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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처는 아픔이 아니라 사명이다 (왕하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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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아픔이 아니라 사명이다 (왕하 4:1-7)


사람마다 상처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상처를 받으며 태어납니다. 그래서 태어나자 말자 누구나 다 울게 됩니다. 사람은 울면서 태어나 울면서 죽는 상처의 동물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출생 상처라고 합니다.
상처받은 사람의 행동은 정반대로 두 갈래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인격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알기에 동일한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고, 상처받았기에 남의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대 행동으로 나옵니다.
부정적인 분출과 긍정적인 분출이 있다는 말입니다.

술이 없으면 살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는 알콜 중독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온 재산을 팔아 술을 마셔 버리고 패가 망신하고 말았습니다. 후에 큰 아들은 입에 술을 한 잔도 대지 않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같이 술고래가 되었습니다. 신문기자가 큰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
“내가 술을 마실 수 있습니까?”
둘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술을 마십니까?”
“내가 술을 안 마실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술 때문에 큰 아들은 술을 안 마시게 되었고 둘 째 아들은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상처가 전가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사원이 직장에서 사장님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 와서 어머니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어머니는 자부에게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아내는 시어머니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부엌으로 나가서 부뚜막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걷어 찼습니다. 고양이는 화가 나서 쥐를 잡아 먹었습니다. 상처는 마치 독화살같아서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으면 그 화살을 빼서 남에게 쏘아 대게 됩니다. 

군대에서 보면 상관에서 괴로움을 당한 사람이 꼭 부하를 괴롭힙니다.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은 아내는 시어머니가 되면 자부를 괴롭히게 됩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를 알기에 남의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고 계십니다. 깊은 상처는 아픔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상처를 받아 본 이만이 상처를 알 수 있습니다. 아파 본 이만이 남의 아픔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중학교 다닐 때 깊은 상처가 하나 있습니다.
등록금을 내지 못 하여서 퇴학맞을 뻔 한 적이 있습니다. 칠판 오른 쪽에 등록금을 내지 못 한 사람 이름이 항상 적혀 있었습니다. 가나다 순서이기에 내 이름이 항상 제일 먼저 적혀 있었습니다.
너무나 오래 등록금을 못 내니까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사무실에서 나를 세워놓고 아버지와 담임 선생님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 장면이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습니다. 강 문호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조금만 더 참아 주시면 등록금을 내겠습니다.”
“이미 늦출 만한 시기는 지났습니다. 학교 방침입니다.”
선생님 앞에 아버지는 고양이 앞에 쥐와 같았습니다. 교무실 벽 칠판에는 반별로 등록금을 내지 못 한 학생들이 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나같은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는 교문을 나서면서 공부를 그만 두고 취직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마지막 나서는 교문을 붙들고 막 울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왜 이렇게 가난할가?”
“나는 이제 공부길을 접어야 하는 구나!”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참 울다가 아버지 생각이 나서 뒤를 보니 아버지도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울고 계셨습니다. 나는 그 때 결심하였습니다.
“장학금을 받자. 열심히 공부하자. 그래서 돈 때문에 아버지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자.”
그래서 그 후부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 후 내가 목사가 되고 나니 가끔 중고등학교에서 특강 요청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때 그 상처가 문득 생각이 납니다. 약간의 돈을 가지고 가서 등록금 때문에 상처받고 있는 아이들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내가 아팠기에 그 아픔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사명이 되었습니다.

성구를 만들고 계시는 임 선재 장로님 이야기 하나 더 드리려고 합니다.
신애성구사 임 선재 장로님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봉천 감리교회에 집회를 몇 번 하면서 나는 그 분과 식사를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 때 임 장로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여 주셨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릴 때 너무나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심장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병원에서 치료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가 무료로 치료하여 주어서 살아 났습니다. 그 후 그는 돈벌게 되자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나를 무료로 치료하여 주셔서 내가 살아났다. 이런 환자가 많을 것이다.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장로님은 매년 한 명이 심장수술받을 돈을 그 의사 선생님에게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돈이 없어 심장 수술을 받지 못 하는 환자를 살려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상처는 아픔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내가 아팠기에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처를 받았기에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고, 상처를 받았기에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이렇게 설명하는 분이 있습니다.

국수를 끓이기 전에는 딱딱 부러집니다. 조그만 건드려도 조각조각납니다. 그러나 100도 이상으로 푹 끓이고 나면 결코 부러지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국수발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밖에 사는 사람은 상처받으면 조금만 건드려도 터지고 맙니다. 폭팔합니다. 그러나 성령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남의 상처를 잘 알기에 남을 사랑하고 도와주고 상처를 치료하여 주는 사람이 됩니니다.

