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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가 구원이다 (요일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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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가 구원이다 (요일 1:5-10)


죄를 용서 받는 것과 

1. 지난 주, 미국과 한국의 여러 매체에서 '위대한 용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1984년, 네 명의 십대 소녀가 당시 78세였던 루스 펠키(Ruth Pelke)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주범이었던 폴라 쿠퍼(Paula Cooper)가 27년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2013년 6월 17일에 석방되었습니다. 

폴라가 15세였던 1984년, 그는 주일학교 선생이었던 루스 집에 친구들과 함께 방문합니다. 아이들은 마리화나를 피웠고 술도 마신 상태였습니다. 성경에 대해 듣고 싶다는 말로 루스 집에 들어간 아이들 중 한 명이 꽃병으로 루스를 쳐서 쓰러뜨렸고, 폴라는 미리 준비한 흉기로 루스의 몸을 무려 33번이나 찔러 숨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훔쳐 가지고 나온 돈은 10달러였습니다. 

철 없는 범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검거되었고, 넷 중에서 죄가 가장 컸던 폴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미국 역사 상 최연소 사형수가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범행의 끔찍함으로 인해 치를 떨고 흥분했던 여론이 '최연소 사형수'의 등장으로 인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 어린 소녀를 죽게할 수는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면서 구명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구명 운동에 불을 당긴 것은 루스 펠키의 손자인 빌 펠키가 참여하기 시작하면서입니다.

빌 펠키는 사랑하는 할머니의 처참한 죽음에 분노하면서 쿠퍼는 마땅히 사형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하여 재판에 참여하는 중에 그의 마음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은 빌이 쓴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지켜 보면서 빌은 할머니와 그의 믿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참혹하게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생각할수록 이상하게도 범인들을 용서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그 아이들을 용서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마음은 도무지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어느 날 밤, 빌은 마침내 하나님께 항복하고 용서할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짧은 기도였지만, 그 기도는 쿠퍼에게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 대목을 빌은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사랑과 동정심을 구하는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았다. 폴라를 돕고 싶은 마음이 내게 생겼고, 그를 처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다. 그 날 밤에 나는 내 인생 여정에서 가장 강력한 교훈을 배웠다. 용서가 가져다 주는 치유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다. 내 마음에 동정심이 생기자, 용서의 마음이 생겼다. 용서의 마음이 생기자, 엄청난 치유가 일어났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그 동안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나에게는 할머니의 처참한 죽음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공포스러운 기억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동정심이 생기고 이어서 용서의 마음이 생기자, 그 때 이후로는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더 이상 죽음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에 할머니가 사셨던 모습, 할머니가 헌신했던 목표, 할머니가 믿었던 것들이 생각났다. 할머니의 그 아름답고 놀라웠던 인품이 생각났다.

그 다음 날부터 빌은 쿠퍼의 구명 운동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고, 내친 김에 사형 폐지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쿠퍼가 석방되어 나온 날, 빌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쿠퍼가 이 사회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도움을 주겠습니다. 폴라가 성공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제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 폴라 쿠퍼와 빌 펠키의 이야기는 '죄'와 '용서'의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오늘은 '사도신경'을 따라 "나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묵상할 차례인데, 하나님께서 빌 펠키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의 기적은 이 신앙고백이 마음의 생각이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지난 세월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는 "과연 '사도신경'이 완전한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학자들이 지적하는 가장 큰 결함은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학자들이 지적하는 또 다른 결함은 구원의 핵심을 '죄를 용서 받는 것'으로 요약한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구원은 '용서'보다 더 큰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말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듭 난다'고 말합니다. 또한 구원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다는 말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는 뜻이며,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또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그 능력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령과 함께 살아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은 옛 가치관을 내려 놓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며,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는 것이고, 새로운 세계관에 눈 뜨는 것입니다. 구원은 거룩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다가 마침내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알기 쉽게 요약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구원은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를 포함합니다.

•마음에 천당을 얻는 것 
•매일 천당을 사는 것 
•이 땅에 천당을 이루는 것 
•죽어 천당에 가는 것 
•마지막에 천당과 함께 오는 것

'구원'이 이렇게 큰 것이라면, '사도신경'이 구원을 '죄를 용서 받는 것'으로 요약한 것은 너무 단순화시킨 것처럼 보입니다. 좀 더 포괄적인 단어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종종 이 점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 백 년 동안의 논의와 고민과 기도를 통해 이렇게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렇게 쉽게 비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신경'이 신학책도 아닌 다음에야 모든 내용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아야 합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으로서 '죄를 용서 받는 것'을 선택한 것은 아주 잘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는 인간사를 얽히고 설키게 만드는 근원적인 문제이며, '용서'는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힘이요, '용서'는 그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는 힘입니다.

