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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백성의 기도 (마 6: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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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백성의 기도 (마 6:5-15)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믿고 생활하는 면에 대하여는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구약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과 신약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차이에 대하여는 정말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전에 구약의 하나님과 동행한 삶과 신약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차이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인지를 나타낼 수가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산상수훈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6장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타내는 경건이 무엇인지 잘 아시기를 바랍니다.

6장에 말하는 경건의 대표적인 말씀은 1절에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경건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보이는 경건이 서로 대조적입니다. 
 
이러한 경건의 삶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입니다. 이러한 경건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데 있습니다. 6: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난 주일에는 구제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의 구제와 신약의 구제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하여 들어가기 전에 왜 구제가 경건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구제가 앞에 나오는 순서를 본다면 그 뒤에 따르는 기도와 금식은 어쩌면 구제를 위한 기도와 금식일 수가 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선 경건이란 것이 무엇인가 다시 점검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옷을 가지런히 입고 거룩한 자세를 취하며 조용한 곳에 가서 마음을 다스려 평안함을 유지하는 것이 경건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뵈옵고 그를 섬기며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그의 백성과 신하들이 왕의 앞에 나아가고 그를 경외하며 섬기는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왕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나 몸가짐 정도로 경건을 축소시켜서는 곤란합니다. 

현 시대에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 백성으로 살고 민주주의 대통령을 세우고 함께 한다면 그 대통령을 경외하고 대통령 앞에 나아가 뵈올려면 최소한 민주주의를 지키고 따르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공산주의를 추종하면서 민주주의 대통령을 섬기거나 그 앞에 경건함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는 그 나라 밖으로 당장 쫓아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경건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왕을 지지하고 따르며‘ 왕과 함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동참하는 자들이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경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한다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의 경건과 신약의 경건입니다. 구약백성 이스라엘의 경건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신약백성 교회의 경건은 죄와 사망에서 교회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구약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가? 애굽에서 바로 왕으로부터 압제를 받고 나그네로 살았던 이스라엘을 백성을 구원하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 가나안 땅의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 나그네와 압제받는 자들을 구제해야 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에 동행하는 일을 하게 될 때 구약백성은 진정 여호와를 경외하는 경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구제는 신약백성들처럼 한 몸으로 구원함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는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한 몸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의 구원은 될지언정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구원은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구제를 하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을 구제하는 관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신약백성의 구제 관점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구약백성의 구제를 본다면 외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겉이 다르고 속이 다른 그런 외식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구제하는 입장에서 보면 주인이 종을 구제하는 것은 아무래도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을 왜곡시켜 잘못 가르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잘못을 교정하시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외식하는 도덕적 잘못을 고치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제 신약의 경건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즉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자, 소경된 자, 억압을 받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구원은 죄인을 구원하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경건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동행하는 자가 합당한 경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죄인을 죄로부터 구원하심이 전부인가? 아닙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자기 몸에 연합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연합시키신 것입니다. 구약의 구원을 성취한 신약의 구원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휘장으로 가리우지 않고 한 몸으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에 대한 것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한 몸의 구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한 천국 율법을 따른 경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백성이 나타내는 경건으로서 구제는 한 몸의 구제이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구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성령이 임한 예루살렘 공동체의 구제는 구약과 달랐습니다. 

2:44-45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자기 소유를 다 팔아 형제를 돌아보는 경건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백성의 경건의 구제는 이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부자청년의 경우에 잘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0:2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부자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주님을 따르지 않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신약의 경건에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자청년과 달랐습니다. 마가복음 10:28절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는 배와 부친과 전토를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신약 백성의 경건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제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따라서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구제를 했느냐, 아니 했느냐로 경건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구제가 구약백성에게 속한 것이냐, 신약백성에게 속한 것이냐를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제를 한다 하더라도 주인이 종에게 베푸는 정도의 구제라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보이는 경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구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구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다 주셔서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경건한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종교적 행위를 드러내는 모습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자세, 마음의 자세, 심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역사적으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그 경건을 나타내는 제일 중요한 것으로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구제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합니다. 

