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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전함을 이루는 복음적인 삶 (약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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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함을 이루는 복음적인 삶 (약 1:1-4)


목사요, 유치원 교사이기도 했던 로버트 풀검이 쓴 책 가운데 우리 나라에서도 번역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지혜는 대학원이라는 높은 산꼭대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의 모래성에도 있다."
인생에서의 실패라는 것은 거창한 진리나 지혜를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웠던 단순한 삶의 진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데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삶의 기본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서의 성숙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출발하면서 최초의 교육 과정에서 배웠던 단순한 삶의 기본을 실천하는 삶을 말합니다.  반면에 삶의 그 기본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미성숙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편지를 읽는 독자는 1장 1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련을 만나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나타난 기사는 처음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흩어지는 모습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박해가 오니까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과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지도자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후에 그들은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더 먼 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1장 19절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러니까 이들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팔레스타인보다 더 먼 북쪽으로 흩어집니다.  앞의 지도를 보면 위치를 보다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 지역으로 박해를 피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흩어졌지만 복음이 아직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만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었지만 그러나 아직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 무엇인지 그 삶의 기본을 정립하지를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성숙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초는 배웠지만 성숙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믿음 이후에 성숙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야고보를 일으켜서 그로 하여금 야고보 서신을 쓰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야고보는 복음 자체를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연구할 때마다 맨 먼저 등장하는 문제는 이 서신의 저자인 야고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야고보라는 이름은 우리 나라의 이씨나 김씨만큼이나 흔한 이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저자인 야고보는 도대체 어떤 야고보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면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나옵니다.  이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에서 순교하는 바로 그 야고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야고보서를 쓴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던 야고보였을 것이라고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편지의 내용을 짐작했을 때 유대 사회에 아주 정통하고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다는 추정을 합니다.

먼저 이 편지를 보면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쓴다는 사실에서 유대인이 쓴 편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유대인들의 회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당 생활에 익숙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야고보서의 교훈을 읽어보면 복음서의 산상수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가르치는 산상수훈과 야고보서의 교훈이 매우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직접 들었던 어떤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에 보면 두 가지 교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에 대한 교훈이고, 다른 하나는 경건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에는 기도와 경건에 대한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육신의 친동생인 야고보 밖에는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요한복음 7장 3절에서 5절에 보면, 예수님이 한참 활동을 하실 때 예수님의 육신의 친형제들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모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을 통해서 태어나실 그분이 예수요, 임마누엘 구원자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동생들은 그것을 확신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어느 날 동생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정말 메시아라면 왜 여기 갈릴리 나사렛에만 있습니까?  저기 예루살렘에 가서 당신 자신을 한 번 멋지게 증명해 보십시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스크린에 있는 요한복음 7장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랬던 형제들이, 그 중에 야고보가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가 될 수가 있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부활 이후의 사건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동생 야고보를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 부활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보면, 그 후에 야고보에게도 보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 끝난 줄 알았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신을 만나주셨을 때 야고보가 받았을 충격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 그분은 정말 메시아였구나!"  그 다음부터 그는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만심을 가지고 자신이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일찌감치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을 늘 죄송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서 1장 1절의 서두를 쓰는 편지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친동생 야고보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그분에 매여 그분을 증거하는 부르심을 받은 종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를 따르는 초대교회의 신자들에게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야고보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 하나가 있습니다.  그 키워드는 '온전함'이라는 단어입니다.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이 '온전함'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전함'이라는 말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숙함이라는 말이 본래적인 의미에 가까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진정한 성숙을 촉구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바로 야고보서입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복음 그 자체를 설명하기보다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복음적인 삶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좀더 이야기를 하면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복음을 듣고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기대했던 믿음의 성숙, 그 믿음의 온전함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야고보는 두 가지 초점에서 야고보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의 믿음은 시련으로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문자 그대로 여러 가지 시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의 1장 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에서 여러 가지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말은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의 색깔, 형형색색의 시험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시험들을 경험할 때 나만 이런 시험과 고통을 경험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의 종류가 다를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시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 사람은 또 다른 시험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만이 통과하고 있는 시험의 어두운 밤이 있고, 내 곁에 있는 저 사람은 그 사람만이 통과하는 시험이 있을 뿐 인생은 결코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여러분은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시험을 기쁘게 여길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정서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의지적으로라도 이것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온전함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숙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시험이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서 '페이라스모스'(peirasmos)라는 단어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련, 연단(trial), 혹은 테스트라는 의미로 쓰여질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1장 3절의 그런 경우라고 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유혹(temptaion)이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 14절에 나오는 시험이 바로 유혹이라는 의미에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서론인 머리말에서는 첫 번째 의미인 시련이라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지금 믿음의 핍박을 받아서 흩어지고 있는 성도들에게 야고보는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 견디면 우리는 성숙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여기에서 야고보는 분명하게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 그 자체를 시련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학교를 다니게 되면 학생으로서 시험을 비켜갈 수가 없습니다.  시험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시험이 즐거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고 아무도 학교를 졸업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학교에 다닐 때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질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시험이 다가오기만 하면 가슴이 설레이면서 그 시험이 너무 너무 기다려졌다는 분은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없지요?  그것이 정상입니다.

