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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한 바울 (시 18:31-34, 고전 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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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한 바울 (시 18:31-34, 고전 1:13-15)

“저승길과 변솟길은 대(代/)로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죽음과 용변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승길과 변솟길만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란 그 자체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플 때에 대신 아파주지 못합니다. 남이 배고플 때 대신 먹어주지 못합니다. 남이 나이 많아졌을 때에 대신 죽어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 잠자는 것, 밥 먹는 것, 일하는 것 모두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고, 즐거워하고, 때로는 슬퍼하는 이 모두가 남이 대신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것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컨설턴트이자 사업가인 ‘허벌 라이프’사의 짐 론(Jim Rohn)은 “나 대신 팔굽혀펴기를 대신해줄 사람을 고용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모든 경험은 내가 직접 해야 하고, 수고와 고통도 남이 대신 할 수 없는 내 몫입니다. 
  
옛날에 양반들은 천민이 양반을 때릴 수 없으니 다른 형으로 벌을 주든지 아니면 천민 중에서 대신 돈을 받고 태형을 맞아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받고 대신 맞다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절대로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대신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일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대속의 표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죽여 태워서 그 향기를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인간이 죽을 것을 동물이 대신해서 드려지고 죽음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이 구약의 제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번으로 영원히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제물이 되신 사건입니다. 히브리서 9:12에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을 대신해서 심판관이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남이 대신 해 주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이 일을 대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대속물은 대신 죽는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는 제물이 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예수님 외에도 많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양 편의 강도도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 외에도 많은 십자가형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어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도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힐 수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입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아닙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힐 수도 없습니다. 

사도 안드레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자입니다. 그는 X자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것도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대단한 학자이며 훌륭한 사도입니다. 로마에서 박해로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대속은 아닙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예수님의 십자가만 우리를 위한 대속입니다. 

  
첫째,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줄 수 없습니다. 

13절 상반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라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보면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등 인간 중심의 당쟁이 심한 교회였습니다. 이런 당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값없이 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훌륭해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구속사역을 대신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례를 주었지만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절대적 유일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으로 우리 신앙의 모범적 인물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아무리 큰 사도라도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였고, 바울은 말을 잘 한다고 하여 ‘헤르메스’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신격화한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사도행전 14:15에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신앙적 모범이지 우리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주님께로 인도하지만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도구입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도 대신 못 박힐 수 없고, 누구도 대신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표이며, 예수님만 구원자이십니다. 
  
사람을 신격화하고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믿는 잘못을 사람들은 흔히 저지릅니다. 세상에는 사람 중심의 교회도 많이 있고, 인본주의가 사람의 사고를 지배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서 보세요. 그들의 광야생활에서 가장 큰 범죄는 금송아지를 만든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40일을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이끌 신을 만들자”라고 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닌, 보이는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이미 그들에게 신격화되었습니다.  
  
사무엘상서 2:11에는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고 합니다. 3:1에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합니다. 어린 사무엘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누구 앞에서 누구를 섬겨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섬기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어리지만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만 섬김의 대상입니다. 사람은 섬김의 대상은 아닙니다. 예수님만 구주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도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시편 18:31에는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고 합니다. 오직 야훼 하나님만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 구세주이십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파라오)는 ‘살아 있는 신’ 혹은 ‘신의 아들’이라 칭하였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신 노릇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얼마나 우습습니까? 일본의 히로히토는 2차 세계대전 후에 “내가 신처럼 군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왕이라고 하지 않고 천황(天皇)이라 합니다. 아직도 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인간의 교만은 자기 사랑이며 자기 신격화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교만의 결과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나 대속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런 교만은 어리석은 일이고 무지한 일입니다.  
  
사이비 종파의 10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을 부인합니다. 둘째는 성경을 가감하는 일을 합니다. 셋째는 개인계시나 신비적인 계시를 강조합니다. 넷째는 위기의식을 조장합니다. 다섯째는 시한부 종말을 강조합니다. 여섯째는 교주를 신격화합니다. 일곱째는 현실 교회를 비판하고 자기 단체만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여덟째는 현실을 부인하고 내세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아홉째는 물질을 강탈합니다. 열째는 반윤리적 행위를 합니다.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바른 기독교가 아닙니다. 바른 종교가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였지만 바울이 예수님처럼 우리를 대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이지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둘째, 십자가가 하나이듯이 세례도 하나입니다. 

