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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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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5)

온유한 자

팔복의 세 번째는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심령 가난이나 애통이 주로 내적이며 자기 자신을 위한 덕목이라면, 온유함은 겉으로 드러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온유함”이란 말(praei'")은 meek, humble, gentle 등으로 번역됩니다.  온유함, 겸손함, 부드러움 등의 의미입니다.  
  
윤리적 차원에서 즉, 대인관계에서 온유함이란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모습입니다.  타인의 권리를 존중합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 해 줍니다.  누구든지 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피해를 당했다고 복수심을 품지 않습니다.  참고 견딥니다.  
  
신앙적 차원에서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복종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고, 하나님의 처분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내 모든 생각을 접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할 뿐입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땅이란 천국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현세의 땅이나 재산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기업으로 받는다(klhronomhvsousin)는 말은 상속받는다는(inherit) 뜻입니다.  애써 획득하는 것이 아니고, 거저 받는다는 뜻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속 재산을 거저 받습니다.  
  
온유한 자가 받는 복에 대해서 세 가지 측면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 사회에서의 보편적 원리로써의 온유함입니다.  둘째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의 원리로써의 온유함입니다.  셋째는 구원의 원리로써의 온유함입니다.  


보편적 원리로써의 온유함

첫째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온유한 자가 이기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삶의 원리입니다.  온유한 자가 결국은 까칠한 사람을 이깁니다.  
  
동양에 노장 사상이 있습니다.  노자와 장자가 가르친 無爲自然(무위자연)의 교훈입니다.  공자가 인위적인 면을 강조하여 가르친 반면 노자나 장자는 인위적인 것을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인위적으로 무엇을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는 교훈입니다.  

예를 들면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굳이 높은 곳으로 흘러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순리대로 내려갑니다.  물은 흐르다가 바위를 만나면 깨지고 부서집니다.  굳이 바위를 뚫고 지나가려 하지 않고 깨뜨리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바위는 물에 깎이고 패입니다.  인간의 삶에 적용한다면 굳이 높아지려 하지 말고, 굳이 유명해지려 하지 말고, 굳이 성공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남과 부딪치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겸손하게 순리에 따르면서 때로는 손해도 보고, 양보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래도 결국은 삶을 누리는 자가 됩니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를 강하게 기르려고 애씁니다.  강하게, 자신 있게!  자기주장을 잘 하고, 어른을 무서워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애들은 영악합니다.  겁 없이 아무에게나 대들고 따집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매우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형편없이 나약합니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1살에서 24살 사이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특히 15살에서 24살까지 가장 혈기왕성한 시기의 자살 비율은 인구 10만 명 당 15.3명입니다.  질병이나 사고, 범죄로 죽을 확률보다 자살로 죽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성적 떨어졌다고 죽고, 실연당했다고 죽고, 돈 없다고 죽고, 부모에게 꾸중 들었다고 죽습니다.  강하게 기르려고 그렇게 애쓰는데, 실상은 나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나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자 필승의 법칙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 부모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양보해라!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지만, 때린 사람은 편한 잠을 못 잔다!”  서양 속담에도 있잖아요?  “펜은 칼보다 강하다!”  무인 시대가 오래 갈 것 같지만 결국은 문민 시대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외딴 섬에서 쓸쓸히 죽었습니다.  공산당이 세계를 지배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반세기 만에 망했습니다.  독재가 강한 것 같으나 민주주의가 이깁니다.  아마 북한도 곧 망할 겁니다.  살인강도, 도둑은 항상 빼앗지만 결국은 거덜 납니다.  따지고 대든다고 강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강한 것은 온유한 것입니다.  
  