또 하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좋아할 수 없는 이 시험, 이것은 우리의 교육 제도 안에서 영원히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확신하는 분은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제 두 가지 질문 앞에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무도 시험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치고 나면 내가 어떤 과목에서 뒤떨어져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면 전체적으로 성적이 올라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입니다.  그것이 바로 향상인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 속에 때로는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분 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보면, 온전이라는 단어가 두 번씩이나 쓰여지고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야고보서의 열쇠가 되는 단어가 바로 '온전함'이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에서는 이 단어가 '텔레이오스'(teleios)라는 단어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함'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숙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시험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이 시험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보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지금 신앙의 박해를 경험하고 흩어져 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믿음의 시련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보다 온전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이 올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견디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7절 이하 12절에서 이 문제를 다시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야고보가 일관성 있게 강조하는 것은 인내입니다.  길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시련의 현실에서 도피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직면해야 합니다.

학생이 시험을 치루면서 시험지를 앞에 놓고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 시험을 안 치루게 해 주세요."  그것은 분명히 말이 안 되는 기도일 것입니다.  시험지가 앞에 있으면 무슨 기도를 해야 합니까?  "시험을 잘 치게 도와주세요."  우리는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 시험은 비껴갈 수가 없습니다.  그 현장에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직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인생의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 이스라엘과 중동의 아랍 국가들은 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6일 전쟁이라는 유명한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일화라고 합니다.  한 미국의 대학교 강의실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밤 사이에 중동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교수님이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기 클래스에 이스라엘 학생도 있었고, 아랍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학생 여러분,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 그 두 학생은 전쟁이 밤새 일어났기 때문에 몰랐던 것 같습니다.  "중동 지역에서 오신 학생들이 있는데 나는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일단은 여기서 공부에 열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여러분의 조국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평화로운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하여 여러분이 잘 견디고 수업에 열중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교수로서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이스라엘과 아랍의 두 학생이 다 결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수가 묻습니다.  "그 두 학생이 도대체 어디에 갔습니까?  내가 그렇게 수업에 열중하라고 부탁을 했는데."  친구들이 대답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학생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조국으로 갔습니다."  아랍 학생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징집 영장이 나올까봐 어디론가 잠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피하면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남아서 견디는 자가 결국에는 승리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시험을 피하는 것은 결코 승리가 아닙니다.  시험을 피하는 순간 또 다른 시험이 그에게 태산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시험은 분명히 고통입니다.  시험은 분명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견디고 적응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에서 성숙한 자로 일어설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기대하는 믿음의 성숙입니다.