오늘 본문에 상처를 당하였기에 남의 상처를 같이 싸매 주는 엘리사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선지자는 세 가지 아픔의 상처를 가진 이들입니다.

1. 가족과 분리되는 생이별의 상처

엘리사는 부자 농사꾼이었습니다. 소 24마리로 농사를 짓는 농부였습니다(왕하19;19-21)
그런데 엘리야가 길을 지나다가 엘리사를 선지자로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가족과 헤어지며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모래는 저 곳으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야 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를 만났을 때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그도 가족을 떠나 살았습니다.

2.. 가난의 상처

선지자는 일반적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다른 일을 하려고 하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몹시 가난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선택된 가난은 가난이 아닙니다. 선지자의 두 번째 아픔은 가난이었습니다. 엘리사도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 저 집을 떠돌아 다니며 지냈습니다. 엘리사를 사랑하는 한 여인은 자기 집에 작은 방을 만들어 두기도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영적으로는 부요하였지만 육적으로는 대단히 가난한 아픔의 상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3. 고독의 상처

선지자의 세 번째 아픔은 고독이었습니다. 바른 소리를 하여야 하니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말대로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되기 쉬웠습니다. 광야의 소리처럼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며 살아야 하니 얼마나 고독하였을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알기에 상처받은 이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프기에 네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는 이야기로 본문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 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는 이 여인의 부르짖음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엘리사는 이웃을 방문하여 그릇을 빌릴 수 있는 만큼 빌려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 그 그릇들에게 기름병을 들고 기름을 부었습니다. 빌려 온 그릇이 다 차고 넘쳤습니다. 그릇이 없었습니다. 기름흐르는 것이 멈추었습니다.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다시 한번 외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상처는 아픔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내가 아프기에 네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가족과 분리되는 상처, 가난의 상처, 고독한 상처를 지니고 살고 있는 선지자였기에 이 여인의 상처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압니다. 아픔을 아는 사람들은 아픈 사람을 압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습니다. 상처를 크게 가졌던 이들은 남의 상처를 내 상처처럼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일도 내 일처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엘리사같은 삶을 살 수가 없을 가요?

1. 상처받은 이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픔으로 신음하며 부르짖는 이들이 많습니다. 엘리사는 상처받고 부르짖는 여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1)

우리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상처를 지니고 몸부림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1. 불치병 환자.
2. 극심한 가난으로 조금만 도와주면 최저 생활을 할 수 있는 이들.
3. 문제 해결능력이 없어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
4. 부부 사이에 갈등으로 몹시 괴로워 하는 이들.
5. 소년소녀 가장.
6. 집안 식구중에 누가 원치 않는 곳에 들어가 생활능력이 없는 이들.
7. 보호자가 없는 노인.
8. 학대받고 있는 아이들.
9. 노숙자들.
10. 점심을 먹지 못 하고 있는 어린이나 어른들.

이런 이들이 우리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아픈 이들은 아픈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30년 동안 한결같이 사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한 분이 TV에 소개되었습니다. 무료봉사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습니다. 어떤 기자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내 아들이 학교에 가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통사고가 나기 쉬운 지역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나같은 상처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합니다.”
상처는 아픔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내가 아프기에 네 아픔을 이해랄 줄 알게 됩니다.

2. “어떻게 하랴?” 물어주어야 합니다.

엘리사는 가족분리, 가난 그리고 고독으로 상처를 당하고 있는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2)
우리도 이들을 찾아서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얼마 전 나는 우리 교회 주변의 세 동장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이 동네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여 주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동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동장 생활에 20년에 목사로부터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았습니다.”
나는 이 대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하니 아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때 그 동장님이 이런 요청을 하였습니다.

동회 옆에 월남에서 고엽제 환자가 되어 몇 십년째 누워 있는 남자가 있습니다. 친구들이 자주 면회를 왔었습니다. 그 부인이 예뻤습니다. 자주 면회오던 친구와 아내가 불륜의 관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고엽제 환자는 그 친구가 그렇게 자주 와 주는 것이 고맙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사실은 자기를 면회오는 우정이 아니라 자기 아내와 불륜의 관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혼자 누워 있는 데 쌀은 동회에서 제공할 터이니 김치나 밑반찬을 좀 해다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얼마간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 상처를 당하고 있는 이들을 찾아 보십시다. 그 상처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도록 우리가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도 이들을 찾아 무엇을 어떻게 하여 주어야 할 지 물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명령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3.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여 주어야 합니다.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3-4)
엘리사가 지시하는 대로 그 여인이 하였습니다. 문제 해결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이 나갈 길을 제시하여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이만이 남의 상처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상처는 아픔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내가 아프기에 네 아픔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월남 전쟁에 참전한 참전 용사입니다.

