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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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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


어느 안과병원에 갔더니 벽에“몸이 1000냥이면 눈은 900냥”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습니다. 눈의 소중함을 말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 소중한 눈을 가지고 일평생 동안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눈으로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의 가치를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일생의 삶이 1000냥이면 눈으로 보는 것은 900냥이다.”왜 그럴까요? 내 눈으로 내가 바라보는 것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내 눈으로 내가 보는 것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내 눈으로 내가 보는 것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단순히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보는 것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고, 그 마음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 행동이 삶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한 구두회사에서 두 명으로 구성된 영업부 현지 답사팀을 아프리카로 파견했습니다. 이 팀이 현지를 답사해보니 사람들이 모두 맨발로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돌아온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한 사람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사람들이 모두 맨발로 다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구두를 팔 수 있겠습니까?”그런데 다른 한사람은 긍정적인 예측 보고를 했습니다.“이곳 사람들 중 구두를 신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두를 신게 한다면 시장은 무궁무진 합니다.”사장은 긍정적인 보고를 한사람의 의견을 따라 아프리카에 진출했고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으로 똑같은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결론은 정반대였습니다. 이처럼 성공과 실패는 눈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는데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안 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눈으로 보는 것으로 볼 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경험, 자기의 능력만으로 바라보면, 사람은 누구나 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제한을 받아서 한정된 시계밖에 볼 수 없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의지하고, 산다면 나의 능력과 힘은 한계가 있고, 제한된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면 해결할 수 없게 됩니다. 

빌립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생각으로 계산하고는 안 된다는 고백을 한 말이 요한복음 6장 3절~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빌립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가 처한 입장에서 계산해 보고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시행하려고 하니 안 되기에 주님 앞에 못한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빌립이 제자답게“주님이 하시면 됩니다. 주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빌립은 자기가 당장 계산해 보았습니다.“남자만 5천명, 부녀자수 만 명이니까 조금씩 떡을 줄지라도 2백 데나리온이 라는 큰돈이 필요한데 돈도 없고 떡 살 곳도 없고 먹일 수가 없다.”는 것이 빌립의 계산이고, 생각이었습니다. 빌립은 이처럼 자기 능력만 바라보았을 뿐, 전능하신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바라보는 눈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환경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12명중에 10명은 자기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13장 31절~33절 말씀에 10명의 정탐꾼들이 자기들의 능력 범위 안에서 판단하여 보고하기를“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높은 성벽, 거인들이 사는 것을 자기들의 제한된 눈으로 본 결과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았습니다. 메뚜기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땅을 점령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처럼 자기를 보고 세상을 바라보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의 약점, 인간의 어리석음이 여기에 잇습니다. 