자신이 기도원이나 산속에 들어가서 얼마 동안 수련을 하는 모습이 경건이 아닙니다. 그 경건의 중요한 나타남은 구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전도의 사명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복음전도를 제쳐두고 아시아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는 일을 가장 먼저 동행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열매가 구제로써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고린도후서 8:7-8절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너희가 이미 작정한 그 일을 다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일찍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마게도냐 교회들이 이 일에 더 열심을 나타내고 구제를 했습니다. 아마 고린도교회는 작정을 해놓고는 머뭇거리거나 미루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믿음, 그리고 성경을 아는 지식과 말에 풍성함을 비교하면서 이 구제함에도 풍성함을 나타내라고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고린도교회가 믿음과 말과 지식에 풍성하다면 그것을 구제로 증명해 보라고 했습니다. 만약 구제함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것 모두는 다 허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경건의 열매를 맺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약 구제가 없다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경건의 모든 행위는 다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아십니까? 구제하는 손이 작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강하십니까? 구제가 약하다면 그 믿음도 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한 사모함을 갖고 계십니까? 구제가 없다면 그것은 전부 헛것입니다. 

이 구제에 대한 경건의 말씀은 어느 누구보다 우리 교단이, 저희 교회가 정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듣는 구속사 복음이 탁월하다고 하면서 구제가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그 은혜에 감사를 입으로 할 수는 있겠고, 또한 복음을 아는 지식을 다른 성도들 앞에 나타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구제하는 손이 크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이 임한 초대 공동체는 성령이 임하여서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며 무슨 신비한 은사를 나타냄으로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를 팔아 형제를 내 몸처럼 돌아본 것이 그 성령의 열매였습니다. 신약 백성의 경건의 모습입니다. 성전과 집에서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 경건을 나타내는가, 나타내지 못하는가, 이것을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은 바로 구제에 있습니다. 복음을 잘 알고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이것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증명하는 것은 구제에 있습니다. 참으로 구약의 구제를 따르고 있는가, 신약의 구제를 따르고 있는가를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부인하고 부자청년처럼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자에 불과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5-8절, 9-15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5-8절의 핵심은 8절에 있고, 9-15절의 핵심은 9절에 있다고 봅니다. 즉 5-8절은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9-15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해서 오늘 본문 전체가 말하는 바를 표현한다면, 외식하는 자들과 이방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오늘은 주로 5-8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5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외식하는 자의 기도인가?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이것이 외식하는 자의 기도입니다. 

이 문장만 보면 우리는 금방 이 말씀을 위선자의 기도, 겉과 속이 다른 자의 기도라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항상 성경말씀이 구약을 신약으로 성취하셨다는 큰 줄기를 간과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해석을 가져오게 됩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더 이 성취를 강조하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마태복음이 말하는 큰 틀을 잡고서 각 본문을 접근해야 합니다. 