폴라와 빌의 이야기가 이 진실을 증명합니다. 죄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으며, 그 사람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지를 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이 용서와 사랑을 바깥으로 흘려 보낼 때, 그것이 얼마나 큰 기적을 만들어 내는지를 봅니다. 죄가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면, 용서는 죄보다 더 큰 영향력으로 많은 사람의 삶을 치유하고 회복시킵니다. 


3.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따라 "나는 죄를 용서 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십니까?

현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가 '죄'라는 말입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이름의 우리 시대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것만 있을 뿐, 틀린 것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 무엇에 대해서도 '죄'니, '악'이니 단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는 법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은 근거 없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정도만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특별한 해를 끼치지 않고 남에게 짐 되지 않고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그런 것도 아니면서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우깁니다.

게다가, 요즈음은 대중 심리학(popular psychology)의 영향으로 인해 '죄'를 부정하는 경향이 더 심해졌습니다.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도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범한 죄는 자신의 악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이 자라면서 받은 상처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죄인은 아무도 없다. 상처 받은 사람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타당성은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동일한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다른 선택을 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한다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이 모든 착각과 자기 기만과 속임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단수로 사용되는 '죄'는 어떤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가리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우선적으로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의 유혹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 머물러 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죄들'을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그 대답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신이 되어 살아가기로 작정함으로써 죄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혼은 '죄'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고 우리는 그 바이러스 때문에 죄를 탐하고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딤전 1:15)

바울 사도가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였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과거의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그 때,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지금, 자신은 여전히 죄인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수준과 비교하면 천사와 같은 수준에 있었을터인데 말입니다.

혹시, 이것을 '영적 자학'이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꼭 그렇게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나님이 좋아하시나?"라고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어떤 형식에 따라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저절로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거룩한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어둠을 보아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죄성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4. 바울같은 분이 이랬다면, 저와 여러분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죄가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1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말씀이 9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제 아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무더운 여름 날이면, 온 식구가 마루에 누워 잠을 자곤 했습니다. 함께 누워 불을 끄고 잠을 청하다 보면, 아이들이 심심하니까 말을 걸어 옵니다. 어느 날인가, 옆에 누워 있던 아들 아이가 저에게 질문합니다.

"아빠, 무슨 죄든지 고백하면 용서 받을 수 있어?"
아마도, 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그럼, 아무리 큰 죄라도 진실하게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지."
그랬더니 한 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생각나지 않아서 고백하지 못하면 용서 받지 못해? 그러면 그 죄 때문에 나중에 벌 받겠네?"

저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흠칫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파고 들 줄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들 아이가 짐작보다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나이의 아이에게 죄가 있어 보아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벌 받을까 두려워 하고 있으니,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네가 정직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용서해 주셔. 그러니 네게 생각나는 죄만 고백하고 회개하면 돼."

제 아들에게 설교했던 그 사람은 분명히 위에서 본 요한일서 1장 9절을 가지고 설교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는지 모릅니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되면 지체없이 그 죄를 하나님께 자백해야 하고, 그러면 자백한 그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용서 자판기'(forgiveness vending machine)라고도 부르고, '죄 씻는 비누'(bar of sins)라고도 부릅니다. 이렇게 해석하고 나면, 당장 제 아이가 제기한 의문이 생깁니다. "기억나지 않아서 혹은 죄인 줄 몰라서 자백하지 못한 죄는 어찌하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이 모든 오해는 1장 9절을 따로 떼내어 읽은 까닭입니다. 성경 해석의 철칙 중 하나는 앞 뒤 맥락 안에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8절에 이어 9절까지 읽어 보면, 어떤 뜻인지가 더 잘 드러납니다.

8절: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두 절을 함께 두고 보면,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죄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대조시켜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에서는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고, 9절에서는 "나는 죄인이다"라고 인정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절은 죄를 지을 때마다 그것을 자백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자백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호몰로게오'(homologeo)인데, 이 단어는 "동의하다" 혹은 "같은 생각을 가지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9절의 번역을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번역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면"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10절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맞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여러분입니까? 


5.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따라 "나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마다 우리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래서 알게 또한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면 "신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죄'가 어떤 '행동'을 가리키기에 앞서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것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특정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해도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죄악을 범합니다. 그것을 '자범죄'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생사에서 경험하는 악은 모두 우리가 행하는 죄로 인한 것입니다.

