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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 이야기(1) : 천방지축 요셉 (창 3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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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이야기(1) : 천방지축 요셉 (창 37:1-11)
 
창세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구약의 창세기를 처음 읽었을 때 매우 재밌었습니다.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주 흥미롭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야곱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요셉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야곱과 요셉은 아버지와 아들지간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성격은 너무나 다릅니다. 야곱은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 자신 속에 갇혀 있기도 합니다. 싫은 것과 옳은 것을 쉽게 표현할 줄 모르고, 마음에 담아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요셉은 자기 생각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좋아하고 귀히 여겼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인 자신에게 없는 그런 성격이 요셉에게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달라 보이는 두 사람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아주 성실히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깊이 몰두하고 몰입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쫓겨 나와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일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7년 동안 모든 것을 참으면서 정성을 다해 일을 했습니다. 성경은 ‘7년 동안 일한 그것을 수일처럼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도 비슷했습니다. 애굽에 팔려간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감당했습니다. 참으로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뿐입니까?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도 불평하지 않고 맡겨진 일에 전념했습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주인의 신임을 얻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이 하늘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또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신실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대한 그 성실성이 하나님 마음에 든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야곱과 요셉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저는 이 두 인물을 묵상하면서 남자의 생애가 아버지에 의해 얼마나 좌지우지되고, 그 앞길마저 결정되는가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새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 재고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아빠, 어디가?’라는 TV프로그램은 자녀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빠들의 어설픈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빠들은 아들을 키우면서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너는 강해야 된다!’ 그래서 주로 아들에게 하는 것은 야단을 치거나 명령을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그런 아빠가 자녀의 이야기를 듣고, 자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아버지상의 필요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서, 야곱은 아버지이기 이전에 어떠한 아들이었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열망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관심의 중심에 서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야곱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형 에서에게 늘 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늘 아버지 주변에서만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야곱에게 큰 상처였습니다. 

그 반대로 요셉은 아버지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랑 때문에 인생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에 완벽한 인물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요셉의 미성숙한 모습에 대해 나누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야곱과 요셉을 비교해 보면, 야곱은 지도자가 되기에는 너무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거짓말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자 했고, 실제로 그리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엄청난 인생의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그는 고향의 집을 떠나와 살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여러 번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문제에만 집중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에 기나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꿈을 꿨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는 꿈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셉을 지도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가 본래 성숙한 인물이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고는 여전히 철부지였고, 행동은 천방지축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우리의 삶은 새로워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요셉은 17살이었습니다. 왜 요셉의 이야기가 17세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75세 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때가 바로 17세, 75세였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진정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이 삶답게 바뀌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17세에,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꿈은 언제 이루어졌을까요? 아브라함은 25년의 세월을 기다리고 나서야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13년이 지난 30세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면서 그 꿈을 이루게 됩니다.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질문을 했고, 때로는 의심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사실입니까? 이것이 정녕 내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하고 끊임없는 물음을 하며 그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어떠합니까? 아버지를 떠나 남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마지막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인고의 시간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네가 젊은이어도 상관없다. 나이가 많으냐? 그것도 상관이 없다. 네가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혼자 있느냐? 그래도 상관이 없다. 네가 혼자만 사랑받는 것처럼 느껴지고, 네가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느냐? 그래도 상관이 없다.” 어떤 자리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야곱과 요셉이라는 두 인물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 중 요셉만을 사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셉의 17살 때 모습이 등장합니다. 저는 그의 특징을 ‘아버지에게 너무나 종속된 아들’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심하게 편애했습니다. 아주 노골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은 이러한 것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형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세기 37:3) 

요셉은 야곱이 나이가 들어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더 불쌍히 여기고 아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요셉보다 더 늦게 태어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베냐민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보다 요셉을 더 좋아했습니다. 

막내아들 베냐민을 볼 때 아버지 야곱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귀엽게 여기는 마음과 이 아들로 인해 아내를 잃었다는 슬픔입니다. 베냐민을 볼 때마다 사랑스러운 마음이 일어나면서도, ‘이놈아, 네가 네 어미를 죽였지?’하는 억하심정이 야곱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하게 된 것은, 전 생애를 통해 사랑했던 여인 라헬을 통해서 얻은 첫 번째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요셉 위에는 이미 열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아들들을 맏아들처럼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이 아들 요셉만을 맏아들처럼 여겼습니다. 요셉만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입니다. 

요셉을 향한 야곱의 편애는 이미 예전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성경은 알려줍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가족들이 많아지고, 종들도 많아지고, 가축들도 풍성하게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금의환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돌아오면서 그는 분노했던 형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형이 4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과 종들을 전부 네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맨 앞에 가축들과 종들을 세우고, 맨 뒤에는 요셉을 세웠습니다. 앞의 사람들이 공격을 당하면 빨리 요셉을 도피시켜 살려야겠다는 뜻이 야곱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야곱은 요셉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되돌아보면 그는 참 불쌍한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괴롭혔던 것이 바로 편애였습니다. 그렇게도 아버지의 사랑을 기다렸지만 아버지 이삭은 쌍둥이 형 에서만을 좋아했습니다. 그 모습에 야곱은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버지가 되고 나서는 아버지 이삭의 뒤를 이어 한 아들, 요셉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열 한 아들은 아버지가 요셉만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답답해했지만, 야곱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사이는 아들, 딸 하나 둘만 낳기 때문에 편애라는 게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많은 분들, 또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에게는 ‘나는 사랑을 못 받았어. 우리 형은 그렇게 위해주면서... 우리 언니는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하는 편애로 인한 상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 안에도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야곱은 편애 받음으로 괴로움을 당했고, 편애함으로 엄청난 위기마저 겪게 되었습니다. 편애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 역할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애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편애는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저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도 편애하는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편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까요? 왜 하필이면 야곱이고 요셉이고, 모세일까요? 