13절 하반절에는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합니다. 인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위하여 그 숫자만큼 많은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 하나입니다. 이 하나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십자가 없는 세례는 없습니다. 물을 뿌린다고 세례가 아닙니다. 물에 빠졌다고 침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죽으심이며 나의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세례는 나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 없는 세례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야 다시 삽니다. 세례는 죽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교 내용에 나오는 주 인물은 다윗과 예수님입니다. 36절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여 믿게 되었습니다. 41절에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에 회심한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세례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세례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세례도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형태는 각양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십자가의 형태, 정교회의 십자가의 형태, 개신교의 십자가의 형태가 조금씩 모양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형태가 달라도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의 형태는 달라도 세례는 하나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파벌과 당쟁이 심한 교회였습니다. 세례까지도 누구에게 받았나를 문제시하였습니다. 이걸 따지고 분쟁의 요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스데바나의 집 사람(16절)에게만 세례를 베푼 것을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몇몇 당파 지도자들이 자기 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어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세례가 어떤 형식이든 세례는 하나입니다. 세례는 크게 말하면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물에 잠그는 형식과, 물을 붓는 형식과, 물을 뿌리는 형식입니다. 그 형식이 어떻든 세례의 의미는 같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산다는 것이고, 죄를 다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물에 잠그든, 붓든, 뿌리든 상징이지 물 때문에 죽고 살고 물이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다른 교파에서 세례를 받았든, 가톨릭교회에서 영세를 받았든, 이단에서 세례를 받았든 다 세례로 인정합니다. 단지 우리교회에 오면 다시 입교반에서 공부하듯이 공부를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다른 교파이든, 가톨릭이든, 이단이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의 삼위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5-6 상반절에는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합니다. 십자가와 세례는 하나입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삼위 하나님의 세례를 대신 할 이름이 없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세례란 탈선이라는 뜻이라고 어떤 분이 그랬습니다. 사랑에 항복하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란 한 사람의 인생이 끊임없이 방해받기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겠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한 사람만 사랑하고 한 사람에게 항복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세례가 둘일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연옥설’이 있습니다. 연옥설은 6세기 말 그레고리 1세 교황이 교리로 인정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의 보상을 다 치루기까지 영혼이 괴로움을 받아 깨끗함을 받는 곳이 연옥입니다. 지옥에 갈 정도의 대죄가 아닌 소죄가 사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죄가 대죄가 있고 소죄가 있습니까? 죽은 자가 산 자의 공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른 성경적 해석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자신의 믿음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나를 대신 할 수 있는 남이 없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려고 면죄부를 판 사건이 연옥설을 대변하는 사건이었고, 이 면죄부의 사건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구원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다른 중보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세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십자가와 세례를 다른 것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례 외에 다른 세례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고,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자, 같은 이름으로 세례 받은 자는 다 한 형제자매이며 같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결론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비유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게오르규는 잠수함을 탄 수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잠수함에 산소측정기가 없어 토끼를 태워 산소를 측정하였습니다. 토끼는 산소 부족에 반응이 빨라 토끼가 졸면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잠수함이 수면 위로 부상하였습니다. 어느 날 산소를 측정하기 위해 태운 토끼가 죽었습니다. 

게오르규는 토끼 대신 산소부족을 알리는 일을 맡아 잠수함 밑바닥에 내려갔습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그는 ‘시인은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사회 상황을 먼저 알아차리고 세상에 알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그리스도인은 사회에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실상 잠수함의 토끼입니다. 
  
게오르규가 토끼 대신 잠수함 밑바닥에서 산소측정을 맡았습니까? 아니지요! 그동안 토끼가 사람을 대신하여 이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서 일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찬송합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사람은 예수님을 대신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사람을 대신하십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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