여기 외식하는 자의 기도는 자기를 과시하는 자의 잘못을 교정하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제 비유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대 우리가 정보화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 이해하기가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업데이트와 업그레이드는 서로 다른 말입니다. 산상수훈을 해석하면서 자꾸만 예수님이 모세의 법을 업데이트하는 정도로 보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업데이트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업그레이드 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버전을 말씀하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업데이트 한다는 말은 우리가 이해하기에 여전히 그 같은 버전 안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업그레이드는 그 버전을 넘어서 새롭고 혁신적인 버전을 가져왔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버전 2.1, 2.2와 버전 3.0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버전 2.1, 2.2는 여전히 2.0 안에 속한 것이지만, 버전 3.0은 2.0을 뛰어넘는 새로운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율법을 완전케 했다는 말씀은 바로 업데이트가 아닌 업그레이드로 이해햐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모세의 버전 안에 속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런 의미에서 완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이 여전히 산상수훈을 모세의 업데이트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외식하는 자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이제 모세와 율법을 완전케 한 새 시대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약 백성의 기도는 외식할 수 밖에 없는 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시간이 일정하게 하루에 세 번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외식을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즘에도 이슬람 사람들이 하는 라마단 금식을 보면 됩니다. 해가 뜬 후로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금식을 하는가 하면, 그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금식을 하지만, 해가 지게 되면 평상시보다 더 야식을 풍성하게 먹습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야식 배달 사업이 아주 잘되는 기간이 바로 라마단 금식기간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름진 음식, 하루종일 굶었으니 또 내일 굶어야 하니까 밤 사이에 폭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외식을 가능케 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언제 기도할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시간에 기도하는 자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으니까요. 그러니까 기도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집을 나서되, 기도 시간이 되면 자신이 어느 장소에 도착하게 될 것인지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 도착할 시간, 큰 거리 어귀에 도착할 시간을 계산하고, 집을 나서서 그 기도 시간에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보이는 구약 백성의 율법을 따른 기도였습니다. 이것을 신약의 관점에서 외식하는 자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외식하는 자와 다르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6절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니까 이런 기억이 생각납니다. 제가 부산의 교회에 부교역자로 봉사할 때 어느 여권사님이 자기 집을 신축했습니다. 건축업자를 쓰지 않고 그 권사님이 직접 인부와 자재들을 골라 집을 지었습니다. 신축을 했으니 교역자들을 불러서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집에 아래 층 거실에 계단 바로 아래 조그만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을 자랑스럽게 여시며 권사님께서 골방을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기도 골방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으니까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골방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세상 사람들이 집을 건축하는 것보다 다르게 골방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그 신앙이 좋습니까? 그런데 아마 성경에서 베드로는 지붕에 올라가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골방에 들어가 기도했다는 말씀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본 적이 있나요?

이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과연 몰아의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만 의식하고 드리는 기도가 골방의 기도인가? 무언가 접신 상태에 들어가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던져두고 다음 말씀을 보도록 하십시다. 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한 번 한 기도는 다시 반복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는데 세 번 반복해서 같은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중언부언하는 것에 대하여 뒤엣 말이 설명을 해줍니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이 그 설명입니다. 그럼 기도는 무조건 짧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제가 일일이 구하지 않아도 다 아시지요? 다 아실 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하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말을 많이 한다’는 이방인의 기도가 무엇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이방인이 하는 기도는 열왕기상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했던 기도를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8:25-29절입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여기에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는 이방인의 기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단 주위를 춤추며 뛰놀거나 큰 소리로 부르거나 자기들 규례대로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는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신을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받는 것입니다. 즉 말을 많이 함으로 신을 설득하여 신의 마음을 움직여 내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예로 들어 보면, 우리는 눈물로 기도하면 내 기도를 잘 들어주실 줄 생각하거나, 밥을 먹지 않고 굶고 기도하면 잘 들어주실 줄 생각하거나, 39일 금식은 안들어 주실 것이고 40일을 채워야 들어주실 줄 생각합니다. 심청이의 기도를 들어주려면 공양미 100석 가지고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적어도 300석은 공양미로 드려야 소원이 응답이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여기 집에서 기도하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깊은 산 속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야 들어줄 것 같습니다. 평상시 새벽기도는 안들어 주실 것 같고 특별새벽기도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기도해야 들어줄 것 같습니다. 대입 수능날이 되면 이런 기도가 아주 잘 드러납니다. 문제는 절간에 찾아가 드리는 이방인들의 기도나 교회를 찾아가 드리는 교인들의 기도가 같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했는데 아주 똑같습니다. 자식이나 손자가 시험치는 시간에 맞추어 그 과목마다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 수험생과 똑같은 시간표를 따라 기도합니다. 이것은 절간에 드리는 불교신자들도 같습니다. 