월남 전쟁을 치르고 지옥 같은 전쟁의 후유증을 지금까지 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80만 명이 '후유증 스트레스(delayed stress)'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적을 죽여야 하고 적군에 동료가 죽는 모습을 생생하게 본 상처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십 만명 가량이 자잘하였습니다. 10만명은 월남에서 전사한 사람의 두 배 정도입니다. 그리고 월남전 참전자의 이혼율은 90%이 넘는다고 합니다. 성격이 이상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월남전에 직접 관여한 군인은 3백 5십만 명입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과 연관된 자를 합해 4천만 명이 지금까지도 월남전 비극의 깊은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처를 이기지 못 하고 살고 있습니다.

한번 상처가 되면 치유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용서와 사랑입니다. 어렵지만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기적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엘리사는 자기가 상처를 받아 보았기에 남의 상처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빌려 온 그릇에 기름이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기름을 팔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을 만큼이었습니다. 그리고도 남아서 생활비로 쓸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내가 남보다 많이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내가 남다른 아픔을 가졌다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그런 고통을 당한 이들을 돌보라는 사명입니다.

성경에서 욥만큼 상처받고 아파한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 10명과는 사별하였고 아내와는 생이별하였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빼앗기고 가난한 이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병까지 들어 잿더미에 앉아 있었습니다. 도저히 재기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 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어린 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욥 19;13-21)

욥은 상처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1. 형제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2. 친척이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3. 우거하는 자 즉 방문자들이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4. 계집 종이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계집종은 종중에 종이요 가장 비천한 이들입니다.
5. 남종들이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6. 아내까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7. 동포들이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8. 아이들까지도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9. 가까운 친구들까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10. 하나님까지 상처를 주는 것같습니다.
21절에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위로를 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상처를 주는 이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큰 상처를 당하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남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아프기에 아픈 이들을 알았습니다. 큰 상처를 받았기에 작은 상처받은 이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상처받은 이는 남의 상처를 볼 줄 압니다. 아픔을 당한 자는 남의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엘리사와 같은 심장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상처받았기에 남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아프기에 남의 아픔을 나눌 수가 있어야 합니다.

1. 상처로 부르짖는 이를 찾아야 합니다.
2.. “어떻게 하랴?”라고 물어 주어야 합니다.
3.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여 주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기적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성막 수양관에서 성막 쎄미나 180기를 할 때 생긴 이야기입니다. 맹인 목사님들이 27분이 오셔서 공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전체에 맹인 목사님들이 130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 지를 자세히 보았습니다. 새벽 시간에 은평 침례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김 택수 목사님이 설교하셨습니다. 나는 오랜만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1965년 12월 4일 19살 때 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에서 가성소다와 청산가리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마솟을 열다가 폭팔하여 얼굴에 뒤집어 쓰면서 눈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걸을 걸어 가고 있는 데 한 사람이 팔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미는 팔을 만져 보니 손이 없었습니다. 손목만 있었습니다. 

“당신은 손없는 병신이군요. 나는 두 눈없는 병신입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그가 말을 받았습니다.
“형제여! 나는 두 눈도 없습니다.”
“나보다 더 하군요. 손도 없고 눈도 없군요?”
그가 말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당시 우리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맹인 교회를 담임하고 목회하고 있는 강 영준 전도사였습니다. 그는 성냥 공장을 하는 아버지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목을 잘리고 두 눈을 잃었습니다. 그 후 비관한 그는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런 지경이 되었는 데 어머니는 위로하기 커녕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네가 그렇게 방탕하니까 그렇게 된 것 아니냐?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수님을 잘 믿어라.”
어머니의 벼락같은 호령에 그 때부터 신앙생활을 잘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가서 전도사가 되었다고 간증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 소망이 있다고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 택수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맹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안마와 침술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침술을 배우고 안마를 배우다가 뛰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피어선 신학교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이냐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된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지금은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신조를 간증하였습니다.
하나는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으면서 남을 즐겁게 한다는 신조입니다. 그래서 성도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나서 맛이 없으면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맛이 있는 집에 가서는 “참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인생의 신조는 “혼자 살면 외롭고 둘이 살면 괴롭다”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살면서도 부딪치지 않고 살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기에 상처가 많지만 잘 극복하며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을 모아서 목회를 잘 하고 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상처는 아픔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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