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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도 (고전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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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고전 :18-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결혼 20년 차인 여자가 남편의 애정이 식은 것 같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남편에게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라고 독촉했습니다. 남편은 그 말을 따랐고, 집으로 돌아오더니 아내를 번쩍 안아 들고,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여자가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도대체 뭐라고 하신 거예요?” “당신이 바로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하시더군.” 유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결코 그런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종교마다 그 종교의 핵심을 나타내는 상징이 있습니다. 불교는 만(卍)자 형태를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만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한데, 보통은 시작도 끝도 없음을 상징한 것이며, 온갖 좋고 덕스러운 것이 결집된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원불교에서는 동그라미 형태를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이 상징은 일원상(image of one origin)이라고 불리는데, 모든 진리가 하나의 원리에서 시작되었고, 하나의 진리로 귀결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초승달을 상징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모하메드가 알라로부터 계시를 받을 때가, 초승달과 샛별이 떠 있던 밤이라는 전승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초승달은 달이 점점 커지는 시기에 뜨는 달이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참된 진리의 시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당연히 십자가입니다. 상징 치고는 좀 자극적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당시로서는 가장 잔인한 형틀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종교에서 교수대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하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십자가 상징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이런 흉측한 물건을 상징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 분명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당면한 문제 중, 분쟁 문제는 사도 바울의 가장 큰 관심사여서, 바울은 맨 먼저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실정은 바울 파니, 아볼로 파니, 게바 파니, 그리스도 파니 하는 지도자 숭배에서 나온 당파심에서 야기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모든 당파를 전면 부정하고 책망한 다음, 이제는 분쟁의 원인이 된 사람의 지혜와,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여 깨우쳐 줍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으나, 사람의 지혜는 이것을 미련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오늘 분문의 중심 내용입니다.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기독교의 중심 되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속이 믿어지면 예수 믿는 사람이고, 십자가의 구속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교회 출석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과, 산상보훈 같은 것은 대찬성하면서, 십자가의 구속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글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치가들이 거창하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을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의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교회당에는, 예외 없이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기독교의 심벌마크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종교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되어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만 생각하면, 2천 년 전에 사형 선고를 받아 죽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며,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입니까? 인간의 지혜로만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한 소리로밖에 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능력이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 믿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고, 생명을 살려내고, 세상과 마귀를 이기게 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 나가게 합니다.

19절에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29:14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약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전적으로 반대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마침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시고야 맙니다.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지혜 있는 자’란, 헬라의 철학자들을 말하고, 선비란 서기관 같은 유대인 학자들을 의미하며, 변론가란 헬라의 웅변가들을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철학자나 서기관이나 웅변가들을 지혜 있는 자라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의 지혜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하므로, 그 지혜와 지식은 미련케 된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실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숨겨져 있는데, 이 세상 철학자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웅변가들이, 그들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깨닫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왜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까? 그 원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이 죄를 범한 결과 때문입니다. 고린도서에 의하면, 이 세상 신 곧 마귀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자기의 작은 지혜 때문에, 하나님의 큰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옛말에 대현(大賢)은 대우(大愚)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크게 현명한 듯 하여도, 결국 그 현명함이란 것이, 큰 어리석음과 통한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부처라는 말을 하는데, 그 뜻은 깨달은 자란 뜻입니다. 그러나 각을 얻고, 크게 깨닫고, 그래서 굉장한 현인이 된 것 같지만, 그 결국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작은 지혜로, 자신과 수많은 인생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종교의 교조가 되었다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의 생일을 경축한다는 추기경이나 교황의 언사를 보면, 저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 진리로, 수 천만, 수억의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등지게 하고, 그들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축하하고 경축한다는 말인지....저는 무엇 때문에 그러한 추파를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상 종교까지 용납한다는 것입니까? 