이러한 내 정성을 보고 신이 감동을 받아서 내 문제, 즉 대입을 해결함 받으려고 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석가탄생일 때 절 근처 거리에 매달은 연등이나, 절에 들어가는 입구에 매단 연등에 꼬리표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 거기에는 그 연등을 사서 매단 불자들의 소원이 적혀 있습니다. 거의 모두 사업성공, 건강, 자식에 대한 소원입니다. 이것은 부흥회나 예배 때 교인들이 드리는 헌금 제목과 아주 똑같습니다. 또 부흥강사들은 누가 많이 공양미를 냈는가에 따라 기도의 효험이 있다고 부추깁니다. 이것은 절이나 점집에서도 똑같이 합니다. 

사실 이러한 기도나 소원은 일반 사회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특히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는 이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회사 직원이 승진하려면 회사 사장에게 무언가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밤새도록 야근을 한다거나, 무슨 특별 사업을 잘 이루어낸다거나 해서 사장의 마음을 움직여야 보너스를 받고 승진도 합니다. 이러한 직원에게 사장은 회사의 아주 큰 일을 맡길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8절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아들이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는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는 자기를 학대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키거나 설득해야만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공양미 3백석을 채워야, 40일 금식을 해야, 자기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해야만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니까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구제가 없다면 하나님을 믿고 아는 지식이나 간절함이 다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만일 기도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가 없는 자입니다. 기도하는 백성이 아니라면 구약백성도, 신약백성도 되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자가 구원이 있는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그의 일꾼이라면 당연히 왕되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저 자기 먹고 마심을 위해서만 사는 자는 구원의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기도함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대되며 부강하고 더 많은 민족과 백성이 우리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돌아오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을 나타내는 백성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부흥집회의 강사들이 가르치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주여 3창을 큰 소리로 외치며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목이 터져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네 소원, 네 문제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리라고 가르칩니다. 완전 이방인의 기도를 주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인 것입니다. 유명 부흥강사나 능력있는 신유의 강사들이 집회에 온다고 하면 벌떼같이 모여듭니다. 그러면 잘 들어주실 것 같으니까요. 

설교 처음에 경건이 무엇인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원역사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소원을 이룸이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나라와 의를 구함이 기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기도를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심판을 여호와께서 그의 벗인 아브라함과 상의하셨습니다. 의인이 50명이 있다면, 의인이 40명이 있다면 ...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경영을 서로 의논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또한 기도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족속과 싸울 때 모세의 손을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붙잡아 준 것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의뢰하고 그를 의지하여 대적과 싸움에 승리하기 위한 필수요건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우리의 신앙의 삶을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가 무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여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 형제와 자매를 한 가족으로 한 몸으로 여기며 섬기는 것을 목표로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지극히 작은 형제를 내 몸으로 여겨 그를 구제하려고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내게 어떤 소원이 있는지. 그 소원은 아버지의 소원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셨던 기도처럼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형제를 돌아보고 구제하기를 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가 일하는 것과 내가 공부하는 것 등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어떤 목표인가를 아는 사람들이 주님의 백성입니다. 자기 적성만 찾지 말고 자기 좋아하는 일만 찾지 말고, 어떻게 이 작은 형제들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인가 찾으십시오. 그리하여 죄인을 구원하심으로 자기 몸에 연합시키신 주님의 구원에 동참할 것인가를 찾으십시오. 그게 적성이고 좋아하는 일이 되어야 아버지와 한 마음이 되는, 즉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벤트를 보아야만 들어주는 자가 아닙니다. 내 쓸 바를 아시고 풍성한 가운데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께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이 일치가 되는 그런 기도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목회하는 가운데 감히 예상치 못한 구제를 하시는 성도님들로 인하여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예상한 금액을 훨씬 초과하여, 자그만치 20배 이상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정말 제가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자기 옷 사서 입지 않으시고, 자기 먹을 것 풍성하게 드시지 않으시고 교회 안에 가장 작은 형제를 돌아보려고 큰 손을 나타내실 때 제가 그 분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큰 경건을 나타내고 계시니까요. 

자기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소욕을 위하여 구하지 않고, 어떻게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서 주님의 자녀들을 돌아볼 것인가를 선한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백성들이 바로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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