왜 시련과 고통이 인생의 현장에 다가옵니까?  그 현장을 통해 우리가 보다 성숙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참으셔야 합니다.  견디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잘 견디십시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또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번째,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1장에서 온전하다는 단어를 몇 번 만났습니다.  그리고 2장을 넘어가게 되면 온전하다는 단어를 또 만나게 됩니다.  2장 2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보십시오.  여기에서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피상적으로 읽으면 이 야고보서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매우 정반대 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비슷합니다.  두 서신을 읽어보면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다.  이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한결같이 강조해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신학적 핵심 교리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통해서 이 진리를 깨닫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의로 '이신득의', 혹은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있다, 혹은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내용이 좀 달라집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직접적인 단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하면서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빼버리고 싶은 서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후대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런 루터의 결론은 너무 성급했다고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야고보서와 로마서는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배경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행함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결과로서의 행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당연히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써 행함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 맥락을 야고보서에서 살펴보겠습니다.  2장 2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기에 보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혼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어떤 사건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찾아오셔서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렸습니다.  이 드리는 행위, 그 행함으로써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인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는 이삭이 아직 태어나기 전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후손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이가 100살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식처럼 여겼던 조라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 지역으로 가버렸습니다.  늙은 아브라함은 혼자서 메마른 들판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능한 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게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믿음이 다시 부활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믿겠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아들 이삭이 태어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이 시간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장면입니다.  "내가 너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었지?"  "예!"  "그런데 그 아이가 나에게 필요한데 다시 나에게 줄 수 있니?"  이것은 아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주시는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면 드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결단을 하고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놓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삭을 데려가시지는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사건을 통해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 사건에서 행함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증명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야고보서는 2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이 행함을 통해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역사 가운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야고보처럼 그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던 사람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경건 생활에 철두철미했습니다.  그는 깊이 기도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기도를 했으면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낙타의 무릎을 가진 사람, 야고보!"

그런가 하면 야고보는 경건한 실천에 힘썼습니다.  얼마나 이웃과 약한 사람들을 돌아보았는지 그에게 이런 별명이 주어졌습니다.  "의인 야고보"(James the Just)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의인으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유달리 우리 주변에 연약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불쌍한 이웃들을 향한 배려와 돌봄을 경건의 실천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의 내용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1장 2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 것만이 경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경건입니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경건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5장 1절 이하를 보면 가난한 노동자를 착취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인을 죽이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소위 부자들을 향한 신랄한 경고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5장 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부분을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보다 직설적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방어조차도 할 힘이 없는 선량한 사람들에게마저 피를 뒤집어 씌워 죽였습니다."  소위 힘있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약한 자를 돌볼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증거는 주일날 교회에 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배를 마치고 세상에 나갔을 때 내 주변에 사회적 약자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그 순간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야 할 장소는 교회당 안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한 복판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주변의 힘들고 연약한 이웃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이웃들을 내가 어떻게 돌보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쓰고 있느냐?  이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고 있는 현장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작은 몸짓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비로소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설교를 듣지만 그것이 내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편지를 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야고보의 메시지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많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또 성경공부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우리의 행함으로 증명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럴 줄 기대는 했겠지만 천국에 가서 막상 예수님을 만나니까 너무 당황해서 첫마디를 어떻게 떼야할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제가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말씀을 많이 듣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에 합당한 삶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을 하셨는데 첫 주일날 첫 설교에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을 잘 모셨다고 모두가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에 목사님이 똑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어, 지난 주와 똑같은 설교인데?"  "너무 바쁘셔서 착각하셨나?"  교인들이 갸우뚱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세 번째 주일에 그 목사님이 똑같은 설교를 또 하셨습니다.  이제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이거 어떻게 되신 거 아냐?  어떻게 세 번씩이나 똑같은 설교를 하실 수가 있어?"  그래서 교인들 중에 용기 있는 한 사람이 목사님에게 가서 묻습니다.  "목사님, 어쩌자고 세 번씩이나 똑같은 설교를 하십니까?  목사님, 그렇게 계속해서 반복하시겠습니까?"

그때 목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설교를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설교를 듣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세 번씩 설교를 했지만 아직 제가 설교한 그 설교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실천되고 있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실천될 때 제가 새로운 설교를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가 기록된 이유입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말 온전해지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의 한 복판에서 말씀을 붙들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런 성숙의 애씀과 몸부림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붙들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몸부림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성숙을 주 앞에 보여드려야 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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