인간적인 면에서만 생각한다면, 어떠한 이방 종교, 우상 종교도 비판하지 않고 존중히 여기는 것이, 신사적이고 더욱 고상한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 이 같은 태도 자체가 바로 인간의 지혜, 인간의 이성, 인간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결코 비 진리에 대해서, 이단사술이나, 사신 우상, 우상 종교에 대해서 관대할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리는 결코 혼합주의 일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철인이나 종교가의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여기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말은, 역설적인 형용법입니다. 전도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일 수 없고, 하나님의 지혜가 미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할 때, 미련한 듯 보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련해 보이는 듯한 십자가의 도, 전도라는 미련하게 보이는둣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22-24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1. 유대인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황금시대가 오면, 굉장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들을 쓰는 바로 그 때에도,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속이고 이상한 일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약속했으며, 자기가 구세주라고 믿게 하려고 했습니다. 주후 45년경에는 ‘드다’란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몇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집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 요단강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명령하면 요단강 물이 둘로 갈라져, 모두 발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또 그보다 9년 후인 54년경에는, 애굽으로부터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어떤 자가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삼만 명을 설득하여 감람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명령하면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진다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런 일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더러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며, 인기를 끌만한 일은 고의로 피하시고, 오히려 봉사하고 희생하시면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생을 마쳐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또한 제자들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도 메시아도 아님을 증명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대망하는 메시아가 현세의 위대한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인간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이, 그토록 저주스런 죽임을 당한 사람을, 그들의 왕이나 구주로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죄를 받아 사형당한 사람을 전도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악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란 유대인이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넘어가는 데 큰 장애물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한 것입니다. 

2.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소피스트란 본래는 좋은 의미로 지혜 자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교묘한 말로 나쁜 것도 좋게 보이도록 하는, 궤변을 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 해결책을 가져올 수 없는 논쟁을 몇 시간이라도 거듭하는 인간, 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정신적 소풍을 즐기는 사람, 교묘한 말과 매끈한 변설을 자랑하며, 청중의 갈채를 받고 우쭐거리는 부류의 사람들이, 소피스트라는 인종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이 같은 소피스트들의 아름다운 말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무뚝뚝하게 말하는 기독교 전도자들을, 그들은 교양이 없는 조잡한 인간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기독교 전도자들을 귀를 기울여 들을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조소와 우롱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전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이적이나 철학적인 언사를 사용하지 않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도만 전하는 자는, 신비주의자들에게는 거리끼게 보이고, 인간의 지혜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신신학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시사 십자가의 도를 믿게 한데 있는 것이며, 결코 이적이나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적이나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으며,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미국 네바다 주에 ‘죽음의 골짜기’(The Valley Of Death)로 불리는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고, 벌레 한 마리 살 수없는 그 곳을 일컬어 죽음의 골짜기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30년 5월에 놀라운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일 동안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 결과 수십 년간 죽은 듯이 묻혀 있던 씨앗에서 싹이 나고 움이 터서, 온 골짜기를 푸른 초원으로, 아름다운 화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본 사람들이 “죽음의 골짜기가 생명의 골짜기로 바뀌어 졌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 죽음의 골짜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언덕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골짜기를 생명의 골짜기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렐루야!

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미련한 것이나, 약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미련한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은, 사람 보기에 약하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저 유명한 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이나, 유대의 랍비들이나, 박사들을 모두 무색케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는 엄청난 승리를 한 것입니다. 십자가야말로 다른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 인간의 구원을 성취한 것입니다. 

다음은 장경철 저 ‘축복을 유통하는 삶’ 중에서 “죽음 이후에 천사장을 만나면 이렇게 답하십시오.”라는 글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하늘나라의 현관에서 심문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천사장이 물을 것입니다. “당신은 죄인입니까? 아니면 의인입니까?” 그때, 죄인인 것 같다고 대답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사장은 지체 없이 “당신은 지옥으로 가시오. 죄인이 가는 곳은 지옥입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천사장은 계속 심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를 대주십시오.” 그때 당신은 어리석게 당신의 일기장을 뒤적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이런 착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보다 기억력이 탁월한 천사장은, 당신이 잊어버린 추한 사실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낼 것이며, 당신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아마 그는 당신의 선행 뒤에 숨어 있는, 추한 동기도 끄집어낼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당신의 행위가 아니라 골고다의 십자가를 가리켜야 합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님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내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주님이 흘리신 피로 인하여 저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때 천사장은 당신을 영접하면서, 하늘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혹시 당신이 만나게 될 천사장이 조금 짓궂은 천사장이라면, 아마 한 가지 질문을 더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당신을 의롭게 한다는 표징이 있습니까?” 그때 담대히 말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무엇이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겠습니까? 당신이 무엇이 관대 그것을 문제 삼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나의 구원이며, 나의 의로움이며, 나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천사장은 당신을 수종들면서 말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당신을 수종드는 천사일뿐입니다.”> 참 의미가 깊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헬라 철학사상이 만연했던 고린도에서, 복음의 단순성을 강조하고, 사람이 강조했던 말의 지혜를 타파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도덕가들이 가르친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한 도덕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생각한 것보다 더 고상한 철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철학이나 도덕이나 미사려구(美辭麗句)로 장식되면, 그 효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가장 단순하게 십자가의 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만 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하게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듯한 십자가의 도야 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이 가졌던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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