면 그 독이 우리에게 돌아와서 우리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심히 괴롭히면 그로써 내가 만족한 것 같지만 그 고통이 돌아와서 나를 괴롭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도살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 상황을 받아드리셨고 그런 상황에서도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처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합니다. 원수를 만나면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세요.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원수까지 용서하고 받아드리게 하실 것입니다. 
 

3. 진리에서 떠나게 된다. 
   
딤후 4:3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욕심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스승으로 따릅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성경적 진리만을 말하는 사람은 배척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는 독선적이라고 공격합니다. 사람들은 바른 말보다 자기 비위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인 중에 한 사람이 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들 듣기에 좋은 소리만 안 하잖아요” 참 좋은 말입니다. 저는 아주 큰 칭찬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사람이 듣기에 싫은 말도 한다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듣기에 싫은 말을 하면 누가 좋아합니까? 누구든지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 합니다. 듣기 싫은 소리하면 그 사람이 싫어집니다. 어쩌면 우리교회가 대형교회가 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사는 성경이 죄라고 하면 죄라고 말해야지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바다 이야기’라는 성인 오락실이 전국에 확산 될 때 이야기입니다. 우리교회에서 ‘바다 이야기’가 문을 닫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으로 바다 이야기가 문을 닫는 기적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교회에 출석하던 집사님이 성인 오락실을 오픈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큰 교회 목사님 두 사람에게 상담을 했는데 두 목사 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시작하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저는 기가 막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인 오락실을 축복할 테니 하라고 하실 리가 없지요. 그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마귀의 음성입니다. 제가 그 집사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집사님이 성인 오락실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포기하십시오.” 

그러나 그 집사님은 성인 오락실을 위한 준비를 계속했고 수많은 돈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결국 바다 이야기 문제가 붉어지면서 집사님은 오락실을 오픈도 못하고 수억의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집사님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우리교회를 떠났고 제가 누군가의 말을 들어보니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하라고 했던 그 목사의 교회로 교회를 옮겼다고 합니다. 저는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그 집사님은 자기의 욕심을 충족 시켜줄 수 있는 악한 스승을 찾아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와 교인들을 진리에서 이탈 시키는 몇 가지 이슈가 있습니다. 혼합주의와 동성연애입니다. “00의 힘”이라는 책을 집필해서 유명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오직 예수라고 하는데 그는 예수는 수많은 길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의 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버렸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세의 징조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욕을 채워줄 스승을 따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의 페이스 북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남자인데 권사라고 하는 걸 보니 감리교인인 것 같습니다. 그분이 남긴 글 중에 자살이나 살인 그리고 동성애는 그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가 중요하다는 글을 읽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동기도 중요하지만 행위 자체도 죄다 하나님의 입장이 그렇다고 했다가 그 사람과 다른 누군가가 반박하는 글을 달아서 저도 또 반박을 하고 하다가 허탄한 변론만 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짧은 논쟁을 하면서 그 사람은 교인이요 권사이지만 성경의 진리보다는 인간적인 논리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그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일반적인 교인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이때는 자기 논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고 언제나 성경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4. 모이기를 폐하게 된다. 
   
히 10:25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여기서 그 날은 주의 재림의 날이며 이 세상 종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임은 영적인 모임이며 특히 예배를 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 날이 가까워질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갖는 사람들이 나올 것인데 그렇게 하지 말고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예배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말세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귀의 뜻은 모이기를 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은 모이기를 원하시고 마귀는 모이기를 폐하려 할까요? 그만큼 신자들이 모이는 것이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모이는 것을 줄여도 크게 신앙에는 지장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모임이 줄어들면 그만큼 우리의 신앙이 약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임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임을 통해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덩치가 산만한 코끼리가 사자의 밥이 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사자의 밥이 되는 코끼리의 특징은 무리에서 나뉜 코끼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약하고 병이 들어서 싸울 힘이 없어도 무리와 함께 있으면 사자가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무리를 벗어나면 그 순간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리에서 나뉘는 순간 사탄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모임을 힘써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모임을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적인 모임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신령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란 모임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히브리어로 ‘카함’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 모여 있는 회중’을 뜻합니다.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입니다. 그 뜻은 ‘불러냄을 받은 거룩한 무리’를 말합니다. 성도는 무리가 되어야 교회가 되고 온전한 것입니다. 혼자서는 교회가 아닙니다.
   
말세의 특징 중에 하나는 분주함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분주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게 만듭니다. 마귀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마귀의 뜻과 반대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힘써서 모여야 합니다.
   
오늘 설교는 교회 안에 나타나는 말세의 징조 4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우리들은 그와 반대 되는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말세에는 영적인 잠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용서하고 받아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세에는 진리에서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욕심을 채울 스승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붙들고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말세에는 모이기를 폐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서 주의 임재를 경험하고 주님과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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