2. 자신과 하나님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바라 불 때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면 할 것 같고, 믿었다가 의심했다가 하는 갈등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이러한 경우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믿음과 의심의 갈등 속에 몸부림을 칩니다. 저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0절~32절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흔들리는 신앙에 대해 기록하기를“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갈 때 체험한 현상입니다. 밤 사경(새벽 3시~6시 사이)에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말하기를“만일 주님이시면 나로 물위로 걸어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걸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며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물보라가 얼굴을 때리자 바람과 물결을 바라보고, 의심이 생기자 두려워졌습니다. 두렵게 되자 믿음이 약해진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환경의 위협을 통해 의심과 두려움의 노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 봐야 하는데 눈을 돌려 바람을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두려움이나 의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바라보면 두려움과 의심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1장 6절에“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믿음에 서서 단호하게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몇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큰 시련과 실패를 통하여 내가 깨어질 때 비로소 주님만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난 후에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길밖에 없을 때 주님을 의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묘한 특성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꼭 자기 방법으로 살길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돌아와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면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어서 말씀을 마음에 가득 채워 의심이 들어올 여지가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 편에 서는 굳건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50절 말씀처럼“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고난 중에 위로가 되고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많이 읽고 외워서 어려움을 당할 때 말씀이 마음을 점령하고 지켜주도록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시편 1편 1절 말씀에“복 있는 사람은?”하시면서 2절~3절에“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한 결과는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혼자 성경을 읽어서 깊이 이해할 성경구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강건한 믿음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되 자주 들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는“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하셨습니다. 모이기를 싫어하는 사람, 모이기를 게으르게 하는 사람의 습관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잘 섭취하지 못하는 육신은 약할 수밖에 없듯,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잘 먹지 못하는 심령은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약한 믿음으로는 험한 세파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황수관 박사가 우리교회에 와서 강론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몸은, 하루 두 끼를 먹으면 우리 몸이 거기에 맞춰 두 끼를 먹어도 유지되도록 몸의 조정이 이루어지고, 하루 한 끼를 먹으면 한 끼를 먹어도 되도록 몸의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두 끼를 먹든, 한 끼를 먹든 별상관이 없는데, 문제는 전염병이 나돌 때라고 했습니다. 전염병이 제일 먼저 옮겨지는 사람이 하루 한 끼를 먹는 사람이고, 그 다음이 두 끼를 먹는 사람이고, 그 다음이 세 끼를 먹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식사를 적게 먹는 사람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그만큼 약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이치도 이와 같습니다. 평상시에는 말씀을 자주 듣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환란과 역경의 바람이 불어올 때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믿음 약한 사람은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믿음이 깊은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깊은 믿음으로 환란을 이기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님께서 우리의 붙들어 주시도록 쉼 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시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환경을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기도하는 곳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줄어들면 내게 머물러 계시던 성령님으로부터 내 스스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규칙적인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에게 한 성도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는 지금의 이 고통의 문제로 말미암아 살 힘까지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내 앞길이 캄캄합니다. 그때 웨슬리 목사님이 가만히 밖을 내다보니, 소 한마리가 담장에 가려서 앞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쭉 뽑아 가지고 ‘음매’ 하면서 담장 너머로 풀밭과 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그 사람을 보고 “저 소를 바라보시오, 왜 소가 목을 쭉 빼들고 담장 건너편을 보고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담장 때문에 보이지 않으니까 목을 길게 뽑아서 담장 위에 내놓고 푸른 풀밭과 흐르는 물을 바라는 것이지요. 성도님도 그와 같습니다. 성도님 앞에 지금 염려, 근심, 걱정, 초조, 절망이 담장이 되어서 앞을 가려 놓았는데, 그것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앞이 캄캄하지요. 담장 너머로 목을 쭉 뻗어 밖을 바라보는 소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면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염려와 근심과 불안의 담장에 가려서 멀리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편 121편 1절~2절에는“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산을 바라보면, 산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들이 목을 뽑아서 담장 너머를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도 기도를 통해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초조와 절망을 뛰어넘어 실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면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의 언덕만 바라보고 절망하지 말고, 그 뒤에 있는 넓고 푸른 초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구름만 보지 말고 그 뒤에 있는 밝은 햇빛을 보아야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도록 자꾸 우리 앞에 담장을 세웁니다.“이 염려를 바라보라. 이 근심을 바라보라. 이 절망을 바라보라. 이 문제를 바라보라. 이것이 너의 현실이다. 너는 안 돼, 희망이 없어, 너는 이제 끝났어.”라고 속삭입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바라보면 작은 문제도 점점 커져서 앞이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기도가 필요하고 심야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문제가 내 앞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1장 31절에 말씀하시기를“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애굽을 떠나 나오는데 바로 왕이 대군을 동원해서 다시 습격해 왔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군대도 없고, 무기도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우성을 칩니다.“모세야, 어디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데려와서 죽게 하느냐. 항복하고 돌아가자.”그러나 모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애굽의 병거와 군대들을 뛰어 넘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때 모세가 한 말을 출애굽기 14장 13절~14절에 기록하기를“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동요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애굽 군대도 바라보지 말고, 병거도 바라보지 말고, 환경도 바라보지 말고, 오직 너를 구원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모든 일에 한계가 있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의심이 생기고 불안해서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생각하고, 말씀에 서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할 때 기적이 나타납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꿈과 희망이 사라지지만 하나님 안에서“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어디도 의지할 곳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신다고 담대하게 외쳐야 합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목사님은“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하나님 안에서 꿈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입으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환경에서부터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가슴속에서부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내 가슴이 텅 비어 있으면 환경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시고 난 후 우리의 환경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속에 하나님으로 채우고, 하나님 뜻을 따라 생각하고, 꿈꾸고, 기도하고, 믿고,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을 통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미국의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목사님은“낙심과 불안 가운데에서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면 반드시 인생의 성공을 경험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낙심과 소망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이 내 마음을 점령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 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셔야 합니다.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밖에 안 보입니다. 나약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바라보든지 바라보는 것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늘 생각하고 바라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점령하게 됩니다. 마음을 무엇이 점령하는가가 우리의 환경을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온전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국 연방의 자치령으로써 오랫동안 백인들이 정권을 잡고 경제권을 독점하며, 백인들만 잘 살았지 흑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고 노예상활을 했습니다. 흑인들이 전체 인구의 70%가 넘지만 그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흑인 인권운동을 하다가 백인 정부에 의하여 26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한 넬슨 만델라(Neson Mandela)는 젊은 시절 감옥에 들어가서 백발이 희끗희끗해서야 풀려나왔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젊은 시절 인권운동을 하다가 26년간 감옥살이 했으니까 살아남은 것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넬슨 만델라가 갇혀 있던 감옥은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방에 겨우 누우면 꽉 들어찹니다. 그런 방에서 26년간 있었는데 건강을 유지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갇힌 죄수들이 병들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넬슨 만델라는 살아서 훗날 남아공의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그 비법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감옥에서 중노동을 하러 나갈 때, 사람들은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질질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중노동을 하러 매일 끌려 나갈 때‘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옥 좁은 곳에 들어 앉아 있는 것보다도 끌려 나가서 중노동을 하더라도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나무를 바라보고 대기에 숨을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옥에서 지내지 않고 중노동 하러 바깥에 나온 것을 감사합니다.”이처럼 긍정적 생각으로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기쁜 마음으로 일한 것이 건강의 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낙심이 안 되고 마음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여 건강하고, 병을 이기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감방에서 좌절과 분노의 시간을 보내며, 그 분노로 말미암아 병들어 죽어 가고 있을 때, 나는 감방 뒤뜰의 채소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채소를 세상에 주신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감사로 말미암아 마음의 건강도, 육체의 건강도, 생활의 희망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중에는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주변에 있는 흑인 참모들이 백인들에게 복수하여 원수를 갚으라고 했을 때 그는 말하기를“우리 남아공은 무지개 나라다. 적, 주황, 황, 녹, 청등 일곱 가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사는 나라로써 우리는 백인과 흑인과 구분을 해서는 안 된다. 다 한 동포로써 함께 살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끌어안는 사랑을 가진 것도 본문의“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고 하신 말씀처럼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삶이 다르게 결정 됩니다. 자기만 바라보면 자기를 뛰어넘는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나쁜 환경을 바라보면 그 환경에 짓눌리게 됩니다. 나쁜 환경에 사는 사람은 거의 나쁜 환경으로 물들어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도박하고, 술 취하고, 싸우는 것만 바라보게 되면, 자라나서 도박 하고, 싸우고, 술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같은 하나님이 주시는 보배로운 마음을 갖게 되고 삶이 변화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는 본문의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자, 삶의 성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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