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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 내면의 쓴 뿌리 (룻 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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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내면의 쓴 뿌리 (룻 1:19-22)

제가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다 보면 즐거울 때도 있지만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언제가 즐거우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 그럴 때에는 정말로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럼 언제 괴로우냐? 성도님들 마음속에 쓴 뿌리가 느껴질 때. 그 때는 마음이 괴롭습니다. 안 느끼면 되지 않느냐? 그건 마음대로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이 허락을 하셔서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파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외국의 어느 목사님은 성도를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거듭났는지, 그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성도님들을 접하면 적어도 마음이 열렸는지 닫혔는지, 영적으로 열렸는지 닫혔는지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적인 문제는 죄가 있느냐 없느냐 만으로 나눠서 말할 수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당연히 은혜를 받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마음에 쓴 뿌리가 있으면 은혜를 받는데 결정적인 장애물이 됩니다. 

쓴 뿌리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한다고 해서 쓴 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보수적인 교회가 실수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성도들에게 회개를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마치 회개하고 거듭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실수입니다. 

쓴 뿌리가 죄는 아니지만 쓴 뿌리에서 죄가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쓴 뿌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사람은 죄를 지었다 회개했다, 또 죄를 지었다 회개하기를 반복하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요즘에 교회뿐만이 아니고 미디어에서도 힐링이 유행하고 있습니다마는 쓴 뿌리의 문제는 그냥 힐링을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죄를 지었는데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한다면 그렇다면 그 쓴 뿌리는 해결될 수 있겠지만 누가 나에게 잘못해서가 아니고 인생이 나에게 가혹했기 때문에 나에게 쓴 뿌리가 생긴 것이라면 누구에게 안수를 받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생긴 문제는 인생으로 풀어야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란 이름을 가진 유명인이 몇 명 있습니다. 영화배우 중에도 Naomi Watts란 사람이 있고 모델 중에 Naomi Campbell이란 사람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나오미라는 예명을 가진 여자배우가 있었습니다.

나오미란 이름은 ‘즐겁다’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의 인생은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족이 오래전 모압으로 이주를 했는데 요즘말로 하면 이민을 간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남편이 먼저 죽고 두 아들이 죽고 빈털터리가 돼서 수십 년 만에 며느리 하나 달랑 데리고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됐는데 그야말로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고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를 알아보고 ‘이는 나오미 아니냐?’라고 쑤군거리는데 나오미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는 것도 괴롭습니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누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조차도 부담스럽습니다. 마치 자신을 흉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말하기를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 달라’ ‘마라’라는 말은 쓰다는 뜻입니다. 마라의 쓴 물이 있었던 것처럼. 내 인생이 쓰기 때문에 더 이상 나오미라는 이름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고 쓰다는 의미의 마라, 그 이름이 나를 그대로 표현한다, 이런 말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면 자기를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하겠습니까? 그 자괴감, 그 괴로움이 상상이 되시지요? 누가 어떻게 나오미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나오미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나오미의 입장이 돼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를 판단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나오미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게 당신의 팔자니까 그냥 그렇게 불행하게 살아라’라고 방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욥만이 인간의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오미도 욥만큼 고난을 겪어본 사람입니다. 

그럼 누가 나오미를 위로할 수 있느냐? 유일하게 나오미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들으시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 들으시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조용한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페이스 북을 보니까 어느 성도님댁 아이가 엄마가 자기를 학원에 보내주지 않는 것을 시위하기 위하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 방문에 ‘사교육 시켜주지 않으면 밥도 안 먹을 것임’이라고 써 붙였다고 하는데, 그건 부모님에게 시위를 하는 것이지요. 나오미도 지금 자신의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에게 ‘당신이 나를 괴롭게 하셨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는데 가난하게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나를 괴롭게 만든 분이 당신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게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나오미는 자기 입에 하나님의 이름을 올립니다. 어떤 사람 같으면 아예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이 나를 위해 뭘 해 주었느냐? 하나님을 믿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데 그러나 나오미는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다만 하나님에게 화가 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화가 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워하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고 섬기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영적인 문제에요. 이와 같은 나오미의 입장은 많은 사람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처럼 극단적이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인생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마음이 씁니다. 마음이 괴로워요. 속에서 쓴 물이 나와요. 감정이 쓰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접하는 사람마다 그 괴로움을 느끼고 또 괴로움을 경험합니다. 