인간의 편애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편애를 받는 사람만을 향해서 모든 애정과 관심이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교만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편애는 다릅니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편애입니다. 선택받은 그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쓰임 받는 편애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선택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은 열두 명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세 제자만을 더 가까이 대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움직이셨습니다. 또 이 세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한 제자, 요한에게만 ‘사랑하는 제자’라는 칭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곧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편애는 교만과 만나고, 그것은 다른 모든 관계성을 깨뜨려 버리는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한 편애는 하나님께서 사명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이고, 은혜의 역사 속에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장자인 큰 아들을 사랑하면서, “너에게 모든 것을 주겠으니 너만 잘 살아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큰 아들을 삼고, 너에게 이처럼 사랑을 베푸는 것은 형제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네가 베풀고 끌어안으며 그들을 도우라는 것이다”하는 것이 사랑의 참다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편애는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만들어 냅니다. 나를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뭐가 못나서, 뭐가 부족해서, 무얼 잘못해서 저 사람만 편애하는가?’하는 마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받는 자에게는 교만함을 주고,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미움과 분노를 야기시키는 것이 편애가 가지는 특성입니다. 

아버지의 편애와 요셉의 행동이 가족의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의 형들의 마음에 미움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창세기 37:4)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5) 

미워했다는 말 앞에 이미 ‘더욱’이라는 글자가 붙었습니다. 미움에 미움을 더하고, 그것이 증오로 바뀌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창세기37:8)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창세기 37:11) 

형제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기 시작하고 시기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가족공동체가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요셉을 향한 아버지의 편애를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채색옷’입니다. 다른 아들들에게는 입혀주지 않은 것을 요셉에게는 입혀주었습니다. 

지금도 옷은, 어느 정도 신분을 나타내고 때로는 지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채색옷은 장신구가 달린 긴 소매가 있는 옷으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귀공자의 옷이었습니다. 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셉을 세워주기 위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얘야, 너는 특별한 존재야. 너는 다른 형제들과 달라. 내게는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지만 네가 장자야.”하고 아버지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다른 형제들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는 형들처럼 일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형들은 열심히 일하지만, 너는 내 앞에 그냥 그렇게 있기만 해도 괜찮다는 암시를 요셉과 다른 아들들에게 동시에 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이 요셉이 참 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와서 전하라고 했을 때 17살 요셉이 무슨 옷을 입고 갔을까요? 그는 형들이 입고 있는 옷이 아니라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그 차림으로 형들 앞에 나갔을 때, 형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일었습니다. 
그만큼 요셉은 철부지였습니다. 성경은 철없는 요셉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창세기 37:2) 

형들의 나쁜 소식과 허물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고자질을 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요셉이 자기들의 약점을 자꾸만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그것으로 인해 아버지가 자기들을 야단친다고 생각하면 미움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결국 이젠 더 이상 동생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창세기 37:4) 

동생과 마주쳐도 “잘 있었냐? 평안하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서 정다운 인사조차 건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러한 형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습니다. 남의 아픔을 이해할 줄 몰랐습니다. 

‘떠남’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야곱과 요셉을 변화시키는 아주 중요한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떠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늘 아버지 사랑에 집착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그를 집으로부터 떠나게 하십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자신만만해하고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안전판이라고 여기는 그것을 뿌리부터 싹둑 잘라버리십니다. 아버지 품으로부터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들은 자꾸만 간섭을 합니다. “너는 내 마음대로 해야 돼. 너는 내 뜻대로 해야 돼.” 그러나 그것은 축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풀어 줘야 됩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무심함에서부터, 아버지의 편협한 사랑에서부터 떠날 수 있도록 열어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강제로 열어주셨습니다. “야곱아, 아버지 사랑에 집착하지 말고, 이제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네 마음의 문을 열어라” 그렇게 선언하십니다. “요셉아, 네 아버지의 편애적인 사랑에 안주하지 말아라. 아버지 사랑을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와라. 이제 네 인생을 너답게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아버지의 품에서부터 떠나가게 한 것이 하나님께서 야곱과 요셉을 키우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랑으로 그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훈련시키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성장하면 아들의 마음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아들이 생각하는 것을 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넘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아들들, 딸들이 어머니를 넘어서고, 아버지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믿음의 자녀들로 세움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철부지 같고 천방지축인 요셉과 가슴을 펴지 못하고 늘 아버지 앞에 서면 우울해 하던 야곱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나 자신을 억압하는 게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게 안전판과 같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잊혀졌던 내 모습, 잊혀졌던 내 안의 달란트들을 다시 확대해 나가야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쓰실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때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성별도 상관이 없습니다. 가진 것, 가지지 못한 것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현장에서 나를 만나주십니다. 

눈치쟁이 야곱도, 눈치없는 요셉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향해 달려가는 믿음의 사람들로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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