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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 회복을 통한 영적부흥 (느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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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회복을 통한 영적부흥 (느 9:1-5)

느헤미야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다 무너지고 불타버렸던 예루살렘 성벽을 52일 만에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부흥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를 위하여 율법학자인 에스라에게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가르쳐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벽재건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낭독할 때,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율법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다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초막절의 절기를 지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초막절의 절기를 다 지키고, 규례를 따라 여덟째 날에 성회를 열면서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회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 아주 차원 높은 회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회개는 내 행위나 양심에 거리끼거나 주변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때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비추어 보니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 말씀이 각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적하면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기준일 때는 회개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면 내 눈에 죄가 보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변질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무너졌는지 하나하나 더듬으며 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에게 문제가 없다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으면 회개의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토록 굳은 마음을 가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죄를 자복하며 용서를 구한 것이 언제였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 3절에 “이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라고 했습니다. 낮 사분지 일이란 하루 24시간으로 보면 6시간이며, 12시간으로 보면 3시간을 의미합니다. 

8:3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동안을 의미합니다. 백성들은 6시간을 앉지도 아니하고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이방 사람들과 절교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죄와 열조의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말씀을 깨닫고 자신들의 모습을 보니까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생활이 메말라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씀에 의해 은혜를 받는 것도 메말라 있습니다. 충만한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사는 것과 말씀을 통한 충만한 감화 속에서 사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의 세계입니다. 

개인적으로 늘 성경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어떻게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감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예배 중에 쏟아지는 설교를 통해 자신의 영혼 깊은 곳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살아 있는 사람들은 기도의 샘이 마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한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없이는 기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잠 28: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건조한 기도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무감에서 드리는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기도의 불이 붙여지고, 기도의 불이 붙여지면 말씀의 은혜가 가속화됩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또한 기도하지 않고 말씀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려는 것은 마치 씨앗을 심고 물을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의 영과 기도의 영은 함께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기도 생활이 힘드신 분이 있습니까? 그러면 먼저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회복하면 기도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회복되면 말씀의 은혜도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라로부터 말씀을 들었을 때에 말씀을 지식적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로부터 시작되어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직전까지의 기록인 신명기까지의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그때로부터 바벨론 포로까지의 역사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온 조상들이 왜 가나안에서 쫓겨났는가? 왜 자신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의 후손으로 태어났는가? 그것은 바로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계속된 조상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국가의 패망과 70년의 포로생활이 여호와와 그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이 그렇게 흉하게 무너졌던 이유 역시 하나님을 외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찬란하고 훌륭하던 다윗과 솔로몬의 성벽이 무너진 이유 역시 하나님을 헌신짝처럼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들의 상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음에도 여전히 허전하고 불안하고 속이 텅 빈 원인 역시도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조상들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보니까 지금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징계를 받아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그 정도의 죄라면 포로생활로 모든 것이 끝이 나도 오히려 감사할 정도인데, 포로에서 돌아 온 것 역시 기적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성전에 우상을 세우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버린 백성들에게 다시 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하신 것이나, 다시 성벽을 쌓을 수 있게 하신 것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 온 것, 지금 예루살렘에 돌아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것 등은 조상들과 자신들이 지은 죄에 비해서 너무나 과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하나님을 만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하나님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죄와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와 허물과 부끄러움을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온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 앞에서 민족적인 죄를 회개합니다. 

여러분, 회개란 자신과 공동체가 범한 죄가 무엇인지 샅샅이 돌아보고, 그 죄를 인정하고 슬퍼하며 앞으로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돌아보는 과정입니다. 공동체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책임으로 인정하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소원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면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라고 했습니다. 

먼저 백성들은 금식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금식은 육신의 정욕이나 욕심을 끊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금식은 우리 육체의 힘이 되는 모든 양식을 끊음으로 우리의 힘과 도움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적 행위인 것입니다. 

또한 금식했다는 것은 죄로 가득 차 있는 자기 몸속으로 더 이상 다른 것을 집어넣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배부르게 먹고 나면 더 이상 음식을 보아도 먹고 싶지가 않고, 먹을 생각조차도 못하게 됩니다. 죄로 가득 찬 자신을 보는 순간, 더 이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고 하는 영적 자각이 그 속에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금식 그 자체가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보살핌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도우소서라고 하는 몸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 다음에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덮어 썼습니다.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우리 전통으로 볼 때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슬픔과 애통을 나타내는 고대 근동 지방의 관습이었습니다. 마치 상을 당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큰 슬픔을 당한 것처럼,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극도의 슬픔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위에 티끌 즉, 재나 흙을 뿌리는 것은 자신이 고상하고 깨끗한 존재가 아니라 흙먼지나 더러운 티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자신 역시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티끌만도 못하다는 낮아짐과 겸손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회개하는 자의 마음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고, 지은 죄를 인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에게 죄에 대한 이러한 슬픔이 있습니까? 죄에 대한 심각성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 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렇게 심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죄에 대한 이러한 애통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육체의 때를 씻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오래 묵은 때와 지금까지 우리 속에 쌓이고 쌓인 모든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깨끗하게 씻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주님 앞에 있는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심각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께 낱낱이 고백하시고 자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영적인 부흥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놀라운 영적 부흥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말로만이 아니라 실천이 따르는 참된 회개였습니다. 

회개란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과 생각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성경 본문에서 회개한 것은 이런 행함이 있는 회개였습니다. 결단하는 회개였습니다. 

2절에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방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과 한 결혼을 파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함께 거했던 이방인들을 축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사업상 이방인들과 얽힌 관계를 자발적으로 끊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방인과 결혼하면 이방신의 문화를 들여오게 되어 이스라엘로 범죄하기 때문에 이방과 혼인을 금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방의 우상과 풍습과 문화를 버릴 때에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보다 앞서 귀국하였는데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방백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한 것을 보고 기막혔다고 했습니다. 

스 9:1-4절에 “이 일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네가 이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라고 했습니다. 

에스라는 이것을 보고 이방여인과 혼인한 사실을 책망하고 이방여인들을 다 내어보 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에루살렘 성에는 이방인과 혼인한 사람들이 친한 왕래가 있었고, 이들이 물건을 가지고 와서 안식일에도 물건을 팔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절교를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신의 죄뿐 아니라 열조의 죄를 자백하고 그 표시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과거의 습관과 행동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인간관계가지 완전히 돌이켰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아직까지 세속적인 요소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한 것이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과감히 버릴 줄 아는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죄악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마저 왜곡되며, 섬기는 법도마저 인본주의로 흘러가는 이 시대 속에서 나부터 먼저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회복하여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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