왜 쓴 뿌리가 있는 사람이 남들에게 상처를 주느냐? 본인이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에게도 편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잘 열리지 않고 예배드리기가 힘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이런 문제는 그냥 회개해서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그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라고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면 똑같이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룻기에 해답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나오미의 시위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룻기 어디에도 하나님이 누구에게 구체적인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나오미를 버렸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무력하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오미야, 섣불리 단정 짓지 말고 나의 마무리 하는 일을 지켜봐라.’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에요. 하나님이 말씀을 하셔서 해결될 것 같으면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하신다는 것은 ‘두고 지켜보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누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때 대꾸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건 말을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인 것뿐만이 아니고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인간의 어떤 괴로움은 말로 위로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서만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독촉이 하나님의 입을 열게 하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단독목회를 했는데 목회가 너무 힘들고 교회가 부흥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 목사님의 어머니가 교회에 오셔서 며칠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금식하면서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한 마디를 하시더랍니다. ‘네가 나이 40이 되면 풀린단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목사님이 40살이 되면서부터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더라, 이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든 저의 삶이든 우리가 천국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의 운명에 대하여 섣불리 단정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지켜보아야 됩니다. 

만일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가 될 것이지만 바알의 선지자들처럼 그들이 하루 종일 뛰고 하루 종일 바알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도 듣는 자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었다고 했는데 그건 바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반대로 엘리야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기다리고 기다리는데도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도 좋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는 사람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할 일을 강조하길 좋아하지요. ‘모름지기 기독교인은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이렇게 하지 않아서 교회가 문제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서로가 해야 될 일을 강조하기를 좋아하는데 사람이 해야 될 일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줄 수 있어야 됩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무엇을 해야 되느냐를 말하는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를 보여준다면 사람은 당연히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를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지 않고 사람의 해야 될 일만을 요구하니까 반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예수님 말씀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껏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간절히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것입니다. The work of God! - 하나님이 하시는 일.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교회에서 보기 원하고 내 삶에서 보기 원하고 인간의 역사에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해야 될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이 하시는 일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성령이 일하심을 통하여 우리도 성령과 함께 일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권능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앉아계시는 분이 아니에요.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저 선비처럼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교회에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도 일하시고 우리도 일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하실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둘째로 그러면 왜 하나님은 나오미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느냐? 여기에는 무슨 대답을 해도 흡족하지 않습니다. 무슨 대답을 해도 나오미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하기를 좋아하는데 ‘왜?’라는 질문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왜?’라고만 물어서는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물으셨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어요.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오미에게 이런 불행을 허락하신 이유는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고, 룻이 보아스에게 시집가게 하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결혼을 통하여 장차 다윗 왕이 태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고, 그리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혈통을 좇아 태어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이유가 지금 당장 나오미에겐 아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에 대하여 ‘왜 이 사람이 이렇게 태어났습니까? 누구 죄 때문에 이렇게 태어났습니까?’ 이렇게 여쭈었을 때 예수님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상에서 버리셨습니까? 인간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해서 그 순간에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린 거예요. 그 순간에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대신 심판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건 예수님도 알고 계시는 것이지요. 

세 번째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못 받아들이느냐에 우리의 운명과 영혼이 좌우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영적으로 크게 성숙하고, 사람이 깊어지고, 겸손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고, 더 온유한 사람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상급을 주십니다. 

반대로 못 받아들이면, 마음이 거칠어지고, 강퍅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실족하고, 하나님의 상급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운명의 골짜기에요. 우리가 고난을 경험할 때는 운명의 골짜기를 다니는 거예요. 

한경직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든 예화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두 신학생이 목사가 되기 위하여 목사 고시를 치루고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두 사람이 다 목사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재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경험한 후에 한 신학생은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내가 주의 종이 되는데 부족한 점이 있었나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더 열심히 준비해서 다음 해에 목사고시에 합격하고 좋은 목사님이 됐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은 자기를 떨어뜨린 면접관들을 원망하고 ‘저 사람이 내가 미워서 나를 일부러 떨어뜨렸다.’라고 마음속에 억하심정을 가지고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져서 아예 목사 되기를 포기해 버렸어요. 그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운명의 골짜기를 행하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나오미가 자기를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말할 때 그 순간 본문 22절을 보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언제 베들레헴이 이르렀다고요?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성경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벌써 시작되었다는 암시에요. 나오미는 지금 자기를 마라라고 부르라고 하고 있지만 보리 추수가 시작될 즈음, 그러니까 그 자부 룻이 보아스의 보리밭에 들어가서 이삭 줍는 일을 하게 될 것이고, 보아스의 눈에 뜨이게 될 것이고,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될 것이고, 아들을 낳게 될 것이고, 나오미가 그 아기를 자기 품에 안고 비로소 위로를 받게 될 텐데 나오미가 지금 내 이름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미 그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은 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이미 시작됐어요. 조용히 시작됐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것뿐입니다. 모퉁이를 돌기만 하면 보게 될 것입니다. 운명의 모퉁이에요. 돌기 전까지는 안 보여요. 돌기 전까지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운명의 모퉁이를 돌지 않아서 낙심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운명의 모퉁이를 돌아야 됩니다. 돌기만 하면 이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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