온유함은 무기력함이 아닙니다.  온유는 무조건 양보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유는 타인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남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누구든지 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온유는 갈대와 같습니다.  바람이 불면 갈대는 허리를 굽힙니다.  태풍이 와도 갈대가 부러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강한 나무는 줄기가 부러지고 뿌리 채  뽑힙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결국은 온유한 자가 다 땅을 차지합니다.  재물도, 사랑도, 존귀도, 명예도, 온유한 자가 차지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보편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성도가 받는 축복의 원리로서의 온유함

둘째로, 온유한 자가 복을 받는 것은 성도가 받는 축복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신앙적인 의미에서 온유는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릅니다.  내 경험, 내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릅니다.  내 능력 내 수완을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항상 복을 주십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나,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시 37:5-34)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일에 여유가 많습니다.  빡빡 우기지 않습니다.  억척을 떨지 않습니다.  나 잘났다고 광고하지 않습니다.  남의 것에 욕심 내지 않습니다.  분노하고 다투지 않습니다.  인내합니다.  관용합니다.  양보합니다.  남을 인정해 줍니다.  그래도 부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주신 거처가 넓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  하나님 아버지 집에는 공간이 넓습니다.  온 세상이 다 아버지 집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넓을 땅을 다 자기 이름으로 등기하고 사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땅 한 평도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기대를 해 봅니다.  어디에 넓은 단독주택 하나 얻어서 물건 좀 늘어놓고 살고 싶습니다.  창고도 있고, 텃밭도 있고, 잔디밭도 있고, 땅 좀 밟으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목수 일도 하고, 고장 난 기계도 고치고, 시끄러운 일을 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집에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땅 값이 너무 비쌉니다.  싼 땅도 있긴 한 데 너무 멀리 있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땅값이 싼 곳이 어딘 줄 아세요?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 있는 산인데 공시 지가로 평당 430원 쯤 합니다.  땅 한 평 팔면 라면 한 개 사먹기도 힘듭니다.  반면에 서울 중구 충무로 1가에 있는 땅은 한 평에 2억 원이 넘습니다.  화개면에 있는 땅을 서울로 공수해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성도들이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토지 소유권이 없다면 어떻게 차지한다는 말입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소유의 개념보다는 오히려 누린다는 뜻입니다.  누구 명의로 등기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원래 모든 땅의 소유권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땅과 거기의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니라.”(고전 10:26)  누구의 이름으로 등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꽤 이름난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경치 좋고 물 좋은 산간에 별장을 지었습니다.  온갖 시설을 다 갖췄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온갖 종류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별장에는 관리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관리인은 정말로 나무를 사랑하고 꽃을 사랑했습니다.  별장 주인은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온다고 해도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관리인은 집을 지키면서 날마다 정원을 돌아보며 즐겼습니다.  과연 누가 이 별장의 진정한 소유자일까요?  물론 법적으로는 부자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모든 것을 누린 사람은 관리인입니다.  명목상 소유하려 하지 말고 실제로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 쳐다보는 데 돈 안 듭니다.  아름다운 경치 감상하는 데 돈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과 땅을 마음껏 밟고, 감상하고, 누리세요.  
  
주석가 헨드릭슨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말씀에 대해서 세 가지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첫째는 법적인 소유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실제로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자기 노력이 아닌 선물로 받는다는 뜻 등입니다.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의미가 아니라 둘째 셋째의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기업”이란 상속 재산을 뜻합니다.  상속은 노력해서 번 재산이 아닙니다.  선물로 받은 재산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온유하게 맡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선물로 받습니다.  소유권을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특권을 받습니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이 뭘까요?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빡빡 우기지 않아도 남들이 그의 의견을 따라줍니다.  잘났다고 나팔 불지 않아도 남들이 인정해 줍니다.  남의 것을 탐내고 빼앗지 않아도 소유가 넉넉합니다.  악착같이 술수를 부리지 않아도 지혜가 넘치고 삶의 수단 방법이 많습니다.  값을 깎지 않아도 덤을 얻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께서 천국과 함께 덤으로 주시는 게 많습니다.  의식주를 채워주십니다.  풍족함이 넘칩니다.  
  