'용서 받는다' 혹은 '용서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자범죄'에 대한 용서를 뜻합니다. 빌 펠키가 폴라 쿠퍼를 용서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자신의 할머니를 끔찍하게 살해한 죄를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도 많은 경우에 자신이 행한 죄를 용서해 달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범한 죄를 용서 받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믿음 생활에 진지한 분이라면 다음과 같은 경험을 몇 번은 거쳤을 것입니다. 즉, 어떤 죄에 대해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개운한 심령으로 돌아갔는데,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얼마 후에 똑 같은 죄를 다시 범하고는 심하게 좌절한 경험,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범한 죄악에 대해서는 용서 받았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본성에 깊이 감염된 영적 질병은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죄에 대해 용서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죄의 상태, 즉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영적 질병을 치료 받는 것입니다. 기침이 그치고 콧물이 그쳤어도 감기 바이러스 자체를 치료하지 않으면 언제든 고개를 내밀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상태 즉 원죄를 치료해야만 우리가 행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실로 추구해야 할 대상입니다. 용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죄로 물든 영혼을 치유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존재가 '죄의 상태'에서 치유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사귐'이라는 말로 그 해법을 제시합니다. 6절과 7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죄에 전염되어 있는 우리의 존재 상태가 치유되려면 하나님과 사귀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귀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사귐입니다. 사귐이 깊어지면 이심전심으로 통하게 되고, 서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사귐을 나누는 부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닮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사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보혈의 공로로 씻음 받는 것으로 끝나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늘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사귄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늘 사귀어 살면 하나님이 아들 예수의 피가 늘 우리 안에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존재를 온통 감염시켰던 죄의 바이러스가 점점 힘을 잃어 갑니다. 

그런데 죄 바이러스는 참으로 질기고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죄의 바이러스는 완전히 죽지 않습니다. 언제나 잠복해 있어서 다시 살아날 기회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거룩한 상태에 이르렀다 해도 자신이 죄인인 것 즉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을 깊이 사귈 수 있게 되고, 그 사귐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내 존재가 죄의 바이러스에서 해방되는 것이 나 개인에게는 천당에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죄의 결박이 힘없이 풀어지는 것을 느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경험해 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살다가 천당으로 옮겨 간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렇게 죄의 결박으로부터 벗어날 때, 나로 인해 천당이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나는 더 이상 이 땅에서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와 치유의 능력이 됩니다. 나 하나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으면, 나로 인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그만큼 더 확장되는 것입니다.


6. 빌 펠키가 폴라 쿠퍼에게 한 용서는 매체에서 묘사하듯 '위대한 용서'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경험해 보신 분이라면 다 아실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교우로부터, 헤어진 배우자를 생각할 때마다 억울하고 분해서 미칠 것 같다는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펄펄 끓고 있는 그 분노를 어찌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눈물로 물어 오셨습니다. 그분이 겪은 배신과 상처와 아픔을 아는데, 어찌 제가 용서하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하란다고 쉽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빌 펠키가 폴라 쿠퍼에게 보여 준 행동이 놀라운 것입니다.

빌 펠키가 어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 대목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원하면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다. 또한 나는 베드로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일흔 번을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대답하신 것을 기억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라고 기도한 것을 기억했다. 나는 쿠퍼가 할머니에게 행한 일을 용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언제고 진짜 용서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우리는 상령의 영감이라고 부릅니다. 빌 펠키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 용서의 능력을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이 이 땅에 임하는 과정입니다. 죄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사귐으로써 죄라는 바이러스로부터 벗어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는 그것을 입은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으로 흘러나가게 됩니다. 빌 펠키로부터 폴라 쿠퍼에게 용서의 은혜가 흘러간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성인 여러분,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진실되게 고백하십시다. 그리고 그 죄의 감염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며 늘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사십시다. 그분과의 깊은 영적 사귐 안에 거할 때, 그분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올 것이고, 우리를 통해 우리 이웃에게로 흘러 넘칠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천국을 이루는 것이고, 천국을 사는 것이며, 천국을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고 하나님 나라는 용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천국의 씨앗입니다.

부디, 천국의 씨앗이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마음에 심겨지고,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죄인의 구주시여,
저희가 죄인입니다.
주께서 구원하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죄인입니다.
주님께 무릎 꿇고 은혜를 구합니다.
저희 죄를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저희 존재를 죄의 감염으로부터 치유하여 주소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저희를 통해 세상에 퍼져가도록!
아멘. 

(김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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