이삭은 한 때 블레셋 사람의 땅에 거주했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농사는 물론 양 떼에게 먹일 물이 없어졌습니다.  이삭은 애굽 땅으로 이주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가지 말고 그 땅에 머물러라!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삶을 맡겼습니다.  그는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 땅에서 농사와 목축을 계속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왔습니다.  농사가 잘 되어 100 배의 소출을 얻었습니다.  양과 소가 번성하여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가뭄과 상관없이 물을 주셨습니다.  이삭이 땅을 파는 곳마다 샘물이 솟아났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했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세 번째 우물을 팠을 때에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화해를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는 것을 내가 봤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했습니다.  장소가 넓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처분을 따르는 자는 넓은 땅을 차지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  

“네가 발로 밟는 땅을 다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3:7)  온유한 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누리게 하시는 선물이 많습니다.  강퍅하게 살지 말고 온유하게 사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누리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원리로서의 온유함 

셋째로, 구원의 원리로써의 온유함입니다.  온유한 자가 구원 받고, 영생 얻고, 천국을 상속 받습니다.  이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본문은 구약 성경을 배경으로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출애굽은 구원이요, 광야 생활은 현세의 비유요, 가나안 입주는 천국 입성을 상징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해서 출애굽을 했고, 어떻게 광야를 무사히 통과했고, 어떻게 가나안 땅을 차지했을까요?  
  
혹시, 이스라엘이 군사력이 우월 하고 군대 훈련을 잘 했기 때문입니까?  무기가 좋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오합지졸에 무기는 맨손에 가까웠습니다.  그렇다고 지혜가 뛰어나고 작전이 좋았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군사 작전을 펼칠 만큼 뛰어난 작전통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출애굽을 했고, 어떻게 광야를 통과했고, 어떻게 가나안 땅을 차지했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지시대로 온유하게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구원자로 보내셨을 때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구원을 집행했습니다.  광야 40 년을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진행했기 때문에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섰습니다.  머물라 하면 머물고, 떠나라 하면 떠났습니다.  어떻게 요단강을 건넜습니까?  어떻게 여리고 성을 점령했습니까?  어떻게 가나안 족속을 몰아냈습니까?  오직 하나님 지시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온유하게 하나님 처분대로 따르는 것!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 구원 받고, 광야를 통과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유입니다.  
  
광야 시절 모세에게 대들고 따진 사람은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길로 묵묵히 따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 7:6-8)  
  
오늘날 누가 천국을 차지할까요?  온유한 자가 차지합니다.  온유함이란 그저 아무 일도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하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용서받으라고 하면 용서를 받아들입니다.  용서 받지 않겠다고 뻣뻣하게 대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시면 그런 줄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의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처분대로 따를 수 밖에 없는 자 인줄 알고 순종하는 자가 바로 신앙적으로 온유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속죄를 의지하여 천국 백성이 됩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속죄를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는 선하고 의롭게 살았노라고 장담합니다.  이런 사람이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다!”  하나님이 들으시면 진노하실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을 믿지도 않거니와, 천국이 있다 해도 자기 스스로 갈 수 있다고 빡빡 우깁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천국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거저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죄를 용서 받는 일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무료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온유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모세가 있습니다.  에녹이 있습니다.  노아가 있고,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회개한 기생 라합이 있습니다.  우편 강도가 있습니다.  세리 마태가 있습니다.  삭개오가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있고, 고넬료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있고, 바울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처분을 따른 자들입니다.  즉, 온유하게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길로 온 사람들입니다.  
  
지옥에는 누가 있을까요?  자칭 스스로 강하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애욕의 죄를 범한 사람들, 탐욕의 죄를 지은 사람들, 분노와 무절제한 사람들, 우상 숭배자들, 폭력죄를 지은 사람들, 유혹자, 아첨꾼, 점쟁이, 탐관오리, 위조 화폐를 만든 사람들, 위선자, 도둑, 사기꾼, 모략가, 분열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지옥 맨 밑바닥에 배신자들이 있습니다.  배신자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친족을 배반한 영혼들, 조국을 배반한 영혼들, 손님을 배반한 영혼들, 배은망덕한 배반자가 거기에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들고 따지기 좋아하는 자칭 강한 자들입니다.  아마 우리 시대의 자칭 강한 자들도 다 지옥에서 만나게 될 겁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처분에 순종하는 온유한 자들의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2)  모든 자만을 버리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처분을 고분고분 따르는 온유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천국을 상속 재산으로 주십니다.  이런 복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니다.  

오늘은 온유한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첫째로, 보편적 삶의 원리입니다.  둘째로, 성도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원리입니다.  셋째로, 구원 받는 원리입니다.  강하게 살려고 하다가 산산조각 나는 인생이 되지 말고, 온유하여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서 상속 재산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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